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의 기술
소울 일기 |2023.1.29
최악의 숙소에서 엄마가 깨워서 일어나 7시쯤 짐을 들고 밖으로 나가 기차를 기다렸다. 이제 곧 방콕에 도착할 거다. 창문 밖을 보는데 먼지가 많이 들어왔지만 괜찮다. 멋지기만 하면 되지. 기차가 오래돼서 은하철도 999를 타는 느낌이었다. 쿨럭쿨럭 기차에 내려서 그랩을 잡고 새 숙소로 향했다. 나이스타이밍이었는지 바로 체크인을 했다. 그리고 짱짱 베리 굿한 숙소에서 쉬었다. 이 숙소가 좋은 이유는 그냥 좋아서 일 수 도 있지만 전에 숙소가 너무 별로라서 그런 거 같기도 하다. 그리고 쉬다가 룸피니 파크에 갔다. 엄마가 우릴 치밀하게 속여서(?) 오케스트라를 보고 나는 공을 찼다. 그리고 큰 백화점에 들러서 일본 음식을 먹었다. 맛있고 깔끔했다. 집에 돌아와 예배드리고 잤다. 꽤 얼렁뚱땅한 하루였다. 끝.
“내가 내일 방콕을 가야 하는데 여기서 기차로 갈 수 있니?”
“응! 콰이 브리지에서 타면 돼! 아침 7:00시, 오후 2:00시 두 번 운행해.”
굳이 아침 기차를 탈 이유라면 이번 숙소에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아서이고, 이 숙소가 콰이강의 다리에서 가깝기 때문이었다. 칸차나부리를 올 땐 미니버스로 왔으니 다시 방콕으로 갈 땐 운치 있는 기차를 이용해보고 싶기도 했다. 아이들도 한시라도 빨리 호텔을 빠져나가고 싶었는지 내 의견에 흔쾌히 따라주었다. 이로써 이번 여행에서는 비행기, 배, 버스, 툭툭, 기차를 전부 경험해 보게 되었다.
6시 알람소리에 깨어 짐을 싸고 아이들을 깨워 6시 30분에 미련 없이 숙소를 나섰다. 해뜨기 전 거리는 핑크빛이었다. 이른 아침 여행을 떠나는 자만이 볼 수 있는 도시의 풍경이었다. 7시 12분경, 죽음의 철로를 지나콰이강 다리를 건너오는 낡은 기차를 타고 방콕으로 향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과 먼지를 마주하며 3시간을 달리면 방콕에 도착한다. 기차표는 딸깍딸깍거리며 다가오는 승무원에게 사면된다. 외국인은 무조건 100밧이라고 들었는데 둘째는 어려서 공짜인 건지 세 명인데 200밧을 내라고 했다. 왜 200밧인지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 기차 안에는 사진가의 감성을 부추기는 장면들이 연출되고 있었다. 나는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며 눈 알을 굴릴 뿐 쉽게 셔터를 누를 수 없었다. '예전의 나였다면 어땠을까?' 예전의 나는 기회를 노리다 결정적 순간이다 싶으면 셔터를 누르곤 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혹은 뷰파인더 너머의 대상에 대한 존중인지 무어라 단정할 수 없지만 지금의 나는 예전의 나와는 다른 내가 되어 있었다. 창밖 풍경을 감상하고 사람들을 관찰하고 딴생각을 하다 보니 금세 방콕에 도착했다.
이번 태국 여행은 일정을 미리 촘촘하게 계획한 게 아니라 어딜 갈지, 뭘 먹을지 등 여행정보는 주로 전날 혹은 전전날 태사랑 카페에서 검색을 했다. 칸차나부리를 가기 전 룸피니 공원을 검색했을 때 <로열 방콕 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회가 우리가 칸차나부리에서 돌아오는 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숙소에 체크인하고 쉬었다가 저녁 무렵에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2007년에 방콕에 왔을 때 내가 룸피니 공원에서 우연히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듣고 좋았던 것처럼 아이들에게도 같은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었다. 내 계획대로라면 가능했다.
아침 기차를 탄 덕분에 일찍 방콕에 도착했고 운 좋게 얼리체크인이 가능해서 아이들이 깔끔한 호텔에서 쉴 수 있었다. 방에서 뒹굴거리는 것이 지루해질 즈음 루프탑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고, 일단 배를 채워야 협조가 잘되니 아이들이 좋아하는 간식으로 사발면을 먹였다. 아이들의 기분이 좋아 보이는 틈을 타서 룸피니 공원에 가서 코모도왕도마뱀도 보고 공도 차자고 넌지시 말했다. 계획대로 아이들은 흔쾌히 따라나섰다. 공에 바람도 빵빵하게 채워 넣었다.
오후의 룸피니 공원은 운동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첫째 아이는 생각했던 것과 달리 시끌벅적한 공원 분위기에 툴툴거렸다. 눈치 없이 내 발걸음은 들썩들썩 신이 났다.
“우아! 오늘 오케스트라 연주회가 있나 봐~” 사진을 찍으며 연주회 하는 곳으로 자연스럽게 걸어갔다.
"이게 아닌데... 엄마 혹시 여기서 연주회 하는 거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지?? 알면서 공 차러 오자고 한 거였지?” 아이는 집요하게 질문했다.
“으~응?? 공도 차고 연주회도 듣고~ 너무 좋다! 그치?!” 나는 아이들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하며 준비한 돗자리를 펼쳤다. 아이들의 표정은 그야말로 '어이없음'이었다. '엄마의 계획에 우리가 말렸구나.' 그러나 엄마의 계획을 알아차려도 별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들은 원하던 대로 공을 차고, 나는 로열 방콕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회를 즐겼다. 아이들도 힘들다며 내 곁으로 와 돗자리에 함께 앉아 오케스트라 연주를 즐겼다. 야자나무 잎이 바람에 흔들거리고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오는 오후의 룸피니 공원은 여전히 좋은 기억으로 남게 되었다. 기회주의자 엄마가 발휘한 우연의 기술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