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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스런 Oct 17. 2019

인내하는 마음으로 지켜온 놀이 육아, 권할까 말까?

일상놀이를 위협하는 3가지 방해물_자극, 일, 욕망을 견제하라.

    나는 가끔 생각한다. 특히 부부싸움을 하고 나서나 아이와 실랑이를 하는 날에는 특히나 더 그랬던 것 같다. ‘이 힘든 길을 굳이 왜 택했을까? 그저 힘들면 키즈 카페도 가고, 적당히 부부 시간도 갖고 아이가 막무가내로 짜증을 부리면 마이쭈도 사주고 그럼 될 것을...... 나는 왜 이토록 내 신념대로 밀어붙이는가? 정말 이 길이 옳을까?’


  사실, 지금에 와서야 아이와 놀고 몸을 부볐던 지난 시간이 값지지 그 세월 안에서는 곳곳마다 상처가 있었다. 아이들은 원체 노는 것을 좋아하고 원하는 것이 끝이 없다. 그래서 그것에 다 맞춰가며 놀고 생활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처음부터 내 능력 밖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좋은 유년을 선물하고 괜찮은 부모가 되고 싶다는 나의 완전 큰 착각이었을 거다. 그도 그럴 것이 놀이 육아, 상당히 좋긴 한데 방해물이 많다.


  녀석들이 사는 이 환경, 그게 참 문제다. 문만 열고 나가면 사 먹을 것, 사고 싶은 장난감, 유혹적인 물건과 경험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유치원만 가더라도 누구는 시크릿쥬쥬 가방을 멨고, 친구 누구는 생일 선물로 타요 중장비 놀이 세트를 받았다고 자랑을 한다. 그 안에서 죽자고 아이를 설득하고, 나를 설득하는 건 정말 해도 해도 힘겹다. ‘정말 내가 고집이 센 건가? 이런 세상에서 너무 터무니없게 희망적인 가설을 갖고 사는 건가? 내가 이렇게 아이 주변의 것들을 가려내고 좋다는 것들로 병풍을 쳐대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아니, 그보다, 이게 가능한 일이기는 할까?’ 어느 날은 강하게 확신이 들다가도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날도 태반이다. 아이들이 커가니 더더욱 그렇다.


  밥 먹기 전에 아이스크림과 빵을 사달라고 보채고 놀잇감 앞에서 떠나지 못한 채 허무한 표정을 짓고 서 있는 두 아이를 볼라치면 나는 이참에 모든 걸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적당히 하자, 적당히 하자.’라는 목소리가 내면에서 올라온다. 그래도 적당히 할 수 없었던 이유는 있다. 한 번, 그런 것들에게 양보하고 나면 내가 고수했던 자연스럽고 은은한 향의 놀이, 자연 먹거리, 감성 조각들은 야금야금 그들에게 정복당할 것임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살면서 균형과 절제, 조율이라는 덕목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해왔으면서도 이 일상 놀이만큼은 지독하리만큼 독불장군처럼 지켜온 이유이기도 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아이와의 일상 놀이를 지켜낼 수 있을까? 놀이가 어찌 보면 노는 활동, 딱 그것에만 머물지 않기 때문에 이번 글에서는 놀이 그 주변의 것들, 예컨대 음식이나 문화, 주변 환경들을 아울러 다루기로 한다. 첫째, 자극적이고 간편한 것과의 만남을 줄이면 좋다. 인스턴트와 식당 음식을 자주 먹는 아이는 무나물의 고소함을 알 리가 없다. 해초와 브로콜리의 신선함보다는 조미김과 감자튀김의 짜고 기름진 느낌을 즐기게 된다. 빠르게 진행되는 스펙터클한 영상을 자주 보는 아이는 그림책의 잔잔한 감성과 스토리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래서 먹는 것이든 보는 것이든 되도록 담백한 것들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화려한 캐릭터 상품이 즐비한 키즈 카페에 가서 아이 혼을 잔뜩 뺏지 말고 햇살 들어오는 거실에 앉아서 미역놀이를 하라. 블록을 쌓고 부수어라. 아이가 즉각적이고 감각적인 것에 부단히 노출되면 그것들에 익숙해진다. 더 이상 일상놀이는 없다. 그런 아이들에겐 함께 놀아주는 부모보다 최신형 완구와 휴대폰이 훨씬 구미 당기는 선물이 되고 만다. 그 길을 먼저 맛보게 하지 말자.


  둘째, 일을 과감히 줄여보자. 자기 계발서에 흠뻑 빠져드는 것을 조심하라. 자꾸 부모 꿈을 일렁이게 하는 책들은 의도적으로 줄여 읽고 아이와의 삶이 전부인 양 미련하게도 살아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런 삶을 몇 년간 살아낸 후에, 그러고 나서 타협하라. 한참 놀고 놀아주고 너무 힘들어지는 때가 온다. 나는 첫 아이 때는 그것을 거의 모르고 살았는데, 둘을 키워보니 그 한계가 오더라. 그래서 둘째 아이는 네 살이 되는 해에 바로 어린이집에 보내게 되었다. 내 선에서는 많이 인내해온 시점이었다. 이렇게 부모가 버텨내기 힘든 즈음이 오면 그때는 미련을 조금 접고 일도 조금씩 벌여보자. 회사도 나가보길 권한다. 대신 짧게는 3년, 길게는 6년 정도 일은 잊고 아이랑 시간을 충분히 보내 놓아라. 느리게 반복되는 아이와의 일상이 고되다. 맞다. 그런데 아이의 자람이 나를 키운다. 아이의 당찬 입매무새와 야무진 손끝, 따뜻한 말과 온정이 그 고됨에 조금의 위로를 얹는다.

  집안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일단 아이와 몇 년은 놀면서 살아보기로 작정했다면 살림과 청소는 되도록 몰아서 가끔 하면 좋다. 하루 종일 거의 노는 루틴으로 살아라. 놀고 놀고 또 놀고...... 치우고 음식하고 정리하고 단장하고 할 것 다 하고 아이와 놀기까지 하면 어떤 부모라도 지쳐 나가떨어진다. 놀이가 귀찮아질 수밖에 없다. 기존 가정일에 놀이까지 얹지 말고 해왔던 일들, 해야만 할 것 같은 일들을 되도록 줄여내 보라. 남편과 아내와 상의하여 서로 맡아낼 수 있는 일들을 정하고 줄일 일들은 과감히 지워내자. 횟수도 줄여보는 것이다. 그리고 과감히 놀이를 최상위 항목으로 옮겨라.

  나는 그리했고 후회 없다. 아이가 커가며 엄마에게 의지를 덜 하고 친구나 형제자매와 어울려 노는 시간, 혼자 노는 시간은 자연히 는다. 그때부터 집도 가꾸고 반찬도 한두 개씩 더하면 딱 좋다. 나 같은 경우는 아이 여섯 살이 되고 나니 서서히 여유가 찾아오더라. 이제는 간간이 반찬도 좀 하고 내 책도 읽고 낮잠도 잘 수 있게 되었다. 귀한 것은 참 더디게도 얻어진다. 그 맛이 꿀맛이긴 하지만.

  

  마지막으로 또 과한 제안을 해본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긴 하지만, 내가 해봐서 죽도록  힘든 것들은 절대 권하지 않으니 걱정은 마시라. 그런데, 해보니 꽤 괜찮았던 것들은 이 책을 읽는 당신의 눈치를 보지 않고 조금 강하게 주장해볼 생각이다. 준비됐는가? 욕망을 줄여라. 북카페 느낌의 서재, 물기 하나 없는 건식 화장실과 깔끔한 거실에 대한 환상은 애저녁에 포기하라. 그만한 가치가 있다. 길지 않다. 아까도 이야기했듯 아이 여섯 살 정도까지만 딱 미뤄두자. 내 인생에도 미니멀리즘이 온다. 당신도 미니멀리스트로 살 수 있다. 조급해 말고 조금만 더 아이와 치대면서 부벼대면서 조금은 복작복작 살아보자.


  아이 일곱 살만 되어도 뭔가 ‘조절’이라는 것이 가능해짐을 느낀다. 그쯤 되면 아이가 주변 정리도 슬슬 하기 시작하고 약속에 대한 책임감도 느끼게 되나 보다. 부모의 감정 상태와 가족, 자신이 처한 상태를 봐가면서 자신의 욕구를 조절하는 시기가 진짜 온다. 그때까지만 조금 힘겹게 참아보자. 아이가 어릴 때 아니면 언제 자신의 욕망대로 호기심대로 취향대로 살아보겠는가? 유치원에 가고 학교 생활을 시작하고 더 많은 관계망이 생기게 되면 저절로 아이는 함께 사는 법을 익히게 된다. 불가피하게 자신의 욕구를 줄여야 하는 상황은 점점 많아질 테고 상대와의 의견 조절 과정에서 타협도 알아갈 것이다. 그러니, 어릴 적에 내 품에 있을 때 가능하면 더 받아내 주자. 그러기 위해서 잠시 잠깐 부모의 욕망을 유보해두자는 거다. 특히, 깔끔한 집을 꾸리고 살겠다는 욕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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