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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Dec 05. 2021

나 홀로 김장


12월 첫 토요일로 김장날을 정했다. 겨울이 돌아오면 마트에는 절임 배추 예약을 안내하는 광고지가 붙어 있다. 동네 마트 몇 곳 중에서 한 곳을 정하려는데 친한 언니가 오빠가 농사지은 배추로 절인 것을 사라고 권했다. 이왕이면 아는 이의 것이면 믿을 수 있기에 흔쾌히 답하고 나니 절로 김장 날은 정해졌다. 언니네가 김장하는 날이 내가 김치를 담그는 날이 되었다. 동네를 오가다 보면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수레를 끌고 동네 노점과 마트를 오가며 부지런히 김장 준비를 한다. 평소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빨간색 뚜껑이 돋보이는 젓갈이 등장하면 김장철이 되었다는 증거다. 갓이며 미나리, 굴과 쪽파, 청각 등 김장에 들어가는 여러 채소가 가득한 게 이 시기에 시장 풍경이다.      

내게 김장은 누구의 의견이나 눈치를 볼 일 없는 그야말로 알아서 할 일이다. 집에 있는 것들에 조금만 더해진 간단 김장이다. 금요일 오전까지 마쳐야 하는 원고 교정일을 정리하고 나서야 본격적인 김장준비에 돌입했다.  마늘은 며칠 전에 집에 있는 봄 마늘 껍질을 까 두었기에 육수 만드는 일이 우선이었다. 황태 머리와 국물 멸치, 양파, 무를 가득 넣고 진하게 끓여 두었다. 여기에 김치 맛을 시원하게 만드는 청각과 갓 나물을 씻고는 적당한 크기로 썰었다. 양념에 들어가는 재료들을 믹서기로 갈 차례다. 예전에는 절구통에 놓고 마늘을 찢거나 강판에 갈기도 했는데 팔목이 너무 아프다. 얼마 전부터는 맛이 별로 일지라도 편한 걸 택하기로 했다. 무와 사과 양파, 마늘, 생강을 넣고 두세 차례 갈았다. 큰 그릇에 가득 담겼다.      


이 그릇에 태양초 고춧가루를 넣고 육수와 멸치액젓, 새우젓, 매실청을 넣어서 휘휘 잘 저었다. 양손에 큰 주걱을 들고 재료가 고루 어울리도록 했다. 배추 열세 포기 분량이다. 작년과 비교하면 양념이 많다 느껴졌지만, 그냥 두기로 했다. 남은 게 있으면 통에 두었다가 김치 담글 때 두고두고 쓸 수 있어 편리하다. 절인 배추를 받아 들고 물이 잘 빠지도록 한 편에 가위로 비닐을 잘라 두었다. 밤새 조용히 물이 자연스럽게 흘러나가면 적당한 수분을 머금은 배추를 만날 것이다.

    

종일 이리저리 움직인 탓에 한밤이 되니 피로가 밀려왔다. 소파에 앉아 쉬고 있는데 배추를 전해주고 간 언니의 전화다.

“김장 준비는 잘했어? 우리 올케는 찹쌀죽을 쒀서 갈지 않고 그냥 놓더라고. 그러면 김치 양념이 잘 배어서 좋다던데. 해봐요.”

“준비는 대충 했어요. 찹쌀 죽은 생략 하려고 했는데 그럼 한번 해볼까요?”

통화가 끝나자 다지 몸을 일으켜 세웠다. 순간 망설였지만 일 년을 먹을 것인데 조금이라도 뭔가 맛있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냄비에 찹쌀을 담갔다가 죽을 만들어 두었다. 아침에 김치를 만들기 직전에 양념에 넣어 다시 섞으면 될듯했다.      

남편은 휴일임에도 행사가 있어 일찍부터 출근했다. 남편이 엘리베이터에 오르자마자 현관문을 닫고 들어온 8시부터 김장 모드다. 거실에 언제 썼는지도 모르는 매트를 깔고 배추와 양념통을 들고 왔다. 김치통도 옆에 나란히 줄 세워놓았다. 김장이 끝날 때까지 고생해야 하는 손을 위해 하얀 면장갑에 다시 분홍 고무장갑을 끼었다. 양념을 한 움큼 잡아 노란 속살이 보이는 투명한 배춧잎에 고루 바른다. 어떻게 해야 한다고 정식으로 배우지도 않았다. 아주 오래전에 엄마가 하는 것을 보고 눈으로 익혔다. 하다 보면 배추에 빨간 양념이 들어가고 흰 곳이 보이면 다시 그곳에 덧칠하듯이 양념을 더 해준다. 큰아이는 기말고사 준비로 방에서 꼼짝 않고 작은 아이는 혼자 논다.      


처음부터 당연하다 여긴 나 혼자 김장이었다. 한두 포기를 버무리고 속을 하나 뜯어서 입에 넣었다. 달큼하면서도 양념이 그런대로 괜찮다. 다시 한 포기를 버무리면서 배춧잎 맛을 보았다. 여전히 좀 전에 느꼈던 맛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 정도면 올해 김장도 중간 이상은 될듯했다. 다른 일에는 그리 빠르지 않지만, 음식을 만드는 일에는 정반대다. 벌써 큰 통에 김치가 가득했다. 두 번째 통에 김치가 놓인다. 가로로 네 쪽을 넣으면 한 줄이 완성되었고 이제 통이 가득하려면 열두 쪽이 필요하다. 조금씩 팔이 찌릿찌릿 저려오는 느낌이다. 처음 가졌던 마음에 딴생각이 끼어든다. 정성을 들여서 해야겠다는 다짐 대신 빨리 끝내고 싶다. 예상과 달리 양념도 부족할 것 같다. 오랫동안 숙성시켜서 먹을 것이기에 양념은 적당히 바르기로 계획을 수정했다. 그래야 남은 배추를 다 버무릴 수 있을 것 같다.      


위기가 찾아왔다. 아무리 설렁설렁 양념을 묻혀도 배추 한 포기 정도 분량은 남았다. 양념을 다시 만들기에는 너무 힘이 들고 백김치로 해야겠다. 당장이라도 정리하고 싶은 마음과 양념 부족까지, 순항할 것 같던 김장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김치통 세 개를 어찌어찌 채웠다. 김장에 걸린 시간은 2시간 40분이었다. 마무리되었다는 것만으로도 후련했다. 갑자기 몸에 긴장이 풀렸는지 피곤이 몰려온다. 한 시간을 훌쩍 넘기는 시간 동안 침대에서 깊은 잠을 청했다. 깨어보니 하루의 절반이 다 지나고 오후 3시다. 내일로 미룰까 고민하다 하나씩 정리해갔다. 그릇들을 말끔히 씻어내니 어수선했던 주변이 제 모습을 드러내었다.     


김치냉장고도 오랜만에 대청소에 들어가 반짝반짝 빛났다. 하룻밤을 밖에서 지낸 김장김치가 내일이면 최소한 열 달 이상을 머물게 될 곳이다. 김장 이후, 부엌 주변이 재정비되는 기분이다. 김치가 들어갈 공간을 만든다는 목적의식은 덩달아 냉장고에 있는 반찬 통까지 살피게 했다. 식구들의 먹거리가 담겨있는 두 개의 냉장고가 깔끔해졌다. 따뜻한 물에 행주를 빨아서 닦고 정리하며, 김장하는 오늘이 새해를 준비하는 전환점이 라는 여겨졌다. 내 손으로 한 해 동안의 소중한 양식을 만드는 일은 그 자체로 큰일이었다. 사서 먹거나 엄마에게 부탁해도 되었지만, 이제 엄마도 나이가 들었기에 내가 하는 게 당연했다. 집에서 만들어서 포장하고 택배로 보내오는 일도 녹록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감귤 수확으로 정신없는 시기다.  

    

김장은 한편으로는 내게 삶의 독립을 의미하는 작은 행사였다. 회사에 다니던 시절에는 가까운 곳에 사는 이모가 김장을 해주었고, 엄마도 종종 보내왔다. 전업주부가 되었고 멀리 떨어진 이곳으로 이사 오면서는 자연스레 내일이 되었다. 처음에는 어떻게 할까 하고 고민도 많았지만 한두 해 하다 보니 내 방식이 만들어졌다. 김치 맛이 훌륭하지 않더라도 시간이 더해져 늦은 봄에 김치를 꺼낼 때면 혼자 감동할 정도로 썩 괜찮다. 김장은 새해를 준비하는 첫걸음 같다. 지금보다 다가올 시간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일이어서 아름답다.  

전원일기를 열심히 보면서 김치를 버무렸다. 문득 정겨운 대가족 풍경이 그립다. 그들이 모여서 하는 김장은 축제가 아닐까? 허리가 뻐근하고 감각이 무뎌진다. 누가 옆에서 조금만 도와줬으면 좋겠다 여기다가도 “혼자 하는 것도 마음 편해”라며 스스로를 달랬다. 김장을 마무리하고 주변을 정리했다. 부지런히 움직일수록 쳐져 있던 몸이 살아나 생기를 찾아갔다. 김장김치를 꺼내 먹을 때면 이것을 담그던 때의 상황이 종종 떠오른다. 어찌할 수 없어 고민하던 일들도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정리되어 제자리를 찾아간다. 설령 온전히  돌아올 수 없더라도 받아들여 살아가게 된다. 마지막 작은 통에 김치는 양념이 조금밖에 없어서 설렁설렁 버무렸는데 어떤 맛일지 걱정되다가도 될 만큼 되겠다 싶다. 김장이라는 단어 속에는 ‘지금 당장’이라는 다급함 대신 여유가 스며있고 기대가 머문다. 마음을 써서 만들지만, 나머지는 계절과 자연스러운 이치에 맡겨 버리는 것. 이게 김장의 멋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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