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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terrace Aug 23. 2019

나의 작은 스승님.

글디오: <글로 보는 라디오> #23



삶에서 자신에게 가장 영향을 주는 말은 무엇인가요?


기쁨을 더해주는 말, 용기를 북돋아주는 말, 슬픔을 극복하게 해주는 말, 겸손하게 살라는 조언, 지친 삶을 위로해주는 말 등등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요.


三人行 必有我師焉(삼인행 필유아사)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


저는 이 말을 참 좋아해요.


누구에게든, 어디에서든 배울 것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좋나요. 나보다 나은 사람에게서는 좋은 점을 배우고 나보다 못한 사람에게서 보이는 나쁜 점은 반면교사로 삼고요. 그러니 누구나 스승이 될 수 있어요. 배움에 대한 열린 자세로 늘 배울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되고 싶어요. 이 말은 제가 그런 사람이지 못하다는 뜻이기도 해요.



오늘의 저의 스승은 제 아들이랍니다. 6살인데요. 어려서부터 여행을 데리고 다녀서인지 감성이 풍부하고 표현력도 좋아요. 이 녀석이 가끔은 엄마 아빠를 깜짝 놀라게 하거나 부끄럽게 만드는 말을 던진다니까요.


한 번은 학교 아이들 문제로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가만히 우리의 이야기를 듣던 아이가 그러더라고요.


"엄마. 청소년은 '청'자가 들어가서 말을 안 듣는 건 아닐까요? '청'개구리처럼요."


이 말은 들은 저희 부부는 무릎을 탁 쳤다니까요. 팔불출 같나요? 사실 청소년기가 푸르른 시기라서 '청'이라는 글자가 들어갔다고 생각했는데 아이의 말대로 생각하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해지는 거 있죠. 청개구리처럼 철없이 그러는 시기가 '청소년기'라고 생각하니 이해하게 되더라고요. 이러니 아이가 어리다고 마냥 우습게 볼 일은 아니더라고요.



오늘은 하루를 좀 길게 써보고 싶은 날이에요. 돌아갈 날이 임박했으니까요. 변명 같지만, 아침을 준비하는 시간도 줄이기 위해 집 앞 도시락 집에서 덮밥을 사다 간단히 먹었고요. PT를 받으러 갔고 운동을 마치고는 토스트를 사 먹었어요. 그리고 드라이브를 가기로 했죠.

  

내일 날씨를 장담할 수 없으니 제주를 떠나기 전 화창할 때 예쁜 바닷길을 달려보려고요. 제주는 한라산이 있어서 그런지 유독 일기예보가 자주 틀리는 곳이에요. 한라산을 중심으로 상상할 수 없는 다른 날씨가 나타나니까요.


뒷좌석에서 아이는 끊임없이 말을 걸고요. 저는 대답해주느라 경치를 구경할 틈도 없네요. 아이가 낮잠을 자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때 맞은편에서 차가 와요. 교행을 하려면 한쪽이 비켜서야 하는 외길이에요. 다행히 군데군데 비켜설 수 있는 공간이 있어요. 이번엔 상대차가 비켜서면 될 공간이에요. 그래서 기다리고 있는데 계속 직진을 해와요. 저한테 후진을 하라는 말이잖아요. 괘씸하지만 이 길을 잘 모르는 사람인가 싶어 제가 후진을 해요. 그런데 제가 후진해서 들어간 그 마당으로 휙 지나서 들어가는 거 있죠. 이 길을 모르는 사람이 아닌 거예요. 괜히 비켜준 것 같은 마음이 굴뚝같아요.


"자기가 잠깐 비키면 될 것을 나한테 후진을 시키고 그래."


혼잣말로 중얼거려요. 운전하기 전에는 몰랐는데, 운전을 하니 혼잣말이 더 느는 것 같아요.


"엄마. 우리 태권도장에서 어떤 형아가 다른 형아한테 물을 뿌렸거든요. 그래서 그 형아도 다시 물을 뿌렸더니 사범님 말씀이 같이 물을 끼얹으면 똑같은 사람이래요."


그 순간 제 입에서 튀어나온 혼잣말을 후회했어요. 아이가 듣고 있었구나.


"그래? 겸아, 근데 왜 갑자기 그런 말이 생각이 났어?"

"그냥요. 갑자기 관장님 생각이 나서요."


정말 그냥 생각난 일화를 이야기한 걸까요. 엄마는 부끄러워집니다.



조금 더 가 커피를 사서 한 모금 마시는데 남편 생각이 나네요. 남편이 딱 좋아할 맛이라서요. 문득 남편에게 커피를 가져다주고 싶어 져요. 그래서 남편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전화를 했지요. 조금 바쁘긴 한데 통화할 여유는 있다고 하네요. 그럼 됐어요. 잠시 나와서 커피를 받아갈 수는 있는 것 같아요.


백로가 있는 풍경을 보며 커피 마시는 기분이란.


남편의 회사로 달려가요. 그 사이 아이는 잠이 들었고요.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요.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돼?"

"응. 뭔데?"

"잠깐만 나와줄 수 있어? 5분이면 돼."

"여기 왔어?"

"응."


통화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시 전화를 걸었으며, 갑자기 나오라니 남편은 아마 긴장했을 거예요. 조금 기다리니 남편의 모습이 보여요. 아! 남편의 회사에는 가끔 출근 때 데려다주거나 퇴근 때 데리러 와서 잘 알아요. 제 덕분에 남편은 뚜벅이고요. 긴장된 표정의 남편이 차 옆으로 다가오네요. 창문을 내리고 커피를 내밀어요.


"이거 주려고 온 거야?"


남편의 긴장된 얼굴이 풀어지면서 헤실헤실 웃네요. 서프라이즈에 성공한 것 같아요. 아이스커피 한 잔에 말이에요. 남편도 주섬주섬 주머니에 챙겨 온 먹거리를 내놓네요.


"이제 얼른 가봐."


남편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바쁘다고 했으니 오래 잡아둘 수가 없잖아요. 5분 약속은 지켜야지요. 별것도 아닌데 괜스레 제 기분마저 좋아집니다. 남편도 그럴 거예요.



근처 바닷가에 주차를 해요. 오늘 이쪽 바다가 꽤 예쁘더라고요. 푸른 바다와 빨간 등대가 아주 멋지게 어우러졌어요. 구름도 멋스럽고요.



갑작스럽지만 제주에서 돌아가면 꼭 하고 싶은 것이 있어요. 바로 드로잉을 배우는 일이에요. 이 풍경을 보고 그림으로 옮기고 싶은데 재주가 없어서 너무 한탄스럽거든요. 그림으로 그리면 어떻게 그려질지도 머릿속에 떠오르는데 제 손은 전혀 이것을 표현하지 못해요. 이 근사한 풍경을 그림으로 담아내면 영원히 기억 속에 담아질 것 같아요. 


바다를 보고 있다 보니 금세 하늘이 붉어지고 있어요. 사이드미러 뒤로 비치는 마을 풍경도 너무 근사하고요. 이것도 그림으로 담으면 너무 멋질 것 같지 않나요. 또다시 예술혼이 불타오르는데 표현할 길이 없네요. 하아.




남편을 데리러 가요. 아이는 그제야 잠이 깼고요. 오늘은 아이가 미역국을 끓여 달래요. 앞전에 말씀드렸지만, 미역국은 제가 끓이기 어려워하는 국 중에 하나예요. 레시피대로 끓여도 밍밍한 맛이라 자신이 없어요.


"난 이상하게 미역국은 자신이 없더라."


남편에게 바통을 넘긴다는 의미예요. 그때 남편 대신 아이가 대답을 하네요.


"엄마.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 잘할 수 있어요."


남편이 박장대소를 합니다. 그러게 말이야. 엄마는 시도도 안 해보고 말이야. 이러니 제 아들이 스승이 될 수밖에요. 가끔 이렇게 엄마 아빠 입을 틀어막을 소리를 하니 어른이라도 꼼짝 못 하겠어요. 몸집이 작다고 생각까지 작은 건 아니라는 것을 오늘도 깨달아요.


일전에 어떤 할머니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어요. 아이에게 유산을 물려주려고 하지 말고 그 여윳돈으로 여행을 데리고 다니라고요. 여행으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이 꼭 기억에 남지 않아도 아이의 몸속 어딘가에 스며들어 아이의 감성과 품성을 길러주었다는 것을 아이의 말과 행동에서 닫게 되는 순간이 참 많아요.


작지만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소우주.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 우리 세 사람에게도 예외가 아니네요.


오늘 여러분의 스승은 누구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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