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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도리작가 Apr 05. 2021

우등생 아빠

엄마 수행 평가

애들 아빠는 평생 우등생이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 대학원까지 계속 우등생이었다.

전교에서 늘 1-2등이었다는 소리다. 심지어 고등학교 모의고사 때 전교에서 7위를 한적도 있단다.

공부 좀 해본 사람들도 한두 번 굴곡을 겪는데 어쩜 그렇게 지치지 않고 우등생이었을까?

시부모님은 절대 극성스러운 분들이 아니다.

극성스러운 게 다 뭔가? 반대로 먹고 사느라 바쁘신 분들이었다.

그런데 남편이 스스로 열심히 해서 평생 우등생 자리를 놓치지 않았으니 부모님들은 참 좋으셨겠다.


남편은 대한민국에서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S대 공대에 입학해 -90년대 초 S대 공대는 최고의 인재들이 가는 곳이었다. -  박사학위를 따고 30세에 S전자 과장으로 입사한다. 사업부에서 이런저런 최연소 타이틀을 따고 40대 초중반 임원이 되었다.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한 번도 휴식다운 휴식 없이 지금까지 달려온 셈이다.


이렇게 말하면 독자들이 남편에 대해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남편은 여유롭고 까다롭지 않고 아이들과 관계도 좋다.

그래서 꼭두새벽에 나가 밤늦게 들어오는 남편이 더 짠하다.



늘 아이들에게 허허실실 하는 남편도 딸이 중학생이 되면서 공부에 신경 쓰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원격수업으로 딸이 노트북을 밤늦게까지 끼고 살자 앞으론 수업시간이 아닐 때는 노트북을 엄마에게 맡기라고 했다.

딸도 스스로 심각하게 생각했던 걸까? 아니면 누군가 약간 강제해주길 바랐던 걸까?

아무튼 딸은 그렇게 하기로 했다.


더한 것도 있다. 딸은 중학교 입학하면서 하루 1시간 10분만 사용하겠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전화기를 스마트폰으로 바꿀 수 있었다. 어플을 깔 때는 사전에 연동해 놓은 아빠 폰으로 승인을 받아야 한단다.

정말 대단한 기술이고 대단한 모녀다.


남편은 반도체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 반도체가 온갖 핸드폰에 들어간단다.

그런데 스마트폰에 대해서는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그래도 딸은 참 착하다. 남편은 복 받았다.

남편은 12시에 들어와도 딸이 어려운 문제를 물어보면 친절하게 가르쳐준다.

밤늦게 함께 공부하면서 웃음소리가 들린다.

좋은 아빠다. 딸은 복 받았다.


남편은 가끔 '공부 잘해야 한다.'는 말을 한다. 무심히 말하지만 그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물론 그러니 애들 공부에 더 신경 쓰라는 뜻은 아니다. 아이들이 열심히 해야 한다는 말이다.

남편은 공부를 잘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떤 삶을 보장하는지 안다.



이렇게 쓰니 꼭 남편이 기계처럼 느껴진다.

아니다. 남편도 사람이다.

남편도 갈등하는 순간들이 있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우리 집은 평일에 TV를 켜지 않는데 육아에 지친 어느 날 무심코 TV를 켰더니 EBS에서 한국기행을 하고 있었다. '부제 시골 로망스(5부작)'

공기 좋고 물 맑은 시골에서 유기농 식재료로 음식 해 먹고 바다에서 전복, 미역을 따며 행복해하는 사람들.

스스로 집을 짓고 산이 내 운동장이요 바다가 내 놀이터인 사람들.

귀농한 사람들이었다. 도시에서는 어찌 살았는지 TV 속 그들은 다들 행복해 보였다.

그날 웬일로 일찍 퇴근한 남편이 집에 들어서며 TV를 본다. 씻지도 않고 선 채로 한참을 본다.

그날 밤 모두 잠든 시각 남편은 핸드폰으로 시골 로망스를 몇 편이나 보는 눈치였다.


늘 여유로 무장하고 스스로를 직원들에게 영감을 불어넣는 모차르트 형 리더라고 자평했으나 정작 직원들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무조건 밀어붙이는 칭기즈칸 형 리더로 평가했다며 씁쓸해했다.

남편은 지금 잘 살고 있는가? 평생 우등생이었던 남편은 지금 행복할까?

그런 남편도 배운 게 그것뿐이라 아이들에게 공부를 강조할 수밖에 없다.

다른 방법은 잘 모른다. 우리와는 다른 세상을 살아갈 아이들에게 우리의 한정된 경험을 바탕으로 공부를 강조하는 것이 맞는 걸까?

특별하지 못할 바에야 남들과 비슷하게 가는 게 맞는지도 모른다.

이왕 가는 거 남들보다 잘 가면 더 좋을 것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공부를 잘하면 좋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네가 지금의 자리에서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거다. 나중에 후회가 남지 않도록.

네가 지금 미친 듯이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엄마는 너를 지지하겠지만 마땅히 그런 게 없다면 일단 학생으로서 해야 할 일을 열심히 하면서 길을 찾는 거다.


아이가 공부를 잘하면 참 좋겠다. 자랑스럽고 대견하겠다.

아이가 공부에 관심이 없다면 뭐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럼 엄마와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며 공부 말고 다른 길이 어떤 게 있을지 고민해보자.

라고 다짐하지만


솔직히 나는 아이들이 공부를 잘했으면 좋겠다.

나에게 큰 고민 하나는 덜 수 있기 때문이다.

너 또한 큰 고민 하나를 덜 수 있다. 그리고 너희 삶에 선택의 폭을 넓힐 수 있다.

남편은 언젠가 진짜 시골 로망스를 떠날지도 모른다.

지금 나는 그저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다. 공부에서 완전히 어긋난 길로 가지 않기를 바라며 조심스럽게 보고 있다.

지금 나에겐 이것이 모범답안이다.


오늘도 카페는 엄마들의 공부이야기로 한창이다.

학교 이야기, 시험 이야기, 어느 집 딸 이야기, 어느 집 아들 이야기.

누구나 아이들을 사랑하기는 매한가지일 텐데 우리 모두 잘하고 있는지.

우리 모두 잘하고 있는 것이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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