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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스런 Oct 16. 2019

놀이 대신 설거지를 택하는 아빠

아이와 노는 게 귀찮은 부모에게 드리는 꽤 괜찮은 제안

“가위, 바위, 보!” 신랑과 가위바위보를 한다. 주먹을 낸 남편은 히죽 웃는다. 이기고 당당히 설거지를 자청한다. 진 나는 웃으며 아이와의 놀이를 시작한다. 크크크. 나는 내심 쾌재를 부른다. 아이랑 놀면 설거지도 면하고 재밌고 편하게 쉴 수 있다. 이 얼마나 생색나고 힘 안 들고 괜찮은 일인지. 그런데 신랑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부모는 아이와 놀아주는 걸 힘들어한다. 그들은 아이들과 부산하게 노느니 차라리 설거지를 선택하고 만다. 아이들 저지레를 봐가며 이래저래 시중드느니 맘 편하게 청소기를 돌린다. 그렇다. 그렇게 아이들은 놀이에 목이 말라 있고 부모는 놀이에 질색한다. 왜? 왜 그렇게 아이와 놀아주는 게 힘들까? 왜 어른들은 ‘놀자’는 소리만 들어도 귀찮은가? 왜 놀기도 전에 벌써 지치는 기분일까?
아이랑 노는 걸 너무 버겁게 생각해서 그렇다. 쉽게 말해 오해하고 있다. 하기 전부터 두려움이 크다. 그러니 밀어내고 싶은 마음이다. 해보지 않은 것에 대해 느끼는 근거 없는 부정적 기운이 일단 한몫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가자. 세상일이 대부분 그러하듯 아이와 노는 것도 하다 보면 별거 아니다. ‘아, 아, 죄송합니다.’ 무턱대고 쉽다고 주장할 수는 없는 일이고, 꼭 들려주고 싶은 말은 이거다. 당신이 생각한 것보다 아이와 노는 것이 재미있고 쉽다는 사실이다. 확실히 설거지보다 낫다. 이렇게만 해보라. 그럼 당신도 다음번엔 설거지보다는 아이 놀이를 택하게 될지 모른다.


의심 없이 받아들일 사실 하나가 있다.  ‘집은 실내 놀이터다.’라는 생각으로 살자.
우리 집은 거실을 중심으로 대부분의 공간이 놀이를 위한 곳이다. 놀이방에 모든 놀잇감을 몰아넣고 “여기서만 놀아라!”해도 소용이 없다. 엄마 있는 곳으로 기어코 이것저것을 끌고 와 논다, 아이는. 그래서 안방이든 거실이든 집 곳곳이 아이 놀이 공간이라는 감안을 하고 살자. 아이 크는 몇 년간, 친구 초대는 없다. 친구를 초대할 수가 없다. 집 이곳저곳이 다 놀이터로 변질되어 초대를 작정하고 일주일을 치워도 모자란다. 그러니 어린아이와 함께 사는 초기 몇 년은 그냥 딱 그렇게 아이와 살자. 괜찮다. 친구 안 떠난다. 서로의 사정 알음알음 알아주며 여유 있을 때까지 나를 기다려 줄 것이다. ‘아이가 언제 크나?’ 더디 크는 듯 보이고 내 세월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즈음이 되니 아이가 벌써 여섯 살이더라. 어느새 동생 손 씻는 것을 챙기고 엄마 자는 틈에 동생과 사부작사부작 놀고 있더라. 그렇게 긴 세월이 호록록 흐른다, 아이와 놀다 보면.
물론, 이 부분은 상당히 조심스럽기도 하다. 함께 사는 배우자와 어느 정도 합의를 보고 진행해야 한다. 내 남편은 워낙 깔끔하고 어지러운 것은 그때그때 돌아서서 정리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나를 만나 이렇게 살고 있다. 집안이 놀잇감으로 초토화된 그런 세월을 무던히도 견뎌줬다. 그런데 무턱대고 한쪽의 의견만을 강하게 밀고 나가면 집안싸움 금방 난다. 어느 날, 시원한 맥주 한 캔씩을 앞에 두고 가볍고 진지한 부부 대화를 시도하라. “나는 여보를 사랑한다. 존경한다. 여보의 뜻을 존중하고 나도 여보의 희망에 부응하고 싶다. 그런데 아이가 어릴 적에는 풍족히 놀아보면 좋겠다. 집에서 내가 아이랑 행복한 시간, 많이 보낼 테니 몇 년만 이렇게 조금은 지저분하게 복잡하게 살아보자, 여보야!” 하면서 짠! 맥주캔을 부딪혀라. 뽀뽀도 좋다, 분위기도 살짝 괜찮은데...... 살면서 여러 날, 소소하게 다투겠지만 이렇게 충분히 의견을 전달하고 나면 어느새 내 육아 신념도 배우자가 이해해주는 날이 온다. 그렇게 가정이 만들어지고 부부는 돈독해지며 그 안에서 아이들은 쏙쏙 배춧속 마냥 찬찬히 자란다.


두 번째 제안은 조금 구체적으로 들어가 본다. 작게 시작하라. 거창하게 놀아주려는 생각을 버리면 된다. 버겁게 상상하면 시작하기도 전에 지레 거부감이 든다. 그래서 대부분 ‘놀아줘!’하는 아이 말이 부모에겐 무서운 것이다. 그저 아이가 하자는 대로 일단 해보면 된다. 종이접기를 하자고 하면 색종이를 잡으면 되고, 인형 놀이를 하자고 하면 대뜸 산책 흉내를 내는 거다. 블록 쌓기를 하자 하면 “오~ 이 성 멋지지?”호들갑을 살짝 부리면 된다. 그럼 그다음은 아이가 알아서 끌고 간다. 부모는 거기에 수저만 얹을 뿐, 뭘 더 하려고 하거나 미리 계획을 쫙쫙 잡아놓을 필요가 전혀 없다. 아이는 그런 걸 원하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는 때에 원하는 것을 기꺼이 함께 하기를 원하는 거다. 자기 자는 밤에 엄마가 열심히 플래시 카드를 만들어 영어 놀이를 준비해주는 걸 바라지 않는다. 화산 폭발  실험세트를 풀코스로 주문해두고 ‘이거 하고 저거 하고 요거 하는’ 지정된 놀이를 절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니 안심하고 그저 아이 옆에 앉아라. 책 한 번 읽어주고, 밥 떠먹는 흉내 한 번 내면 된다. 처음엔 마지못해 놀아주듯 앉았던 내가 아이 곁에서 같이 웃고 있을 것이다. 더 뭔가를 가져오고 더 흠뻑 빠져서 아이와 ‘놀고’ 있을 것이다. 장담한다. 쉽고 가벼운 마음으로 아이의 놀이 제안을 수락하면 된다. “응, 놀자!”하고 말이다. 이때, 웃음은 필수!


마지막으로, 아이와의 놀이가 귀찮은 것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제한’이 필요하다. 놀이 약속을 정하라. 놀이에도 엄연히 규약이 필요하다. 그래야 너도 살고 나도 산다. 아이도 적당히 타협할 줄 알고 부모도 지치지 않는다. 규정은 국가 간, 기업 간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 집에 사는 욕구 충만한 어린 녀석이 좀처럼 타협을 모르지 않는가! 그러니 아주 확실하게 약속을 박고 가야 한다. 이 놀이 협상가는 고집이 세고 원하는 것이 많고 가끔 우기고 어깃장을 놓기도 한다. 그래서 원만한 놀이 관계 유지를 위해 약속이 필요하다.
아이가 어릴 적엔 부모 마음속으로 몇 가지 한계를 정해두면 좋다. 너무 피곤한 날에는 살짝만 놀아주고 잔다던가 귀찮고 늘어지는 어떤 날은 대강 책 한 권 읽어주고 영상도 보여준다던가 나름 자신을 위한 아량을 베푸는 것을 잊지 말라. 아이에게만 전부 맞춰 ‘끝없는 놀이 상대’가 되기로 하는 것은 부모 자신을 스스로 착취하는 것이다. 불평등 조약에 가깝다. 그것은 좋은 부모가 되기 전에 짜증 많은 부모가 되기 가장 쉬운 루트다. 내가 그랬다. 그래서 지금은 어느 정도 아이와 내 삶의 균형, 타협점을 찾아가며 논다. 아이가 네 살 이후가 되면 설득하며 타당한 약속 거리를 정하기 쉬워진다. 그때는 아이랑 부담되지 않는 선에서 서로가 즐거울 수 있도록 놀이 약속을 몇 가지 정하면 된다. 우리 집엔 이런 약속이 있다. ‘놀이 준비물은 아이가 챙겨 온다.’ ‘놀이 정리 때, 엄마가 대부분을 치우고 아이는 한 가지 항목을 제자리에 갖다 둔다.’ ‘엄마가 피곤해서 더 이상 놀아주는 것은 못한다고 할 때, 더 놀자고 보채지 않는다.’ 그리고 난 가끔 너무 힘들면 남편 찬스를 쓴다. 물감 놀이를 실컷 하고도 더 뭔가를 하고자 하면 “서희야, 아빠랑 놀이터 가서 그네 한 판 어때?”하고 살짝 바통을 남편에게 넘기는 거다.


오래가려면 어렵지 않게 만들어야 한다. 아이랑 하루, 기가 막히게 놀아 주고 끝나는 거 아니지 않은가? 몇 년을 내리 놀아야 한다. 세상 모든 것이 신기하고 궁금하고 재미나는 아이이다. 어른도 마찬가지다. 외국 여행 가면 그곳의 언어, 그곳 사람들의 옷차림, 먹는 음식, 건물 외양 등 모든 것이 낯설고 궁금해진다. 딱 그 마음으로 아이들을 바라보자. 끝없는 놀이 욕구와 그것에 맞춰 사는 삶, 그건 아이에게 꼭 필요한 자연스러운 삶의 여정이다. 그 여행길이 짧지 않기에 되도록 짐은 가뿐하게 짊어지고 가자. 힘들면 쉬어서 샌드위치 한 입 먹고 가자. 지치면 여행 일정도 조금씩 틀어가자. 그래야 아이랑 행복한 유년의 하루하루를 쌓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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