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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직일기] 재미난 일 하나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재미 없는 일 투성이인 회사에서 버티기

by 최호진

하기 싫은 일이 참 많습니다.


작년 말부터 정신이 없었습니다. 담당 임원이 바뀌는 바람에 해야 할 일이 몇 가지 있었거든요. 다행히 임원은 저희 부서 부장 출신이라 업무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디테일한 업무에 대해 보고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아는 사람이 더 무섭다고 했던가요? 일을 잘 아셔서 그런지 저희 부서가 기존에 작성한 경영 목표에 칼을 대기 시작하셨습니다. 더 많은 실적을 낼 수 있을 것 같다며 새로운 숫자를 만들어 오라 지시하셨습니다.


덕분에 연말부터 연초까지 소설을 쓰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물론 있을 법한 소설을 만드는 게 소설가의 임무인 것처럼 저희도 나올 법한 숫자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사업계획을 짤 때 낸 숫자도 무리한 것이었기에 새롭게 만드는 숫자는 있을 법하다고 하기에는 조금 가혹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우선 내리는 비부터 피하는 게 상책이었으니까요. 나중에는 무슨 수가 생기겠지라는 심정으로, 숫자를 만들어 제출했습니다. 어쩌면 올해 내내 매월 부진대책 보고서와 반성문을 써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찌됐든 이런 숫자를 만들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 숫자에 가기 위해 뭘 어떻게 하면 좋을 지 고민하게 됐으니까요



정신이 없었던 건 새로운 숫자를 만드는 일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외에도 몇 가지 귀찮은 일도 같이 해야만 했습니다. 법이 바뀌면서 고객들에게 받아야 할 서류도 바뀌고 처리해야 할 프로세스도 바뀌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것 저것 손을 보고 안내해야 하는 일들도 많았습니다. 정신없는 며칠이었죠. 덕분에 회사 내 제 일의 정체성도 흔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케팅을 담당한다고는 하지만 제가 하는 일 중 마케팅에 관한 일은 없어 보였습니다. 소를 키우는 일을 하기에 앞서 소 집을 고치고, 주변 환경을 정비하고 소를 몇 킬로그램까지 키울 지 고민하는 일(써 놓고 보니 잔인하네요) 이 우선이었던 거죠. 언제 소를 키울 수 있을까요?


가뭄에 단비같았던 회의


그 와중에 지난 금요일 재미난 회의를 하나 할 수 있었습니다. 광고 관련 회의였는데요. 저희가 진행하는 프로모션에 대해 어떻게 알릴 수 있을지 논의하는 자리였습니다. 광고팀 차장과, 광고 업체 담당자들과 화상 회의를 하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단순한 광고를 넘어 조금 더 크게 사업을 벌이는 것도 논의할 수 있었습니다.


말을 하는 걸 좋아해서였을까요? 간만에 생산적인 회의를 한 것 같아 즐거웠습니다. 어떻게 하면 광고를 보는 고객들을 유혹할 수 있을지, 고객에게 도움이 되는 프로모션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아이디어를 쥐어 짜냈습니다. 팀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또한 즐거웠습니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지만 준비하는 과정을 생각하니 설레었습니다. 덕분에 며칠간의 하기 싫은 일들이 조금은 희석될 수 있었습니다.

직장생활의 2막을 맞이하고 있는 저는 요즘 짜증나고 힘든 일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90%, 아니 99% 이상이 그런 류의 일일 수도 있습니다. 월급쟁이의 숙명이죠. 직장생활을 하면서 참고 견디는 게 최선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짜증나는 일을 하라고 월급을 주는 것일테니까요.


하지만 복직을 하고 나서 달리 보이는 게 있습니다. 물론 대다수의 일이 짜증나고 힘들겠지만 그 속에 즐겁고 설레는 일이 분명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찾아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기 싫은 일 속에서 진주를 캐듯이 하고 싶은 일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하는 보물찾기와도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티끌만한 사소한 것이라도 즐겁게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최근 저는 "도쿄R 부동산 이렇게 일합니다"를 읽고 있는데요. 책의 첫머리에 인용한 밥딜런이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성공한 사람이다."


이 말이 예전같았으면 참 씁쓸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직장에서 하고 싶은 일이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이 말이 저에게도 유효하다는 생각이 들어 위로가 됩니다. 하고 싶은 일만 한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경우는 없겠지만, 이 세상에는 그 어떤 누구도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보여지는 것 외에 하기 싫은 수많은 일을 하면서 버텨내고 있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비중이 아니라 그 속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내느냐 아니냐가 아닐까 싶습니다. 비록 그것이 티끌만한 사소한 것일지라도 말입니다.


같은 책에서 이런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하고 싶다'는 욕구에서 시작된다. 그래야만 한다. '하고 싶은 일'을 그려가며 열심히 일할 때, 웬일인지 함께하고 싶은 사람도 만나게 된다. 그러면 좋아하는 동료와 신뢰 관계 속에서 일할 수 있다. 또 일도 성장하고 동료도 늘어나는 긍정적 연쇄 작용이 조금씩 자연스레 일어난다. 동시에 우리가 하는 일이 사업으로서 온전하도록 전력을 다한다."
<'도쿄R 부동산 이렇게 일합니다' 중에서>


우리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 문구를 읽으며 느낄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인 삶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조직의 성과에도 기여하지만 그것 외에도 사람 사이의 관계에도 하고 싶은 일은 큰 역할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조직 속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내고 그것을 강조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에게 말이죠.


올해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면서


4년째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고 있는 저는, 첫해 그러니까 4년 전, 버킷리스트를 작성하고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직장생활에서 하고 싶은 일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 슬프게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복직을 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작성한 올해의 버킷리스트에서는 몇 가지 올해 하고 싶은 일을 그려볼 수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제가 하고 있는 일을 잘 만들어 회장님 앞에서 발표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4년 전에도 똑같은 항목이 있었지만 그 때는 발표 자체를 좋아하는 그래서 회사를 이용하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다면 올해 작성한 발표는 제가 하고 있는 일을 잘 만들어 내는 것에 방점이 있습니다. 하고 있는 일을 잘 만들어 좋은 사례로 발표를 해보고 싶습니다. 물론 어떻게 잘 만들 수 있을지는 하나씩 고민해 봐야겠지만 재밌게 그 일을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하기 싫은 일이 90%도 넘는 상황이지만 그런 것들을 하나씩 쳐 내면서 제가 하고 싶은 하나를 이루기 위해서 애써 볼 생각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스스로에게 위로가 되고 자극이 되는 것 같기도 하네요.


언제 회사를 그만둘 지는 알 수 없겠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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