그 어디에도 안전지대는 없다
친한 대학 선배 언니와 이야기하면서 늘 고민하던 것은 이거였다. 결혼하고 아이를 가지고 나서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잘할 수 있을까. 일을 하는 회사원으로서도,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도 욕심이 있던 언니는 우리가 만날 때마다 이 고민을 털어놓았다. 정말 열띠게 토론도 해보고, 여러 가지 아이디어도 내놓아 봤지만 도통 길이 보이지 않았다. 회사를 다니면서 아이까지 잘 키우고 싶다는 건 그저 욕심인 것이었을까. 한편 언니랑 진지하게 같이 고민하고 이야기했지만 이미 결혼에 아이까지 있는 언니에 비해 나는 시간이 좀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20대 후반이었고, 결혼 생각은 당분간 전혀 없었으며, 그저 열심히 일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내가 다니던 회사를 되돌아보니 내 앞길 역시 막막했다. 차라리 비혼주의자였다면, 아이 없이 남편이랑 알콩달콩 살 생각이었다면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결혼도, 아이도 가지고 싶었다. 지극히 평범한 꿈을 가지고 있다 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욕심 많은(?) 사람이었기도 했던 것이다.
당시 회사에 있는 여성을 나누어 보자면 이랬다. 나처럼 결혼하지 않은 젊은 축에 속하는 여성이 있고, 높은 자리에 있는 여성 역시 미혼이었다. 그리고 결혼에 출산을 한 여성이라면 회사에 눈치 보이는 현실에, 아이에게도 미안한 마음에 속상해진 마음을 종종 토로하곤 했다. 몇 년을 같은 카테고리의 사람들만 보다가 난 결심했다. 프리랜서가 되기로 말이다. 나의 일도 정말 중요하지만, 내가 일을 하는 이유는 나의 가족과 행복하기 위해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퇴사를 할 때 미련 따윈 없었다. 눈물이 많은 탓에 몇 번 눈물을 흘리곤 했지만, 그건 미련의 눈물은 아니었다. 선배들이 그동안 일한 시간들이 아깝지 않냐며, 계획 없이 그만두는 것처럼 보이는 나를 계속 다독이고 다시 생각해보라고 설득했다. 하지만 난 사실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먼 훗날 언젠가는 이런 분위기가 바뀔 수도 있겠지만, 내가 있는 동안은 바뀌기 힘들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더불어 내가 그 변화의 총대를 맬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그 총대를 매라던 선배 역시 이루지 못한 것인데 무책임하게 나에게 도전해보라는 말을 들으니 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내 자리를 정리하고 나왔다. 프리랜서의 세계로 입성하기 위해.
한동안은 나에게 주어진 자유를 만끽했다. 카페에 가서 차와 커피를 서너 잔씩이나 시키며 하루 종일 책도 읽어보고, 그 당시 핫했던 북카페에 이끌려 북카페 투어도 다니고, 배우고 싶었던 캘리그래피도 배우고 말이다. 나는 정말 회사원에 딱 맞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생각보다 어찌나 행복하던지! 한 서너 달은 마음이 구름 위로 둥둥 떠다녔던 것 같다. 그래도 계속 이렇게 지낼 수는 없으니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그게 생각보다 쉽지는 않았다. 그리고 야금야금 줄어가는 돈을 보며 이 돈이 더 쪼그라들기 전에 생각해 놨던 티트립을 가기로 했다. 그렇게 다녀오면 뭔가 찾겠지 싶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생각이 없었던 건지, 무모했던 건지, 아님 젊어서 그랬던 거였는지 그렇게 의식의 흐름대로 다녔던 것 같다.
다행히 여행 중에 차로 강의를 해야겠다는 확신을 얻었지만, 한국에 오자마자 바로 실행에 옮기기에는 내가 자신이 없었다. 지식적으로도 좀 더 공부를 해야 할 것 같았고, 여기저기 자리를 찾아봤지만 지원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관련 경험이 필요할 것 같아서 티브랜드나 티룸에도 일을 해보고자 지원했지만 나이 때문이었던 건지, 아니면 나의 부족한 경력 때문인 건지 그들은 나를 선택하진 않았다. 그리고 문제는 돈도 점점 더 떨어져 갔다는 것이다.
당시 내가 살던 곳은 창천동이었다. 연남동에서 길만 건너면 바로 창전동인 그 위치였다. 그래서 연남동을 자주 가거나, 연남동을 거쳐 다른 곳으로 가야만 했었다. 데이트하기 좋은 곳이기도 하니, 그만큼 갈 데도 많았는데 난 당연히 가지 못했다. 심지어 다른 곳은 다 안 가도 새로 생긴 티룸은 가보고 싶었는데 그것조차 금전적으로 고민이 되는 상황이니 너무 속상하기만 했다. 하지만 내가 해야 하는 일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또 졸라매야 하는 것이었다. 나이 서른이 넘어 부모님께 손 벌리고 싶지 않았으니 그 방법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집에 있는 책을 중고서점으로 가져다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책으로 시작한 것이 집에 팔만한 것이 있으면 다 가져다 팔았다.
그 와중에 당시 사귀던 남자 친구(현 남편)와 결혼 이야기까지 오갔다. 조금이라도 돈을 벌고 가고 싶은 마음에 결혼을 좀 늦추고 싶었는데 상황상 그게 되지 않자 여러모로 스트레스는 더 쌓여갔다. 어디선가 누구는 결혼할 때 부모님께 삼천만원을 드리고 결혼했다는 말을 듣고, 나도 나중에 꼭 그렇게 해야지 하고 결심했었는데, 나는 이제 빈털터리가 되어 엄마 아빠한테 돈을 보태달라고 해야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난 마음이 조급해졌다. 우선은 내가 할 일에 대해서 여기저기 퍼뜨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업을 할 곳을 찾는다는 고민도 털어놓았다. 본격적인 일은 아니었지만 하나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내가 유럽 여행 중일 때, 한국에 오면 만나자는 선배와 만든 프로젝트였다. 유튜브로 차와 관련된 강의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었는데, 지원사업을 통해 하는 것이라 우리는 준비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때는 유튜브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생소한 때였는데, 그 프로젝트 덕분에 좋은 경험도, 유튜브의 콘텐츠도 만들어본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이걸로 추후 강의 문의 들어오긴 했었지만, 그 당시에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 이후 나는 계속 차를 공부하기만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도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돈이 똑 떨어져 힘들 때마다 기회가 찾아오곤 했다. 작은 강의들이 하나둘씩 찾아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생각보다 적은 페이였지만, 시작하는 나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공짜로 수업을 해 드렸어도 되었을걸 하는 생각도 든다. 지금에 비해 나 자신이 너무 부족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저 그때 수업에 대해 좋은 피드백을 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할 뿐이다. 하루는 신문사에 다니는 후배가 고맙게도 나에게 인터뷰 요청을 해 큼지막하게 기사를 실어주기도 했는데, 그걸로 또 다른 기회가 찾아오기도 했다. 그리고 네이버에서 진행하는 오디오 클립에도 지원해, 오디오 클립도 시작하게 되었다. 오디오 클립을 듣고 여기저기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퍼즐이 하나둘씩 맞춰지기 시작했고, 아직 완성된 퍼즐은 아니지만 지금 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전에 비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지만, 현재 나는 수년 전 선배 언니와 했던 질문을 스스로에게 다시 묻고 있다.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돌보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할 수 있을까. 두 가지를 다 한다는 것이 과연 과한 욕심인 걸까.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나의 일로 다가온 것이다.
한동안 아이가 찾아오지 않아 몸을 사리며 생활했다. 일을 확장하고 싶었지만, 무리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에 최소 반경을 정해놓고 활동했다. 그리고 약 일 년 후, 감사하게도 원하고 원하던 아이가 지난해에 우리에게 찾아왔다. 아이는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도 예쁘고 소중했다. 그렇지만 나의 일도 너무 하고 싶었다. 특히나 양가의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되니, 점점 스트레스는 쌓여갔다. 낮에는 아이를 안고 울고, 저녁에는 아이를 재우고 소파나 서재에 앉아 울었다. 너무 화가 나 빨래를 개다 빨래를 힘껏 던져버리기도 했다. (그릇을 던져야 더 속 시원했겠지만, 막상 할 일이 태산인 내가 다시 치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직 돌 전의 아이이지만, 그래도 패턴이 생겨 전보다 수월해졌다면 수월해져 아직도 나에게 주어진 한정적인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실행하는 것이 매일매일 나의 미션되었다.
너무 힘이 들고 속이 상하면 차를 마시며 마음을 다독였다. 차 한 잔을 하면 그래도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차향을 깊게 들이마시며 숨을 다시 내쉬었다. 잠깐은 차에만 집중하며 다른 것은 잊으려고 노력도 해보았다. 차를 하면서 만나게 된 몇몇 선생님께서 해주신 좋은 말씀도 큰 힘이 되었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숭고한 것이에요.
그동안 놓지 않고 차 공부를 하고 있다가, 때가 되면 다시 시작하면 돼요"
"다시 하라면 못하겠지만, 그래도 너무 부러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중이세요"
등등 마음 담아 해 주신 말들이 어찌나 힘이 되던지... 되뇌고 되뇌며 나를 다독이고 또 다독였다.
요즘은 주말을 활용해 종종 강의를 시작했는데, 강의를 준비할 때마다 얼마나 신나는지 모른다. 듣고 싶던 강의도 신청해 듣는데, 다시 학생이 된 기분을 느끼며 필기할 때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순간 중 하나이다. 극적인 상황 속에서 나의 만족감이 배가 되는 느낌이랄까. (그렇다고 해서 이런 극적인 상황을 다시 맞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 어느 곳에도 안전지대는 없다는 걸 오늘도 새삼 느낀다. 회사원을 탈출해 프리랜서의 길로 입성했지만, 이곳도 마냥 꽃밭은 아니었다. 물론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당연히 프리랜서를 택하겠지만 말이다. 길을 닦는 것은 우리의 몫이기에 오늘도 아이를 재우고 이렇게 글을 쓰고, 다 쓴 후에는 저녁에 있을 수업 내용을 다시 들춰봐야 한다. 그래도 한 가지 긍정적인 점은 내가 차를 놓지 않았고, 차로 계속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작은 점들이 나중에는 하나의 끈이 되어 예쁜 선물상자를 묶어낼 때까지 오늘도 힘을 내 본다. 그리고 나와 같은 상황에 있는 그 누군가를 위해 마음을 나누어 본다.
'그래요, 오늘도 우리는 해냈어요. 내일도 화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