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정쩡함에 대하여

견디는 방식으로서의 어정쩡함이 영원하기를

'도무지 진득하게 자리를 잡지 못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내 인생의 라이프 모티브였던 것 같습니다.

- 무라카미 하루키,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소설가가 된 무렵' 중 43p



학창시절부터 '나 자신을 규정하는' 가장 근접한 표현으로 선택한 단어는 '어정쩡하다'였다. 이 '어정쩡하다'를 술어로 놓으면 웬만한 단어가 주어로 와도 대체로 나와 맞아 떨어졌다. 관심이, 호기심이, 생각이, 논리가, 재능이, 인간관계가, 그리고 욕심이.


욕심 안에서 단어들은 다시 집념이랄까, 욕구랄까, 욕망이랄까 하는 것들로 분화될 수 있을 테니, 실로 이 '어정쩡하다'는 술어는 아무 윗옷에나 받쳐 입을 수 있는 블랙 팬츠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어정쩡한 조화를 싫어해서 옷을 고를 때도 늘 검은색을 선호하곤 했다. 상의든 하의든 신발이든.)


주어로 놓인 단어들을 다시 명사로 뚝 떼어놓고 보자면 이번엔 그 앞에 놓일 수식어로 '어정쩡한'이라는 형용사보다 '어설픈'이라는 단어를 선호하게 된다.


실로 그랬기 때문이다. 어설픈 관심, 어설픈 호기심, 어설픈 시도, 어설픈 생각, 어설픈 논리, 어설픈 재능, 어설픈 관계, 어설픈 욕심 등등.


나는 이 '어정쩡하다' 혹은 '어설픈'이라는 단어를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내 몸 속에 인이 박이도록 새겨 넣었을 것이다. 마치, 그다지 어정쩡하지 않은데도, 별로 어설프게 보이지 않음에도,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듯. 그래야만 할 것처럼.


어정쩡한 사태, 어설픈 상황을 견디지 못해(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견디지 못한다고 자기 주문을 걸어) 그것을 극복하려 애쓰는 모양새를 취함으로써 자기 만족(혹은 위안)으로 삼기 위해 말이다.


'나는 왜 (그 무언가에) 미치지 못하는가' 하는 자조 섞인 탄식이 노트를 가득 메울 때에도, '나는 무엇 무엇에 미쳤다'라는 타인의 문장들을 질투하곤 했다. (어쩌면 그런 고민을 하던 학생 시절이 곧 그 생각으로 '미치던' 때라는 것을 알지 못했는지도 모르고.)


공부에 미쳐서, 음악에 미쳐서, 만화에 미쳐서, 사진에 미쳐서, 연극에 미쳐서, 광고에 미쳐서, 영화에 미쳐서, 사랑에 미쳐서, 종교에 미쳐서, 예술에 미쳐서 기타 등등.


특정 분야에 '미치는' 사람은 내게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이가 그 분야에서 성공을 하든 하지 못하든 그 '미칠 수 있는 상태' 즉 극심한 몰입이 가져다 주는 일종의 번득이는 기운(이것이 광기일까)이 부러웠던 것이다.


천칭자리로 태어난 내게 어울리는 미덕은 '균형'이었기에, 나는 이 '태생적 한계(?)'가 나의 '미치기'를 방해한다고 여겼다.

images libra.jpeg 천칭자리의 상징은 균형


한동안 균형에 대한 거부감으로 저항(?)하다가 어느 순간 '그래, 이 어정쩡함의 긍정적 해석은 균형일지도 몰라. 내게 주어진 라이프 모티프는 균형인 게야'라고 마음을 고쳐 먹었다. 차츰 '균형은 나의 힘' 혹은 '균형을 중용으로'까지 밀고 가는 쪽으로 전향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걸 전향이라 할 수 있을까? 본래의 상태로 돌아온 것은 아니고? 그렇다면 그 '본래'란 것은 무엇인가? 천성인가? 본래=본질,로 놓고 보면 결국 선험적인 것일 텐데,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라는 명제를 믿어왔던 것과는 또 배치되는 사태 아닌가.


이런 식이라면 나의 본질은 그 자체로 '어정쩡함'이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르트르의 '대기상태(기다림)'를 주워섬기며, 언젠가 그 대기상태가 끝날 거라고, 혹은 끝내기 위해 나는 고뇌하는 것이라고 무수한 주문을 걸었던 것도, '언젠가'라는 속마음을 스스로에게까지 숨기기 위함이었고, 그 '숨기는 가면'을 다채롭게 갈아 쓰는 것이 나의 실존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단순 무식한 공식에 의해서 다음과 같은 문장이 성립하려나. "가면 쓰기는 어정쩡함에 앞선다"


'언젠가'는 오지 않는다는 것.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기다리던 고도는 오지 않는다는 것을 지금껏 나는 머리로만 이해했던 것이다.


waiting-for-godot.jpg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고도는 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고도를 간절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고도는 애초에 없었으며, 나는 고도를 기다리는 척해왔을 뿐이고, 기다리는 행위 자체로 내 존재 양식을 결정한 것이며, 기다림이 끝나는 고도의 도래는 결국 존재의 소멸이라는 것, 결국 고도가 오지 않기를 내심 바라며 집요하게 기다리고야 마는 것도 바로 나라는 것을, 비로소 ‘납득’하게 된 셈이랄까.


삶 자체가 어정쩡한 사태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도상(途上)이니 말이다.


뭔가를 말하려는 사람, 그리고 이를 듣고자 하는 사람 모두 이 '어정쩡함'을 어떻게든 명료하게 드러내고픈 혹은 발견하고픈 욕망을 가졌을 것이다.


소설가는 많은 경우, 자신의 의식 속에 있는 것을 '스토리'라는 형태로 치환해서 표현하려고 합니다. 원래 있었던 형태와 거기서 생겨난 새로운 형태 사이의 '낙차'를 통해서, 그 낙차의 다이너미즘을 사다리처럼 이용해서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같은 책, '소설가는 포용적인 인종인가' 중에서 20p


언젠가 이 어정쩡한 사태가 끝나기를 바랐던 것이 과거의 나라면, 현재의 나는 이 어정쩡함이 영원하기를, 그리하여 이 어정쩡함을 견디는 내 존재 방식(사물-시선 혹은 사태-시선 사이에서 낙차를 만들려는)의 정당성이 훼손되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다.


'언젠가'는 오지 않기에.


(2016-7-20)


https://youtu.be/NwNuQulK6N0

CCR의 Someday Never Co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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