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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Feb 23. 2023

두 번째 오븐, 첫 빵

고마운 선물   

두 번째 오븐이 생겼다. 첫 오븐을 사고 십여 년이 흘렀다. 코스트코에서 샀던 드롱기 오븐은 정신없이 흘러가던 일상을 잡아주었다. 돌이 막 지난 아이를 돌보는 워킹맘으로 지내고 있을 무렵, 모두가 잠든 깊은 밤에 빵을 구웠다.     


파운드케이크 하나 정도가 적당한 작은 오븐이었다. 빵을 구웠던 그 순간은 빡빡한 하루의 휴식이었다. 몇 년 전 친구처럼 지내던 오븐은 고장 났고 새로이 살까 하고 고민하다 계속 망설이기만 했다. 때마침 에어프라이어 열풍이 불었고, 오븐 겸용으로 산 것이 있어 잊고 있었다. 그런데 친한 언니가 집에서 오븐을 사용하는 일이 없다며 준다고 했다. 갑자기 오븐이 생겼다. 기꺼이 감사한 마음으로 받기로 했다.  


집에서 치과 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현관 벨이 울린다. 택배가 왔다고 흘려보냈는데 조금 뒤에 휴대전화 진동 소리다.

 “샘 집에 있어요? 오븐 놓고 가요.”

이렇게 빨리 받게 될 줄 몰랐다. 언제나처럼 뒤로 미루거나 망설임 없이 바로 일을 처리하는 그의 성정이었다.      

황금색 보자기에 오븐이 싸져 있었다. 오븐은 다용도실 에어프라이어 옆에 자리를 잡았다. 어떤 빵을 구워야 할까? 설레었다. 우리 집에 온 사각의 검은색 오븐을 통해서 5년 정도 인연이 되어가는 그와의 관계도 돌아보았다.     

두 번째 오븐에서 구운 첫 빵 


생활 속에 함께 하는 도구에는 사용하는 이의 삶의 흔적이 묻었다. 오랫동안 이것을 통해 무언가를 만들었을 이의 성격도 그려볼 수 있다. 오븐 안을 살펴보니 사용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말끔했다. 혹시나 고장 났을지도 모른다며 전날 빵을 구워봤는데 잘 작동되었다고 전했다. 


보통의 나라면 그리 꼼꼼히 확인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대충 겉면에 묻은 먼지를 닦아내고 쓸 사람이 알아서 하겠지 하고 마무리했을 일이다.  항상 가슴으로 생각해 주는 그의 지극함 그대로다. 그의 손을 스쳤던 오븐에 정감이 어렸다. 

  

가끔 누군가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밥 한 끼로, 차 한잔으로 끝나기에는 아쉬울 때는 작은 것에 마음을 담는다. 대부분은 동네 빵집에서 작은 케이크나 빵을 사서 전한다. 가끔은 감동 주는 공간의 물건으로 대신할 때도 있다.  다른 이의 선물이 일상에서 함께 할 때 작지만 큰 관심과 배려, 따뜻함이 내게로 다가올 때의 특별함 때문이다. 사람마다 다를 테지만 세월이 흘러도 어느 날 받았던 물건들이 정신없거나 기분이 별로 일 때 그것들은 순간 위안을 준다. 오븐 역시 내게 그러할 것 같다.     


오븐이 온 다음 날 빵을 구웠다. 며칠 있다 하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빵 맛이 궁금해서 기다리기가 어려웠다. 아침을 먹고 나서 바로 반죽을 하고 한 시간 반 정도 발효를 한 다음 첫 빵을 기다렸다. 빵에 사과 조림과 카야잼, 계피 생강차를 조금 넣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빵을 만났다. 에어프라이어와는 달리 서서히 부풀어 오른 흔적이 머물러 예쁘다. 오후가 막 시작될 무렵에 오븐에서 꺼낸 빵은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 즈음에 사라졌다. 아이들이 오가며 조금씩 먹었고 나도 함께했다.    

  

이 오븐은 내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궁금하다. 가장 먼저 빵을 구울 때마다 잘 쓰고 내게 건네준 그가 떠오를 것이다. 내가 빵을 굽는다는 건 조금 다른 감정의 표현이다. 아이들의 간식을 위해서, 때로는 복잡한 머릿속에 그저 마음을 두고 싶은 게 말랑말랑한 밀가루 반죽일 수도 있다. 빵을 구울 때는 시간과 결과물에 집착하지 않고, 즐거움이 찾아온다. 그리 길지 않은 기다림 후에는 따뜻한 온기를 품은 빵을 꺼내며 조용한 평화와 행복을 느낀다.

  

오븐이 곁에 있어 그런지 아침부터 다른 이들의 빵 레시피 동영상에 눈이 간다. 밀가루와 거리를 두어야겠다고 여기면서도 빵은 만들고 싶다. 빵은 나를 종종 가볍지만 기운 나게 한다. 때로는 흔들리는 나를 붙잡아준다. 머리로 생각하기 이전에 몸이 먼저 먼저 알아채는 빵 굽기. 봄소식처럼 오븐이 내게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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