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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o Hwang Aug 08. 2022

시지프스

카뮈와 앤드류 버드

 한동안 앤드류 버드(Andrew Bird)의 시지프스란 곡에 꽂혀서 출퇴근 곡으로 들었다. T의 카톡 프로필 음악들을 듣다가 알게된 음악이다. 얼마 전까지도 열심히 했던 비디오게임 <하데스>에서 스테이지 중간에 시지프스를 만나면 게임에 도움이 되는 아이템을 주곤 했다. 카뮈의 시지프 신화 해석을 따온 것인지 게임에서 만난 시지프스는 항상 웃고있었다. 돌 굴리다가 농땡이를 좀 부리는 것 같았지만.. 게임은 하데스를 10번 죽이면 진짜 엔딩을 볼 수 있다고 해서, 정말 시지프스처럼 계속 하데스를 죽이고 또 죽였다.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처음 읽었던 건 대학교 철학수업 시간이었던 것 같다. 생이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다면 자살이 아닌 살아가기를 선택해야한다니. 무엇보다 허구헌날 바위를 굴리는 시지프스가 행복하다니. 여타 스무살들처럼 그 책에 매료됐다. 그 때부터 난 시지프스같이 무의미한 일들에 사랑을 쏟는 존재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래서 졸업작품으로 투명한 앵무새를 쫓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사실 원래 주인공은 벰파이어였다. 난 평소에 불멸자는 지혜롭지 않고 멍청할지 모른다 생각했다.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영원히 20대처럼 어리석게 살지 않을까? 필멸자는 다가오는 끝을 의식하며 어쩔 수 없이 지혜로워지는게 아닐까? 카드빚에 허덕이며 투명한 앵무새를 쫓는 영원히 어리석은 벰파이어 주인공을 만들었다. 졸업작품을 만들다 갑자기 취업을 하게 된 탓에 벰파이어 이야기는 빼게 되었지만. 삶에 어떤 의미가 있다거나, 무언가 쓸모가 있다는 믿음은 언제나 무의미한 것과 쓸모없는 것의 존재를 상정한다. 내가 뭔갈 진정 안다고 생각했을 때 항상 그 끝엔 불가해하고 부조리한 지점이 있었던 탓에, 무의미해 보이는 것에 마음껏 애정을 쏟았다. 난 영원히 살 것처럼 어리석게 20대를 보냈다.


 더이상 어리석지 못하는 서른세살, T의 집 용산에서 판교로 출근길 지하철을 탔다. 여의도 급행선에서 심심해져서 앤드류 버드의 시지프스 뮤직비디오나 한 번 볼까 싶었다. 뮤비는 저예산이었는지 화질도 구리고 촌스러웠다. 그래도 딱 첫 장면은 근사했는데, 노래 첫 소절과 잘 어울렸던 탓이다.

‘시지프스는 안개 속을 들여다 보았네 바위가 절벽에서 굴러 떨어지기 전 그 잠깐의 침묵 속에서’

(Sisyphus peered into the mist / A stone's throw from the precipice, paused)

앤드류 버드가 구슬프게 이 구절을 부르자 안개 낀 산의 모습이 나왔다. 카뮈가 그랬듯, 앤드류 버드도 바위가 떨어지기 직전의 그 순간에 사로잡혔나보다. 일상이 끝나고 잠시 숨고르기를 하는 순간 부조리는 찾아온다. 스무살이 훌쩍 지난 서른살에도. 퇴근하고 돌아온 집 현관에서, 혹은 밀린 설거지를 끝내고 창밖을 볼 때 이 모든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가끔 생각한다.


 T의 꼬드김에 처음 T 집으로 간 날 와인 두 병을 비웠는데, T는 술을 다 마시자마자 테이블 위의 물자국을 닦고 병을 버리고 설거지를 했다(사실 그 때 반쯤 넘어갔던 것 같다). 사귀고 나서도 자주 집을 놀러갔지만 T의 집은 항상 깔끔한 상태였다. 집안일을 잘 하는 사람은 멋있다. 건강한 정신과 육체를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사귀고 난 어느 일요일 아침, 끝내주게 늦잠을 자고 가위바위보에서 진 내가 먼저 씻기로 했다. 씻고 나오니 T는 이불보를 개고 집안일을 하고 있었다. 과연 시지프스보다 무서운 사람이군.. 스피커에서 노래가 나오고 있었는데, 막귀인 내가 들어도 소리가 끝내줘서 깜짝 놀랐다.


“아니 이 스피커 뭐야..? 소리 왜 이렇게 좋아?”


“비싼거야. 전애인이랑 같이 살던 집에서 들고나왔어”


앤드류 버드를 틀까 하다가, T의 플레이리스트가 퍽 맘에 들어서 그대로 두었다. 설거지를 끝내고 의자에 앉아 잠시 쉬고 있는데 T가 테라스에 나가서 화장실 창문쪽으로 와달라 소리쳤다. 샤워기 헤드좀 받아서 테라스로 넘겨달라고. 화장실에 걸려있던 엄청 기다란 샤워호스가 식물 물 주려고 있었던 거구만. 길이가 무슨 옆집 불을 끄러 갈 수 있을 정도로 길어서 저게 뭔가 했다. T는 식물들 물시중을 들고, 테라스 바닥을 쓸고나서야 비로소 휴식을 취했다. 선풍기 앞에 쪼그리고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꽤나 행복해보이는 표정이군.


 T는 안개 낀 산에서 매일 식물을 관찰하고, 물을 주고, 바로바로 설거지를 하고 쓰레기를 버리고, 집안일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잠시 숨고르기를 할 땐 항상 저 해사한 웃음을 짓는다. 같이 지내다보면 나도 내 집과 하루하루를 더 좋아하는 법을 배우는 것 같다. T가 도와준 덕분에 저번 주말 벽선반을 달았다. 아마도 3년을 미뤄온 커튼도 이번엔 달 수 있을 것 같은 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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