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유망주의 꿈에서 벗어나
문학 합평 모임에 나갔다. 좋아하는 여자애가 같이 나가보자 던져본 말에 헤벌쭉 따라나간 게 화근이었다.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는 일이 이토록 지난한 과정이라는 걸 알았다면, 그런 선택은 하지 않았을 텐데. 뒤늦은 후회의 대가는 마감일이 떠오를 때마다 철렁 내려앉는 가슴과 졸고를 다듬을 때마다 짙어지는 한숨이었다. 고작 열 장 남짓한 글인데도 모든 문장과 문단이 유기적으로 연결돼야 한다는 점에서 그동안 써온 글과 달랐다. 그때그때 떠오르는 영감으로 글을 써온 내게 일관된 서사를 만들어내는 건 차원이 다른 도전이었다. 그 과정에서 배경은 구체적으로 묘사돼야 했고, 등장인물은 설득력 있게 제시돼야 했다. 단편소설을 완성하며 얻은 건 오로지 장편소설을 낸 작가들(특히 박경리 작가)을 향한 경외와 존경뿐이었다.
문학 합평 모임에는 지인을 통해 알음알음 모여든 열 명의 작가지망생이 있었고, 대부분은 문예창작과 학생들이었다. 이공계 학생은 내가 유일했고 이공계 학생이 문학 합평 모임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이례적이었다. 보통 독서나 작문과 관련된 이런 모임에서 이과생은 단조롭고 진부한 구성을 환기하는 존재로 환영받는다. 애초부터 기대가 낮기에 활동하는데 편하다는 장점이 있다. 합평은 주마다 두 명의 멤버가 습작을 제출하고 평가를 받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평가라 해서 뭐 대단한 걸 해주는 건 아니었다. 그냥 어떤 점이 좋았고, 무엇이 별로였는지 감상을 말하는 수준이었다. 간혹 기성 작가의 글과 비교하며 그럴듯한 비평을 해주는 이도 있었지만, 별 도움이 안 되는 게 더 많았다. 물론 내가 해주는 비평도 후자 중 하나였다.
나는 마지막 순번을 부여받았기에(깍두기의 특혜였다) 단편을 완성할 시간이 많았다. 그러나 인간이 하는 일이 늘 그렇듯, 한 주가 남았을 때에야 부랴부랴 글을 써내기 시작했다. 문장을 쓰는 일에는 큰 품이 들지 않았다. 오랜 시간 에세이를 끄적이며 닦아온 기본기였다. 문제는 이들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일이었다. 초고[김연수 작가는 이를 '토고(토 나오는 원고)'아 부른다]를 찬찬히 읽어보니, 서사를 진행하는데 하등 쓸모없는, 흐름을 방해하는 문장이 많았다. 모두 내치니 분량이 부족했다. 그렇게 살을 붙이고 도려내는 과정을 반복한 끝에 난잡한 소설이 탄생했다. 주변의 도움을 받아 몇 차례 퇴고를 더 한 뒤에야 그나마 읽을 만한 글이 됐다. 망한 습작을 올리고 합평 날을 기다렸다. 기대도 걱정도 되지 않았다. 나는 깍두기였으니까.
내 데뷔작이 될 단편소설은 예상 외로 호평을 받았다. '처음 쓴 건데' '하나도 안 배웠는데' 등의 전제들이 깔리긴 했지만, 유망주의 밤잠을 설치게 하기에 충분했다. 자랑을 좀 하자면, 매주 거침없는 혹평을 쏟아내던 K는 (아메리칸 아이돌의 사이먼이 떠오른다) "문창과가 아닌 사람이 문창과보다 소설을 잘 쓴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었는데 맞는 말 같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늘 혹평 일변도였던 L 역시 "(헤밍웨이 등) 미국 작가들의 단편이 떠올랐는데, 그만큼 문장이 좋았다는 뜻"이라며 추켜세웠다. 이 밖에도 다들 더 나은 글이 되기 위한 비평을 해줌과 동시에 따뜻한 응원의 말을 건넸다. 혹시 이게 신참을 대하는 암묵적인 관습은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예상과 달랐다.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두 달 간의 합평 일정이 마무리됐다. 그날은 밤잠을 설쳤다.
예전에 한 작가가 합평 모임을 "서로의 영혼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일"이라 평했다고 한다. 그만큼 글발을 제1의 자부심으로 여기는 작가들에게 혹평은 마음 아픈 일이다. 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일이며 아무에게서나 쉽게 받기 힘든 일이기도 하다. 당일엔 호평을 받아 기뻤지만, 막상 퇴고를 하려니 좀 더 박한 평가를 받았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내 글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죄책감을 씻기 위해 건넨 덕담은 아니었을까. 팍 기를 죽여놓으면 문학을 아예 포기할 테니 내린 대승적 결정이었을까. 둘 다 아니라면 내가 내놓은 단편소설이 문예창작과 습작생들로 하여금 반성을 하게 만드는 좋은 글이었다는 뜻이 된다. 물론 후자일 가능성은 희박했지만 어찌 기대가 안 될까. 알아볼 방법은 하나. 공모전에 내보기로 했다.
곧바로 유명 문학상이나 신춘문예에 도전할 정도로 사리에 어둡진 않았다. 학보사가 주최하는 작은 문학상에 도전해보기로 다짐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다짐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퇴고할 힘이 솟지 않았다.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유망주에서 벗어나 수직선의 한 지점에 놓이게 된다는 사실이 두려워 자꾸만 퇴고를 미뤘다. 주변에 소설가가 되겠다고 큰소리치고 다녔는데 막상 아무 소질이 없으면 어떡하지. 밤잠을 설치게 했던 멤버들의 평가가 걱정한 대로 허상이었으면 어떡하지. 글은 내 인생을 지탱하는 거대한 기둥이었다. 그 기둥이 흔들리는 일은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평생 도망칠 수도 없는 법이다. 내 손에 쥔 돌멩이가 평범한 돌인지 보석인지 감정을 해봐야 팔든 버리고 다른 돌을 집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제는 달콤한 유망주의 꿈에서 벗어나야 할 때다. 여러모로 바쁜 학기를 앞두고 있지만 다시금 건필을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