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역시 타이밍
회사 해외 오피스가 여러개 생기면서 자기소개를 적어야 했는데, 미루고 미루다 결국 마감일인 오늘 부랴부랴 쓰기 시작했다. 웹툰과 만화를 서비스하는 곳이라 첫 질문부터 좋아하는 만화 명대사를 적으라고.. 최근엔 만화를 잘 안봐서 급하게 적으려니 바로 떠오르는게 없었다. 회사에 마스터 키튼 애장판이 있어서 요즘 그걸 읽는 중이긴 하지만 딱히 명대사랄 것도 없었고.. 그러다 H2가 떠올라 좋았던 대사를 한 줄 적었다. 웃긴건 난 H2를 아직 끝까지 보지 못했다는 점인데 그래도 좋아하는 대사긴 하니까..ㅋㅋ 만화방을 갈때마다 H2를 봤었는데, 한동안 만화방을 못갔더니 결국 애매한 상태가 됐다. 주구장창 야구만 하는 만화인지라 사실 어디까지 읽었는지 기억도 안나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할 판이다.
부산에서 20살까지 살았던 탓에 야구는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다. 내 고등학교는 야구부로 되게 유명한 학교였는데, 영화 <퍼펙트게임>에서 조진웅씨 역할 실제 모델이 우리학교 출신 선수라고 원태가 알려줬다. 그래서인지 큰 야구장도 있었고 우리반엔 고1까지 야구부를 하다가 공부하려 그만둔 친구도 있어 체육시간에 야구를 종종 했다. 물론 난 야구 룰을 정확히는 잘 몰랐지만(살면서 구기종목 좋아하는 게이는 아직 못봤다) 원태가 이것저것 알려준 덕에 얼추 흉내는 냈다. 우린 문과가 한 반 뿐이었던지라 2년 내내 같은 멤버로 그렇게 얼추 야구를 했다.
인생을 통틀어 딱 한 번 내가 점수를 낸 적이 있었는데, 어느날 어찌어찌 3루 주자까지 온 상황에서 내가 타자로 섰다. 난 비장하게 배트를 들고 타석에 섰다. 때마침 바람이 꽤 불었는데, 원태가 꽉 쥔 내 배트를 보더니 “황정호 배트 바람에 흔들리는데..?” 라며 처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중요한 시점에 내가 타자라서 다들 좌절하였고 원태가 제발 병살만 내지 말라고 달려와서는 귀에다 대고 배트를 휘두르지 말고 살짝 공에 갖다 대라 그랬다.
살아오며 운동을 배우면서 정말 힘들었던게 3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농구의 ‘왼손은 거들뿐’, 둘째는 수영의 ‘물과 한몸이 돼라’ 그리고 마지막이 야구의 ‘끝까지 공을 보고 쳐라’였다. 아니 공을 보는데 내 베트가 어딨는지 어떻게 알고 치라는건지. 나름 리듬게임은 깊게 파고들어서 동체시력은 발달했는데 이건 동체시력의 문제가 아닌것 같은데..? 어쨌든 내가 번트를 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지만 침을 꼴깍 삼키고 도전했다. 간절함이 통한건지 바람이 나를 도운건지 번트는 성공했고, 난 죽을힘을 다해서 도망치다가 결국 잡혔다. 원태가 “황정호 승점냈다!!” 라고 소리쳐서야 3루가 홈으로 들어간걸 알았다. 내 야구인생(?)에서 유일하게 빛났던 순간이 아닌가..
친구들은 체육시간엔 야구를 하고 야자시간엔 야구를 봤다. 물론 난 야구엔 관심이 없었지만. 우리가 고3이었던 2008년엔 무슨 바람이 분건지 롯데가 야구를 엄청 잘했다고 한다. 한 번은 조용하던 야자시간에 친구들이 동시에 비명을 지른 적이 있었는데 롯데가 8년만에 가을야구를 한다나 뭐라나. 갑자기 야구를 잘한 롯데 탓에 친구들은 결국 대부분 사이좋게 재수를 했다. 난 야구도 안봤는데 재수를 했다. 대체 왜! 항상 실전에 강했던지라 수능도 잘 볼줄 알았더니.
대학교를 가면서부터는 야구를 한 적이 없지만 과 소모임중에 야구모임이 있었던게 기억난다. 야구팀 이름이 <앞날 고미네즈>라는 이름이어서 기억이 날 수밖에.. 과가 과다보니 다들 열심히 앞날을 고민했던 것 같지만 적어도 ‘앞날 고미네즈’ 팀원들은 고민없이 열심히 야구를 했던 느낌.
1학년 학기 초 고미네즈의 신입부원을 모집하던 당시, 노래방에서 맨날 델리스파이스의 고백을 불렀더니 같은 과 여자애가 그 곡이 H2라는 만화의 대사들이라고 알려줬다. 벌스는 남자애의 고백, 후렴구는 여자애의 고백이라고. 그제서야 지킬과 하이드같았던 노래의 가사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어쨌든 그걸 알고나니 노래가 더 좋아졌는데, 노래 탓인지 앞날 고미네즈를 한 번 해볼까 싶기도 했다. 같은 과 잘생긴 형이 야구팀을 하고 있었기도 했고.. 하지만 역시 게이에게 구기종목은 독약과 같은 것이었기에 깔끔하게 포기했다. 들어갔다면 하루카 역할을 했으려나.
난 고민 끝에 영화제작부에 들어갔지만 영화는 안찍고 술만 늘었다. 그만두고 문학동아리에 들어간건 순전히 우연히 코알라와 친해진 탓이다. 그 때도 타이밍 좋게 바람이 불었을지도. 앞날을 열심히 고민했던 친구들은 경영학과 복수전공을 하거나 인턴을 열심히 했던 것 같다. 해질녘 즘 운동장을 지나가면 고미네즈는 열심히 야구연습을 하고 있었다. 난 운동장 근처 동아리방에 들어가 열심히 글을 썼다.
주절주절 말이 길었지만 결국 회사 자기소개에 쓴 만화 대사는 이거였다.
“승부를 피한 것도, 억지로 참은 것도 아니야. 다만 내 사춘기가 일년 반 늦었어. 그 뿐이야”
고백의 첫 소절과 맥을 같이 하는 이 대사가 참 좋았다. 살면서 일도 사랑도 결국엔 타이밍의 문제라 느낀 탓이다. 그 때 바람이 불지 않았다면 내 인생 유일한 야구 승점은 없었을지도 모르고, 2008년 롯데가 가을야구를 하지 않았다면 내 친구들은 재수를 안했을지도. 나 혼자 재수 했다면 좀 쓸쓸했을테니 그건 좀 다행인가..? 우연히 들어간 문학동아리에서 낯뜨거운 글도 쓰고, 취업을 하고선 연애도 열심히 했다. 글도 사랑도 스윙은 열심히 했는데 타율이 좋았나 새삼 떠올려 본다. 뭐 누구의 잘못도 아닌, 우리가 이상한 때에 만났겠거니. 올 여름 선선한 바람이 불어 스윙을 했더니 기가 막히게 공이 높이 떠올랐다. 지금은 숨을 가다듬고 열심히 달려나갈 타이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