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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진미 Jun 08. 2023

그릭요거트와 천천히 가는 식탁

기다림으로 차린 아침

바로 먹을 수 있는 음식도 좋지만 기다림을 통해서 만나면 더 반갑다. 몇 시간 아니 하룻밤을 보내고 나면 처음보다 훨씬 줄어든 그것을 만난다.

    

고등학교 시절 한 친구가 집에서 요구르트를 만들어 먹는다고 했다.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었기에 궁금증과 동시에 건강에 좋겠다는 잠깐의 생각이 스쳤다.      


어른이 되어 보니 요구르트 만들기는 간단했다. 우유에 시판 요구르트 음료를 넣어 얼마간의 시간을 보내면 가능했다. 몇 년 전에 홈쇼핑에서 요구르트 메이커를 샀다.    

 

따뜻한 물을 붓고는 통에 우유와 유산균 음료를 넣고 열 시간 이상을 보내면 완성되었다. 어느 날 문득 먹어야겠다고 마음먹으면 며칠간 요구르트와 친해진다. 그러다 다시 얼마가 지나면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지금처럼 여름이 다가올 무렵이면 이상하게 다시 찾게 되었다. 

    

아이가 그릭요거트가 먹고 싶다고 했다. 요구르트에서 유청을 분리해 낸 꾸덕꾸덕한 것을 말한다. 만드는 법은 요구르트를 만들고 나서 다시 시간을 두어야 한다는 것.    

 

베 보자기에 요구르트를 넣은 다음 잘 동여매었다. 빈 페트병에 물을 담고 요구르트의 유청이 잘 나오도록 눌러주었다. 냉장고에서 하룻밤을 자게 두었다. 다음 날 아침이 되니 제법 잘 만들어졌다.     

그릭토마토와 빵, 치즈가 있는 아이의 아침 

별로 한 것이 없는데 이렇게 다른 모습을 만나면 신기하다. 하얀덩어리인 그것을 사각의 유리그릇에 담았다. 800밀리 우유를 넣었는데 완성된 그릭요거트는 그릇에 절반 정도인 조금뿐이다.


아이가 토마토를 잘게 다진 다음 설탕을 조금 넣고 그릭토마토를 만들었다. 그것을 전날 내가 만들어놓은 빵에 발라 먹었다.      


아이의 아침 식사는 한 접시에 차려졌다. 그릭요거트와 빵 한 조각, 생치즈, 구운 소시지, 빵을 찍어 먹을 발사믹과 올리브유가 전부다. 가벼워 보이지만 서로 잘 어울렸다.


아이의 아침은 반찬을 늘어놓지 않아도 되었다. 접시 하나에 담긴 음식은 나름 진수성찬이었다. 그릇 위에 올려진 것들 대부분은 뚝딱 몇 분 만에 만들기 어려운 것이었다.      


내가 두 시간을 훌쩍 넘겨 만든 폭신한 못난이 빵. 제주의 어느 목장 우유로 만든 치즈, 여기에 어제 하루의 절반 이상을 보내고 나온 그릭요거트까지 시간이 만든 음식이었다.     


이런 식탁은 천천히 간다. 김치와 나물과 찌개를 떠먹으며 부지런히 움직이는 보통의 아침과는 다르다. 열심히 숟가락과 젓가락을 가져가지 않아도 되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음식의 출발처럼 기다려야 했으니 천천히 먹게 된 걸까?     

  

어느 때보다 편안하게 아침을 먹던 아이에게도 전하고 싶다. 

‘기다려야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으니 천천히 가렴. 가다 보면 뭔가 보이겠지. 급하다고 아직 익지도 않은 열매를 먹을 수 없는 것처럼. 내가 원하는 요거트도 그렇게 무심히 지켜보니 만들어졌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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