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섭 시 '눈이 내리고 있다'
0_영자신문을 보다가 안개꽃을 baby’s breath라고 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졸업과 입학 시즌이지만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수요가 급감하면서 꽃 재배 농부가 트랙터로 안개꽃을 갈아엎는 사진이 큼지막하게 실려 있었다.
1_안개꽃. 사전을 찾아보니 학명처럼 보이는 gypsophila, 우리말 그대로인 foggy flower라는 표현도 눈에 보인다. 안개+꽃,과 아기의+숨결,이라는 두 표현 사이의 거리가 생각보다 너무 멀다. 각각의 말이 풀어내는 이미지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온 것처럼 보인다. 안개+꽃. 뿌연 안개가 낀 듯 피어난 한 무리의 흰 꽃들. 어째 슬프고 애틋하게 흔들리는 작은 존재들을 연상시킨다. 아기의+숨결. 안개+꽃에 비하면 얼마나 맑고 순수한 느낌을 주는지.
2_언어는 사물의 살해,라고 했던 이가 라캉이었던가. 그 이전의 헤겔이었던가. 누가 되었든 나는 시를 쓰면서 이 말을 체감했다. 아니 절감했다. 언어는 사물을 살해한다. 도(道)를 도라 하면 도가 아닌 것처럼. 눈앞의 꽃을 꽃이라 하면 더 이상 내가 본 처음의 꽃이 아니다.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을 ‘무엇’이라 호명하는 순간 그것은 언어가 규정한 일반화된 개념으로서의 ‘무엇’의 범주를 결코 벗어나지 못한다. 여기 '안개꽃'이 있다. 안개꽃,이라는 시니피앙이 발음되는 순간 당신의 머릿속에는 경험과 학습에 의해 내재화된 안개꽃의 심상만 자리잡는다. 지금 내 앞에 존재하는 '안개꽃'은 당신에게 도달하지 못한다. 안개꽃,이라고 부르는 순간 내 앞의 '안개꽃'은 죽임을 당한다. 시니피에(기의)가 시니피앙(기표) 밑으로 계속 미끄러지는 상황. 이건 많이들 아는 사실이고. 라캉이나 소쉬르의 이론에 대해 말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의 관심사는 '죽이지 않고 변형시킬 수 있다면' 쪽으로 향한다.
3_말이 사물을 변형시킨다. 안개꽃,이라고 부르면 꽃은 안개처럼 낮고 축축하게 깔린다. 아기의 숨결,이라고 부르면 꽃은 맑고 산뜻한 바람처럼 살랑거린다. 시를 읽는 이유는 흔하디 흔한 말이 어떻게 익숙한 사물을 낯설게 만드는지 가장 확실히 경험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주기 때문일 것이다.
4_하릴없이 안개꽃의 꽃말을 찾아본다. 대체 꽃말은 누가 처음 만들었을까. 맑은 마음. 깨끗한 마음. 사랑의 성공. 이런 식의 밝고 기쁜 표현은 '아기의+숨결' 쪽에 가깝다. 슬픔과 죽음. 이건 '안개꽃'의 이미지에 좀 더 가까운 꽃말이군. 사물의 양면성은 언어의 양면성으로 나타난다.
5_안개꽃에 관한 시를 찾아본다. 복효근 시인의 ‘안개꽃’ 말고 다른 시는 없는가. 쉽게 전달되는 안개꽃도 좋지만 지금껏 내가 모르던 안개꽃을 기대하는 것. 이 또한 시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안개꽃을 해체하고 재조립하는 과정을 그 자체로 바라보는 것. 분석이라는 틀 안에 가두지 않는 것. 안개꽃을 살해하지는 않으면서도 최대한 근접해 (정형화된) 의미를 변형시키는 말을 상상해본다. 나는 그런 말을 할 재간이 없어 시를 못 쓰(는 것일 테)고.
6_어젯밤부터 눈이 내렸고 오늘 아침 베란다 난간엔 손가락 두 마디만큼 눈이 쌓였다. 어젯밤, 눈이 떨어지는 것을 보며 ‘눈이 내린다’는 문장을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눈은 왜 항상 내려야 하는가. 눈은 공중으로 솟구치기도 하고 옆으로 흩어지기도 하는데.
7_미야모토 테루의 <환상의 빛>을 읽고 나서 나는 한동안 '쌓인 눈이 거센 바다 바람에 날아올라 다시 내리는 가난한 바닷가 마을'을 상상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그의 첫 장편 영화로 <환상의 빛>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는 이 영화가 몹시 궁금했다. 특히 전 남편의 자살로 트라우마를 겪는 화자 ‘나’가 바람에 미친 듯 흩날리는 눈을 맞으며 방치된 어선 앞에서 언제까지고 우는 바닷가 장면이 어떻게 그려질까 보는 내내 기다렸던 것도 사실이다. 각본을 궁금해하는 마음은 어디서 비롯된 걸까. 문자 텍스트가 어떻게 영상 텍스트로 옮겨지는지(혹은 옮겨졌는지)에 대한 호기심. 기대는 다소 맥 빠진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지만. 문자 언어를 영상 언어로 바꾸는 과정에서 감독의 창의성이 돋보이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수확이었다.
8_오늘 아침 나뭇가지에 쌓인 눈을 보며 ‘눈꽃’이라는 단어를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것은 눈꽃을 생각했다는 반증.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으려 하면 코끼리가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처럼. 이건 안개꽃 같군.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못마땅했다. 눈과 안개꽃의 만남은 너무 흔한 것이어서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안개꽃 같은 눈, 눈처럼 피어난 안개꽃, 따위의 말들을 나는 떠올린 것이다. 나는 이런 말들이 싫어요. 이런 말들은 자동 연상에 의거한다. 바나나는 길어 길으면 기차 기차는 빨라 빠르면 비행기 비행기는 높아 높으면 백두산, 과 같은. 자동인가? 자동으로 연상될 만큼 무수한 반복과 학습, 경험에 의해 세뇌된 자극-반응일 것이다.
9_안개꽃이 내게 일으키는 자동 연상은 ‘엄마’이다. 오늘, 안개꽃이라는 활자를 바라보며 즉시 엄마,라는 단어를 떠올리지는 않았다. 다행히도. 나는 이제 안개꽃-엄마(생전 엄마가 좋아했던 꽃이다),라는 자동 연상에서 안개꽃-말, 이라는 생각의 단계로 넘어갈 만큼 변화했다. 이런 것이라도 변화,라 지칭하지 않는다면 내 삶은 얼마나 고인 물처럼 썩어갈 것인가.
10_시 같은 것이 시가 되지 않았던 시간과 시 같지 않은 것이 시가 될 수도 있는 순간을 번갈아 생각한다. 문득 임경섭 시집 <우리는 살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를 꺼내든다.
스마트폰에 형은 쓴다
눈이 내리고 있다
쓰고 나서 형은 생각한다
이 문장이 실현될 수 있는 확률에 대해
그러고 나서 스스로를 위로한다
모든 문장은 가능성으로만 존재한다고
괜찮다
누구도 진실을 적어 내려간 적 없으니
눈이 내리고 있다고 쓰면
눈이 내리고 있는 것이다
- 임경섭, <우리는 살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창비, 2018, '눈이 내리고 있다' 일부
임경섭의 시 ‘눈이 내리고 있다’는 이렇게 끝난다.
형의 눈 내리는 문장은 삭제되기 시작하고
형은 그 사실을 모른다
그러나 아무도 형을 모른다
이 시집을 좋아한다. 이 시집에 해설을 쓴 송종원의 글도 좋아한다. "언어와 정서 사이의 틈을 열어젖히는", "말 속에 얼마나 많은 우연과 어긋남이 은폐되어 있는지", "언어와 생각 사이의 결합이 얼마나 관습적이고 맹목적이었는지"와 같은 말에 공감한다. 평론가가 시인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 것도 좋아한다. "자신의 의심과 감각을 표준화된 언어와 쉽게 타협시키지 않으려는 천진한 에너지를 품고 있다."
11_신문에서 본 ‘안개꽃’이라는 세 음절의 단어로 시작해 좋아하는 시집으로 마무리하는 (뜻하지 않은, 즉흥적인) 잡문이라도 한 편 썼으니 오늘은 꽤 괜찮은 날이다. 안개꽃에 관한 시를 쓸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12_임경섭 풍으로 적어본다.
문장은 이미 삭제되기 시작했고(시작된 지 오래이고)
나는 그 사실을 모른다.
그리고 아무도 나를 모른다.
괜찮다.
(202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