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버

이윤설의 시 ‘오버’에 부쳐

by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 반대편으로 떠나기로 했다 오버

널 떠나기로 했다 오버

엔진이 툴툴거리는 비행기라도

불시착하는 곳이 너만 아니면 된다 오버

열대 야자수잎이 스치고 바나나 투성일 거다 오버

행복하자면 못할 것도 없다 오버

죽이 끓고 변죽이 울고 이랬다 저랬다 좀 닥치고 싶다 오버

원숭이 손을 잡고 머리 위 날아가는 새를 벗 삼아

이구아나처럼 엉금엉금이라도 갈 거다 오버

왜 그렇게 쥐었다 폈다 꼬깃꼬깃해지도록 사랑했을까 오버

사랑해서 주름이 돼버린 얼굴을 버리지 못했을까 오버

엔꼬다 오버

(중략)

내 손에 쥔 이 편지를 부치지 마라 오버

희망이 없어서 개운한 얼굴일 거다 오버

코도 안 골 거다 오버

눅눅해지는 늑골도 안녕이다 오버

미안해 말아라 오버

오버다 오버


이윤설, '오버' 중에서




이 시가 내게 오게 된 경위는 이렇다.


1. 박상수 시인이 자신의 두 번째 평론집에 이윤설의 시를 소개한다.

2. 이기호 소설가가 박상수의 평론집을 읽는다. 몰랐던 시인의 시를 발견한다. 좋다.

3. 소설가는 어느 라디오 방송에 초대 받는다. 자신의 최근 소설집 중에서 작가가 좋아하는 문장을 읽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자신의 소설 문장은 낭독할 만한 것이 없다며 이윤설 시인의 시를 낭독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그가 시를 읽는다.

4. 듣는다. 여러 단계를 거쳐 내게 닿은 시. 타인의 목소리로 듣는 시는 나의 눈으로 보는 시보다 상상력과 집중력을 배가시킨다. 눈으로만 볼 때엔 느끼지 못하는 시의 리듬이 몸 속으로 흘러 들어온다.


좋다. 감정을 오버하지 않고 오버,라는 감탄사를 끝까지 오버하는 이 시가 마음에 든다. 슬픔을 슬픔으로만 다루지 않는 방식이 좋다. 누구에게나 닥치는 이별과 상실의 시간을 누구나 창의적인 방식으로 변용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슬픔을 밝고 가볍게 터치하는 감각이 부럽다.


"불시착하는 곳이 너만 아니면 된다 오버"라니. 사랑을 잃은 이의 감정이 이보다 간결하게 표현될 수 있을까. 집착과 회한과 소진을 압축한 다음 세 줄도 압권이다.


왜 그렇게 쥐었다 폈다 꼬깃꼬깃해지도록 사랑했을까 오버

사랑해서 주름이 돼버린 얼굴을 버리지 못했을까 오버

엔꼬다 오버



몇 년 전 이윤설 시인의 시를 본 기억이 난다. 200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시 <나무 맛있게 먹는 풀코스법>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무심코 지나친 작가의 작품이 어느 날 문득 새로운 감각으로 다가오는 순간. 그 뜻밖의 시간이 좋다.


유머를 잃지 않기 어려워진 세상에서 유머를 잃지 않기 위해 애쓰는 일. 내공이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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