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와 앤드류 버드
한동안 앤드류 버드(Andrew Bird)의 시지프스란 곡에 꽂혀서 출퇴근 곡으로 들었다. T의 카톡 프로필 음악들을 듣다가 알게된 음악이다. 얼마 전까지도 열심히 했던 비디오게임 <하데스>에서 스테이지 중간에 시지프스를 만나면 게임에 도움이 되는 아이템을 주곤 했다. 카뮈의 시지프 신화 해석을 따온 것인지 게임에서 만난 시지프스는 항상 웃고있었다. 돌 굴리다가 농땡이를 좀 부리는 것 같았지만.. 게임은 하데스를 10번 죽이면 진짜 엔딩을 볼 수 있다고 해서, 정말 시지프스처럼 계속 하데스를 죽이고 또 죽였다.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처음 읽었던 건 대학교 철학수업 시간이었던 것 같다. 생이 무의미하다는 걸 깨달았다면 자살이 아닌 살아가기를 선택해야한다니. 무엇보다 허구헌날 바위를 굴리는 시지프스가 행복하다니. 여타 스무살들처럼 그 책에 매료됐다. 그 때부터 난 시지프스같이 무의미한 일들에 사랑을 쏟는 존재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래서 졸업작품으로 투명한 앵무새를 쫓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사실 원래 주인공은 벰파이어였다. 난 평소에 불멸자는 지혜롭지 않고 멍청할지 모른다 생각했다.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영원히 20대처럼 어리석게 살지 않을까? 필멸자는 다가오는 끝을 의식하며 어쩔 수 없이 지혜로워지는게 아닐까? 카드빚에 허덕이며 투명한 앵무새를 쫓는 영원히 어리석은 벰파이어 주인공을 만들었다. 졸업작품을 만들다 갑자기 취업을 하게 된 탓에 벰파이어 이야기는 빼게 되었지만. 삶에 어떤 의미가 있다거나, 무언가 쓸모가 있다는 믿음은 언제나 무의미한 것과 쓸모없는 것의 존재를 상정한다. 내가 뭔갈 진정 안다고 생각했을 때 항상 그 끝엔 불가해하고 부조리한 지점이 있었던 탓에, 무의미해 보이는 것에 마음껏 애정을 쏟았다. 난 영원히 살 것처럼 어리석게 20대를 보냈다.
더이상 어리석지 못하는 서른세살, T의 집 용산에서 판교로 출근길 지하철을 탔다. 여의도 급행선에서 심심해져서 앤드류 버드의 시지프스 뮤직비디오나 한 번 볼까 싶었다. 뮤비는 저예산이었는지 화질도 구리고 촌스러웠다. 그래도 딱 첫 장면은 근사했는데, 노래 첫 소절과 잘 어울렸던 탓이다.
‘시지프스는 안개 속을 들여다 보았네 바위가 절벽에서 굴러 떨어지기 전 그 잠깐의 침묵 속에서’
(Sisyphus peered into the mist / A stone's throw from the precipice, paused)
앤드류 버드가 구슬프게 이 구절을 부르자 안개 낀 산의 모습이 나왔다. 카뮈가 그랬듯, 앤드류 버드도 바위가 떨어지기 직전의 그 순간에 사로잡혔나보다. 일상이 끝나고 잠시 숨고르기를 하는 순간 부조리는 찾아온다. 스무살이 훌쩍 지난 서른살에도. 퇴근하고 돌아온 집 현관에서, 혹은 밀린 설거지를 끝내고 창밖을 볼 때 이 모든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가끔 생각한다.
T의 꼬드김에 처음 T 집으로 간 날 와인 두 병을 비웠는데, T는 술을 다 마시자마자 테이블 위의 물자국을 닦고 병을 버리고 설거지를 했다(사실 그 때 반쯤 넘어갔던 것 같다). 사귀고 나서도 자주 집을 놀러갔지만 T의 집은 항상 깔끔한 상태였다. 집안일을 잘 하는 사람은 멋있다. 건강한 정신과 육체를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사귀고 난 어느 일요일 아침, 끝내주게 늦잠을 자고 가위바위보에서 진 내가 먼저 씻기로 했다. 씻고 나오니 T는 이불보를 개고 집안일을 하고 있었다. 과연 시지프스보다 무서운 사람이군.. 스피커에서 노래가 나오고 있었는데, 막귀인 내가 들어도 소리가 끝내줘서 깜짝 놀랐다.
“아니 이 스피커 뭐야..? 소리 왜 이렇게 좋아?”
“비싼거야. 전애인이랑 같이 살던 집에서 들고나왔어”
앤드류 버드를 틀까 하다가, T의 플레이리스트가 퍽 맘에 들어서 그대로 두었다. 설거지를 끝내고 의자에 앉아 잠시 쉬고 있는데 T가 테라스에 나가서 화장실 창문쪽으로 와달라 소리쳤다. 샤워기 헤드좀 받아서 테라스로 넘겨달라고. 화장실에 걸려있던 엄청 기다란 샤워호스가 식물 물 주려고 있었던 거구만. 길이가 무슨 옆집 불을 끄러 갈 수 있을 정도로 길어서 저게 뭔가 했다. T는 식물들 물시중을 들고, 테라스 바닥을 쓸고나서야 비로소 휴식을 취했다. 선풍기 앞에 쪼그리고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꽤나 행복해보이는 표정이군.
T는 안개 낀 산에서 매일 식물을 관찰하고, 물을 주고, 바로바로 설거지를 하고 쓰레기를 버리고, 집안일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잠시 숨고르기를 할 땐 항상 저 해사한 웃음을 짓는다. 같이 지내다보면 나도 내 집과 하루하루를 더 좋아하는 법을 배우는 것 같다. T가 도와준 덕분에 저번 주말 벽선반을 달았다. 아마도 3년을 미뤄온 커튼도 이번엔 달 수 있을 것 같은 예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