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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Nov 24. 2021

사각 어묵탕과 맛있는 것 사이


“저녁에 뭐 먹을래?”

큰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학원 가기 직전에 매일 묻는다. 

“맛있는 거.”

그때마다 돌아오는 한결같은 답이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무슨 숙제가 생긴 것처럼 마음이 복잡해진다. 아이와 내가 생각하는 ‘맛있다’라는 기준이 다른 탓이다. 이를테면 나는 겨울 무와 묵은지가 들어간 청국장이면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만찬이다. 이것을 준비했다면 아이는 한껏 부푼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기대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경험을 할 것이다. 

     

매일 저녁 메뉴를 정할 즈음에 누구를 기준으로 할 것인지 망설인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를 놓고 보면 사흘은 아이에게 이틀은 내 마음에 끌리는 것으로 밥상을 차린다.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을 맞춘, 몸에 좋은 음식을 준비하고 싶지만 실패할 때가 대부분이다. 겨울밤은 더 깊고 어둡다. 가로등이 길을 비추지만 어두컴컴한 저녁에 무거운 가방을 메고 집으로 돌아오는 아이가 안쓰러워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다. 이렇게까지 공부를 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머물다 곧 사라지곤 한다. 그래서 가능한 아이의 기분을 좋게 하는 것들로 상을 차리고 싶다.     


날이 추워져 빨리 집으로 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지는 겨울이면 언제나 뜨거운 국물이 중심을 이루는 음식들이 떠오른다. 아이도 나와 비슷한 생각이었을까? 저녁에는 어묵탕을 먹고 싶다 했다. 종종 이맘때면 식탁에 오르는 단골 메뉴다. 여유가 있을 때는 긴 꼬치에 꽂아서 제법 그럴싸한 모습으로 준비한다.   

아이는 이것에 반기를 든다. 어묵을 칼로 자르는 순간 제맛을 잃어버린다고 했다. 야생의 느낌이 살짝 감도는 통 어묵 여덟 개를 멸치육수에 빠트렸다. 여기에 청양고추 하나를 썰어 넣으면 얼큰하면서도 적당히 매운 국물이 만들어진다. 부드러운 맛을 위해 떡볶이 떡 몇 개를 더했다. 아이가 식탁에 앉아 국물을 한 숟가락 뜨고는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무심하다가도 아이의 눈빛과 숟가락을 드는 속도에 따라 내 마음 깊은 곳이 살짝 요동친다.  

“엄마, 진짜 맛있다. 통 어묵이 내 입안에 한가득 들어오면 풍미가 퍼지면서 추웠던 속을 순간에 데워주는 느낌이 좋아.”

아이는 순식간에 밥그릇을 비우고 다시 밥솥으로 향한다. 묻지 않아도 마음에 들었다는 확실한 증거다.  

    

식탁에서 이루어지는 맛에 대한 평가에 종종 예민해진다. ‘전업주부’라는 타이틀 때문일까? 직장인들이 상사에게 내민 결재서류가 깔끔히 통과되길 바라는 마음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부엌에서 하는 많은 활동을 따라가 보면 내 일이라는 큰 범위 안에 놓여 있다. 이것들을 어떻게 풀어나갈지는 내가 살아가는 방식과 닮았다. 밥을 해서 가족들과 함께 먹는 것도 그랬다. 아이 마음에 감탄을 유발할 만큼의 음식을 준비하는 일이 회사에서 유능한 직원으로 인정받기를 바라는 것과 비슷한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하지만 그것과 어느 한쪽은 연결된 감정인 건 분명한 것 같다. 


마트를 다녀오면서 생각했다. 겨울에 국물 요리를 먹는 일은 계절과의 대화라는 것. 찬 바람에 얼음장처럼 굳어진 손과 하루 동안 힘들게 했던 무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잠깐의 여유를 전하는 한 그릇이다. 맛있다는 건 혀끝으로 느껴지는 게 아니라 바로 내 앞에 놓인 김이 피어나는 음식을 만들어낸 이의 정성을 잠깐 떠올리고, 감사의 인사를 건네는 과정이었으면 좋겠다. 비록 그 맛이 예상에서 벗어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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