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 소년의 사랑 이야기

내 추억은 33 RPM # 그 아이 편

by 김기린
냇가에 고무신 벗어 놓고
흐르는 냇물에 발 담그고
언제쯤 그 애가 징검다리를 건널까
가슴은 두근거렸죠...

'산골 소년의 사랑 이야기' 중 / 작사 예민


1982년!

그가 아주 어릴 적... 그러니까, 그가 아홉 살 때 이야기입니다.

그 아이가 살던 곳은 강원도 두메산골. 봄이면 진달래가 만발하여 동네를 감싸 안을 만큼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그 해 쌓였던 눈이 봄 햇살에 녹기 시작할 때, 아이는 엄마 손에 이끌려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자동차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마을을 떠날 때. 친구는 없었지만 냇가에 핀 버들강아지가 하늘거리며 인사해 주었고, 함께 뛰놀던 삽살개 백구 녀석만이 동구 밖까지 졸졸 따라 나와 배웅 해 주었습니다.


고개 너머 버스 정류장은 그동안 엄마를 마중 나갈 때 몇 번 와 보았지만, 이곳도 오늘이 마지막일 겁니다. 늘 한 장만 끊던 버스표를 한 장 더 끊고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을 때, 그 아이의 손엔 초록색 뚜껑이 선명한 요구르트가 쥐어져 있었습니다. 새로운 곳으로 향하는 설렘의 새콤달콤한 맛. 고향을 잊기엔 싸면서도 그만한 것이 없었을 테죠. 버스가 몇 개의 터널을 빠져나와 고속도로를 달릴 때, 아이를 옆자리에 앉힌 엄마는 무심히 차창 밖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습니다.


새로 이사 온 동네는 시골에서 아주 먼 도시. 사람도 많고 자동차도 많은 곳이었습니다. 낯선 말투와 높은 건물들 그리고 빠르게 거리를 내 달리는 자동차들. 그 아이는 모든 게 낯설었습니다. 그나마 반가운 것은 동네에서 조금 벗어 난 곳에 사람들이 ‘아파트’라 부르는 그곳의 놀이터였습니다. 그 놀이터에는 시골에서 십 리는 걸어, 학교 운동장에나 가야 탈 수 있었던 – 꽈배기 모양의 쇠줄에 나무 의자가 달린 – 멋진 그네가 두 개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놀이터에서 가장 인기 있던 그네엔 아이들이 항상 줄을 섰지만, 줄을 선다고 모두 다 탈 수는 없었습니다.

그 아이도 그네가 타고 싶었습니다.

놀이터 담벼락에 붙어 먼발치에서 지켜보았을 때, 언제나 하늘 높이 올라가는 그네가 가장 신나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쉽게 탈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안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아이가 같은 아파트에 안 산다는 걸 아이들은 쉽게 알아차렸던 겁니다. 어쩌다 기회가 와도 “야! 저리 가~”하며 그네를 빼앗기 일쑤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놀이터에는 ‘경비’라는 글자가 커다랗게 쓰여 있는 검은 모자를 눌러쓴 할아버지가 언제나 놀이터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곧장 그 경비 할아버지한테 달려가 일러바치기도 하였는데, 그럴 때마다 경비 할아버지는 항상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의 편을 들었습니다. 몇 번 할아버지의 눈을 피해 놀이터에 들어갔다가 걸려서 쫓겨난 이후로 그 아이는 그 경비 할아버지가 더 무서웠습니다. 마치 할아버지는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의 얼굴을 모두 알고 있는 듯하여 놀이터에 가기가 겁이 났던 것입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할아버지가 온종일 놀이터를 지키고 있는 것은 아니란 사실이었습니다. 아이들이 학교를 끝내고 돌아올 때면 언제나 놀이터에 있었지만, 점심시간과 하루 중 순찰을 나가야 하는 시간에는 놀이터에 안 온다는 걸 그 아이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 어느 때는 낮잠에 곯아떨어질 때도 있었고, 그런 때를 기다렸다가 놀이터에서 그네를 탈 수도 있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놀이터에 아이들이 없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어렵게 타게 되더라도 얼마 탈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경비 할아버지가 없는 틈을 타 놀이터에 갔을 때, 어떤 아이 혼자 그네를 타고 있는 모습이 그 아이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눈에 봐도 그네를 잘 못 타던 아이였습니다. 그넷줄도 너무 짧게 잡고, 그네에 앉아서는 그네가 앞뒤로 움직일 때 발도 같이 움직여 주어야 하는데, 두 발만 앙가조촘하게 있던 것입니다. 겨우 까치발을 들어 출발한 그네였지만 두 발이 가만히 있으니, 몇 번 움직이지 않고 그네는 이내 멈춰 서기를 반복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 아이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말을 건넸습니다.


“내가 밀어줄까?”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던 아이의 경계하던 눈빛도 잠시. 이내 하이얀 두 손으로 줄을 꼬옥 잡으며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그 아이가 몇 번 그네를 힘주어 밀어주기 시작하자, 그네는 앞으로 조금씩 조금씩 올라갔습니다. 한참 뒤 “까르르”하는 웃음소리가 놀이터에 울려 퍼졌고, 그 웃음소리에 그 아이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얼마 즈음 시간이 흐른 뒤에는 그네는 서서히 멈추어 섰고 그네에서 폴짝 뛰어내린 아이는 그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어서 타. 이제 네 차례야”


그 아이는 입가에 미소를 한가득 머금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얼른 그네에 올랐습니다.


“삐걱삐걱”


그네가 소리를 내며 앞뒤로 조금씩 움직였습니다.

그네가 뒤로 갈 때는 조금 무섭기는 하였지만, 앞으로 멀리 내달릴 때는 귀밑으로 바람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거 같았습니다.

그네가 가장 높이 올라갔을 땐, 담장 너머로 노랗게 피어있는 민들레들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날.

봄 햇살은 따스했고, 바람엔 꽃향기가 가득했습니다.



https://youtu.be/1rv-yGtmeS0


* 사진(합성): 예민 2집, 아세아레코드(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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