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게 어디 한두 개일까요
다섯 명을 태운 작은 차가 천천히 오르막 길을 달린다.
하늘에 떠 있는 동그란 태양은 넓게 펴진 얇은 구름에 가려져있고, 사이사이로 은은한 하늘빛이 비친다. 땅이 여기저기 솟아올라 있다. 꽤 높은 산이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산 밖에 보이질 않는다. 주변에 집 하나 없다. 심지어 가로등도 없이 모두 초록이다.
같은 초록의 범주에 들어가지만 색은 여러 가지다. 전나무 비슷한 나무는 진한 초록을, 나무가 아닌 곳은 연둣빛 혹은 탁한 초록 풀로 뒤덮여있다. 얼룩덜룩 색이 조화롭다.
이런 산을 참 오랜만에 본다.
캘리포니아에 살 때는 동네 산에 많이 다녔지만 이런 모양은 아니었다. 그곳의 산은 일 년 중 대부분 누런색 풀로 뒤덮여있었다. 건조해서다. 그래서 비가 오는 겨울에 그 사이사이에 연한 연둣빛이 돋아나곤 했다. 그러다 봄이 되면 그제야 초록색 들판이 되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았다. 비가 오는 기간은 짧고, 다시 마르니까. 나무도 물론 있었으나 누런색을 가릴 만큼은 아니었으므로.
게다가 50분 정도만 올라가면 정상을 볼 수 있는 낮은 산이었다. 근처에 더 높은 산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멀리서 보면 누런 빛을 띤 민둥산의 모습이었다. 황량하기 그지없는.
(물론 캘리포니아 답게 1-3시간만 가면 엄청나게 멋진 산들이 즐비했다)
그래도, 그때는 산이 있어서 좋았다.
휴스턴에 처음 왔을 때, 캘리포니아에서 왔다고 하면 다들 안쓰럽게 쳐다보며 한 마디씩 했다. 여기 갈 데가 없을 텐데.... 그랬다. 여기는 언덕조차 없다.
이제 휴스턴 생활 3년이 조금 넘었다. 처음에는 산이 없어서 조금 아쉬웠던 것도 같다. 하지만 이내 평지의 지형에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멀리서 치는 번개가 내 눈에 고스란히 담기는 게 신기하더니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고가 도로만 올라가도(휴스턴은 고가가 복잡한 편이고 꽤 높다) 이제는 너무 높다 싶어 어지럽다. 그래서 잊고 살았다. 까맣게. 완전히. 내가 좋아했던 것에 대해서.
'아.. 나는 이런 초록을 좋아했던 사람이었지...'
갑자기 코 끝이 찡 하다. 몹시 그리워했던 걸, 이제야 깨닫는다.
산 중턱에 차를 댄다. 코를 벌름거리며 한껏 공기를 들이마신다. 텍사스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초록빛 산을 눈에 꾹꾹 눌러 담는다. 그리고 다시 발길을 돌린다. 산 어딘가에 있는 료칸을 향해서.
산에 있는 료칸에서 2박 하는 동안 사실 한 건 별로 없다. 숙소 안에서 충분히 잘 놀고먹게 되어 있었으니까. 그래도 하루는 근처 하이킹 코스를 찾아 길을 나섰다. 자연을 좀 더 가까이서 보고 싶었다. 남편이 운전하는 차가 15분을 달린다. 가는 내내 고불고불한 길이다. 멀미는 나지만 눈은 즐겁다.
원래 가려던 하이킹 코스는 상태가 좋지 않았다. 운동화를 챙겨 오지 못한 탓에 나와 아들 둘 발에는 크록스가 있었는데, 그걸 신고 갈만한 길이 아니었다. 반대편 쪽에 산으로 쭉 뻗은 길이 보인다. 사람들 몇이 그쪽으로 향한다. 그래서 우리도 그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구름인지 안개인지 뿌연 공기 덕에 얼마나 높은지는 보이지 않았다. 위에는 대체 뭐가 있을지 궁금했다.
하지만 난 중도에 포기했다. 처음부터 네 명은 앞서 갔으나 나는 잘 걷지 못했다. 고산지대. 예전에 뉴멕시고 갔을 때도 고도 때문에 고생을 하더니, 이번에도 그랬다. 몇 걸음 걸으면 숨 쉬기가 어려워 멈춰야 했다. 원래 내 몸이 그런 건지, 평지에 살다 보니 이렇게 변한 건지 내 몸이 버텨주질 못했다.
(그래서 산에 있는 료칸에 있는 내내 아팠다)
산을 내려와서야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호텔이었다.
반은 군마 현, 반은 나가노 현. 순간 풋 웃음이 터졌다.
내가 사는 텍사스는 남한의 7배 면적이다. 미국의 50개 주 중에서 (알래스카를 제외하고) 가장 크다.
크기가 큰 만큼 다른 여러 주와 인접해 있다. 반은 멕시코와 바다, 나머지 반은 미국의 4개 주와 맞닿아 있는 모양새다. 뉴멕시코, 오클라호마, 아칸소, 루이지애나와.
그중 휴스턴은 오른쪽 아래에 붙어 있기에 루이지애나와 가장 가깝다. 휴스턴 시내에서 2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오클라호마나 아칸소 까지는 5시간, 뉴멕시코 까지는 9시간이 걸린다. 텍사스에 있는 유일한 국립공원인 빅밴드까지도 8시간이 넘게 걸린다.
참 크다. 가도 가도 텍사스라는 말들을 괜히 하는 게 아니다.
그래서 저 호텔을 보는데 풋 웃음이 났다. 일본이 한국보다 훨씬 크기는 하지만, 텍사스에 비해서는 많이 작으니까. 나라 하나가 텍사스보다 훨씬 작은데 그걸 또 현으로 쪼개 놓는다는 게 갑자기 생소하게 다가왔다.
사실 일본 여행 중 처음 느꼈던 게 아니다. 고속도로에서도 똑같이 느꼈다.
일본의 고속도로는 한국과 비슷하지만 먹거리가 더 다양했다. 특히 각 현 별로 특산품을 따로 진열해 놓고 있어 볼거리가 많았다. 그곳만 죽 둘러봐도 어느 현에서 뭐가 많이 나는지 알 수 있었다. '아, 여기는 녹차가 많이 나는 곳이군. 여기는 딸기구나. 오 이건 여기서만 나오는 빵이네? 와 사과로 별 걸 다 만들었네' 구경하는 내내 감탄했다. 텍사스보다 작은 땅에서 이렇게 다양한 특산품이 나온다는 게 신기했다.
텍사스에도 상징적인 휴게소가 있다. 버키스(Buc-ee's)라는 곳이다. 로고에 있는 귀여운 비버가 상징이다. 텍사스의 휴게소답게 주유구만 50개가 넘는다(아래 사진은 새로 생긴 곳으로 주유구가 120개라고 한다). 금액이 일반 주유소보다 조금 싸기에 낮에 가면 자리 찾기도 없을 정도다.
여기도 먹을 것들을 판다. 텍사스답게 브리스킷을 버거에 넣어 파는 게 유명하다. 얇게 찢거나, 크게 자른 형태로. 부들부들해서 씹기가 참 좋다.
육포나 몇 가지 간식도 유명하고, 텍사스 관련 기념품도 다양하게 판다. 냉장고 자석, 열쇠고리, 텍사스 지도 모양의 도마 등 종류가 어마어마하다. 버키스는 텍사스의 '자랑' 중 하나라, 버키스 비버가 그려진 티만 입고 돌아다녀도 꼭 한 두 명은 알은체를 한다.
일본 휴게소에는 인근 지역별 특산품을 팔지만, 텍사스 휴게소는 '텍사스' 것을 판다. 휴스턴, 달라스, 오스틴, 샌안토니오로 나뉘지 않는다. 이 큰 주가 하나로 움직이는 느낌이다. 하나의 주니까 당연하다 싶다가도 면적을 생각하면 어이가 없기도 하다.
이 큰 주에는 나무가 빼곡한 산도 없고(빅밴드 국립공원도 그런 산이 아니다), 아기자기함도 없다. 그냥 크다. 동네 쇼핑몰의 주차장은 축구장 8개만하다. 같은 빵도 텍사스 글자를 붙여 더 크게 나온다.
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건 일본에 더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맛있고, 아기자기하고, 자연의 냄새가 강하게 나는.
아쉬운 마음에 남편에게 말했다.
"저 산 하나만 휴스턴 근처에 옮겨 놓으면 참 좋을 텐데..."
말이 안 되지만, 산이 딱 하나만 있으면 참 좋겠다.
텍사스에는 없는 저런 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