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손 사용법
나는 도구를 잘 사용하지 못한다. '호모 파베르'적 인간이 아니다. 만약 선사시대에 태어났다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인간으로 도태되었을지도 모른다(지금도 딱히 쓸모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도구 다루는 수준이 침팬지보다 월등하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굳이 도구의 문제로 내려갈 것도 없이 나의 ‘손’ 사용법에 문제가 있음을 고백해야 할 것이다.
유난히 손이 야무진 사람이 있다. 비닐 봉지 하나 묶는 것만 봐도 손의 됨됨이를 바로 알 수 있지 않은가. 손의 야무짐으로 따지자면 나는 평균 이하도 모자라 거의 바닥을 기는 수준이다. 극단적인 예로, 음료수 따기.
들어 따기(탄산음료 캔), 돌려 따기(보통의 음료수)에 겨우 익숙해질 즈음 (나에게는 치명적인) ‘뜯어 따기’ 음료가 전격 출시되었다. 돌려 따기 용기의 뚜껑 둘레에 플라스틱 벨트를 하나 더 두른 위용으로. 아마 약 16년 전쯤에 이러한 포장 용기가 처음 출시되었을 것이다. 기억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당시 지방 출장으로 차를 몰고 서울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도중 들른 휴게소에서의 황당한 일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 나는 도구적 인간이 아니다 - 병 뚜껑과의 사투
여느 때처럼 단골 휴게소에 들러 매점에서 음료수를 하나 샀다. 차로 돌아와 운전석에 앉아서 음악을 틀어놓고 창도 반쯤 열어둔 채 음료수를 땄다(아니 따려고 했다). 뚜껑이 안 돌아간다. 손의 악력이 이렇게 약해서야. 몇 번 더 시도를 한다. 안 된다. 난감하다. 이유가 뭘까. 자세히 뚜껑을 들여다보니 지금까지 보지 못한 견고한 플라스틱 띠 하나를 더 둘렀다. 망했다. 나 같은 사람을 골탕 먹이려고 이런 것을 개발하는 것인가. 어딘가 한 군데(살짝 고개를 쳐들고 있는 꼭지)를 세게 잡아당긴 다음 주르륵 띠를 돌려 벗겨내면 될 듯한데, 어쨌든 예상치 못한 난항에 나는 당황하고 만다. 스스로 잘 못한다고 생각하는 분야에서 당황스러운 순간을 만나게 되면 상황은 악화일로이다. 병뚜껑 하나를 가지고 낑낑대며 나는 얼마쯤 고군분투했던 걸까.
누군가 바깥에서 운전석 차창을 똑똑 두드린다. 무심코 올려다보니 어떤 남자가 ‘자신이 따주겠노라’는 사인을 보내고 있다. 그 낯선 남자의 표정에서 ‘참 딱한 여자일세+한심한 아가씨로군+도저히 더 이상은 못 보겠다+내가 도와주고 말지’라는 여러 가지 메시지들이 오가는 것을 읽었다. 오, 맙소사! 나의 분투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상황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번엔 오른쪽 조수석 차창 밖으로 한꺼번에 터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내 차 오른쪽에 주차한) 봉고차 한 대에 무더기로 올라 타 있던 어린 학생들이 창 너머로 나를 보고 킬킬대는 소리였다. 아마도 그들은 나를 지켜보며 (높은 차였으니 쉽게 내려다보았을 것이다) 저 여자가 뚜껑을 따는지 못 따는지 내기라도 했을지 모른다. 친히 차에서 내려 내 쪽으로 다가와 뚜껑을 따주겠노라고 하는 이 친절한(혹은 오지랖 넓은) 남자는 그 학생들을 인솔하는 선생님 정도 되었던 모양이다. 맙소사!
자괴감에 식은땀이 났다. 어떻게 했느냐고? 그 낯선 남자에게 썩은 미소를 보내며 ‘괜찮다, 내가 하겠다’라는 사인을 되돌려준 후(이건 또 무슨 자존심인지) 부랴부랴 시동을 켜고 휴게소 주차장을 빠져나왔다는 슬픈 전설. 출장지에 도착해서 나를 맞이하는 사무실 직원이 따주지 않았다면 나는 그 음료를 영영 못 마셨을 거다.
#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고
위기의 순간은 한번 더 왔다. 아이가 6살 때인가, 유치원에서 엄마와 함께 하는 수업이 있었다. 수업이 끝난 후 간식 시간. 강강술래 하듯 둥그렇게 오밀조밀한 책상을 둘러놓고 한 책상에 아이와 엄마가 마주 보고 앉아 간식을 먹는 시간이다. 맛있는 샌드위치와 우유가 나왔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슬픈 전설 속의 그 플라스틱 벨트 우유가 등장했다. 아이가 그것을 딸 리 만무하다. 옆에서 엄마들이 척척 손을 돌려 자기 아이들에게 우유를 먹인다. 아, 이런. 긴장한 탓인지 또 안 따진다. 엄마, 빨리 따주세요, 라고 아이가 눈치 없이 재촉한다. 옆에 앉아 있던 엄마가 흘끗 우리를 쳐다본다. 잠시 유혹이 있었다. 옆에 앉은 엄마에게 따 달라고 할 것인가. 아,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있는 힘껏 플라스틱 벨트를 공략한다. 성공. (엄마는 여자보다 위대하다.)
나의 이런 모습을 ‘전략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직원까지 있었다. 어딘가 사람이 좀 허술해 보이고 비는 구석이 있어야 인간적인 접근이 용이해진다는 어느 책(성공적인 직장생활을 위한 어쩌고 류의 자기계발서였음이 틀림없다)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어느 정도는 들어맞기도 했다. 평소 나를 어려워하던 팀원은 나의 서툰 손 사용법에 관한 진실을 알고 친근한 미소를 짓게 되었다. (그것마저 나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가장 싫은 과목 중 하나는 '가정' 혹은 '가사'였다. 그나마 여자로 태어나 '기술' 과목을 듣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다. 그 많은 도구(연장)들을 어찌 다 이해하고 다루었을까. 상황이 힘든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바느질, 한복 만들기, 뜨개질, 자수 등등. 가사(家事) 시간은 나를 가사(假死) 상태로 만들었다. 수업 시간에 미처 마치지 못한 것은(얼마나 굼뜨게 움직이고 게으름을 피웠으면) 집에 와서 고스란히 엄마의 몫이 되었다. 인생의 아이러니는, 그렇게 엄마의 손길로 탄생된 자수 작품이 교내 우수작으로 뽑혀 벽에 걸리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으나 에밀 졸라처럼 ‘나는 고발한다!’고 외치지는 못했다. 내 인생에서 자수를 또 만날 일은 없을 것이라 여기면서.
그러나 살면서 자수의 또 다른 이름은 끝이 없다. 예컨대 (아이 친구들이 놀러 왔을 때 예쁘게 아이스크림을 떠주고 싶은 마음에 구입한) 아이스크림용 스쿠퍼scooper만 해도 그렇다. 아무리 힘을 주어 한 숟갈을 예쁘게 퍼내고 싶어도 영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도구라고 해 보았자 내겐 밥 숟가락보다 나을 게 없으니 무용지물이나 다름없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내가 운전을 (심지어 잘) 하는 것은 남편에게 최대의 미스터리였다. 그건 도구와는 상관없이 공간 감각을 활용하는 기술이므로 여타 여자들에 비해 공간 감각이 발달되었다는 방증,이라고 나는 주장했다.
# 유형의 도구, 무형의 도구
조물주가 빼앗는 게 있으면 주는 게 있겠지. ‘유형의’ 도구에 능하지 못한 대신 ‘무형의’ 도구는 그런대로 잘 사용할 줄 알게 해주었다(고 믿는다). 예를 들면, 심상이나 이미지 같은 매개에 민감하여 이를 잘 저장해두었다가 나중에 기억해내고 활성화시키는 데 별 어려움을 겪지 않는다. 간밤에 꾼 꿈을 (무의식과 의식이 만나는 중간 지점에서) 스캔하듯 정리하여 ‘꿈 일기’ 비슷한 것을 기록하는 것도 한 예이다. ‘효용성’으로 따지자면 나 이외의 사람에게는 아무 쓸모없으니 내세울 만한 것은 물론 아니지만.
내게 ‘선천성 운동신경 부족 증후군’을 선사한 조물주는 (그러니까 운동신경을 앗아간) 대신 그다지 나쁘지 않은 ‘문자 탐독 및 독해 능력’을 주었다. 상징과 비유에 난감해하지 않으며, (사람 얼굴을 포함한) 기호로서의 사물에 관심이 많고 기억을 잘하는 편이다. (남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아직도 우리 앞집에 사는 일본인 아줌마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안면인식장애 수준이다.) 알레르기성 비염으로 아침마다 잠시 사라지는 후각을 제외하곤 냄새에 민감한 편이며, 사람의 목소리나 기타 사물 혹은 악기의 소리를 구분하고 미세한 차이를 감지하는 청각도 좋은 편이다. 촉각과 미각은 잘 모르겠지만 공간 감각이 좋아 길눈이 밝고 지도를 잘 읽는다. 소위 오감(五感)이 나쁘지 않은 셈이다. 여기에 하나 더 얹자면 (물론 많은 직관적인 사람이 그러하겠지만) 육감(六感)이랄 만한 직감이 좋은 편이다. MBTI 결과에도 나의 뚜렷한 성향 중 하나는 ‘직관(intuition)’으로 찍혀 나온다. 소위 ‘촉(觸)’이 좋다고 하나.
그렇다면 이런 것들을 다 어디에 쓸 것인고? 과연 ‘촉(觸)’을 무형의 도구라고 이를 만한 것인가? 그렇다손 치더라도, 도구는 도구에 불과하다. 아무리 ‘촉’이 좋아도 이것을 삶의 질적 향상을 위한 ‘통찰’과 ‘지혜’로 바꾸지 못한다면 촉은 그저 촉일 뿐이다. 도구가 그저 도구일 뿐인 것처럼. 아이스크림 스쿠퍼가 WMF나 OXO와 같은 메이커이든, 아니면 이름 없는 잡표이든, 일단 아이스크림을 소담스럽게 퍼내지 못하면 아무 소용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도구를 운용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사람이다. 어떤 사람인가. 생각하는 사람이다. 만족과 즐거움 그리고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나는 나의 ‘촉(觸)’을 어떻게 쓸 것인가. 가진 거라곤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재주밖에 없는데. 평균수명 100세 시대에 평생의 업으로 (나의 친구처럼) 임상 심리나 상담 일을 생각해봐야 하나. 아니면 문학이나 철학, 예술, 종교 등에 대해 본격적으로 공부하며, 읽고 쓰기를 아침마다 제 얼굴 닦듯 해야 하나. 뭐가 되었든 습관처럼 ‘쓰기’ 쪽으로 기운다. 김중혁의 산문 <뭐라도 되겠지>를 낄낄거리며 읽은 후 ‘뭐라도 쓰겠지’라는 쪽으로 마무리를 지었던 것처럼.
# 쓰는 인간 - '즐김'으로서의 글쓰기
오에 겐자부로의 ‘읽는 인간’ 못지않게 ‘쓰는 인간’도 대접을 받아야 한다. 꼭 작가로서 쓰는 인간이 아니더라도 독자로서 쓰는 인간. 저자의 책을 읽는 나는 ‘읽는 인간’이지만, 그의 책으로 촉발된 느낌을 가지고 이리저리 생각을 엮어내는 나는 ‘쓰는 인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왜 쓰는가. 다시 원초적인 질문으로 돌아온다. ‘즐김’이다. 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롤랑 바르트를 통해 ‘텍스트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용어를 좀더 잘 구분하여 사용하자면 ‘즐거움(plaisir플레지르)’보다는 ‘즐김(jouissance주이상스)’ 쪽에 더 가까울 것이다.
롤랑 바르트가 이야기한 ‘저자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은 ‘신은 죽었다’고 외친 니체의 주장만큼이나 내게 신선한 것이었다. 책을 쓰는 전형적인 저자와, 그 저자의 책을 읽는 전형적인(수동적인) 독자의 관계를 넘어서, 이 둘이 단순히 ‘읽기’ 혹은 ‘쓰기’로 구분되지 않고 ‘텍스트’라는 매개 공간을 통해 만나고 사유하고 즐기는 것. (요즘 같은 세상에야 어쩌면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독자’가 단순히 ‘읽는 인간’이 아님을 (그리고 아니어야 함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즐거움의 텍스트’와 ‘즐김의 텍스트’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우리에게 저자가 더 이상 글쓰기의 근원이 아니라는 것을, 글쓰기에는 기원이 부재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따라서 저자라는 개념은 이제 설 자리가 없으며, 다만 여러 다양한 문화에서 온 글쓰기들을 배합하며 조립하는 조작자, 또는 남의 글을 인용하고 베끼는 필사자(scripteur)가 존재할 뿐이다. (10p)
저자는 책을 부양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다시 말해 책 이전에 존재하고, 책을 위해 생각하고, 괴로워하고, 살아가는 것으로. 그는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에서처럼 자신의 작품과 선행적인 관계를 가진다. 이와 반대로 현대적인 필사자(scripteur)는 자신의 텍스트와 동시에 태어난다. 거기에는 단지 언술행위의 시간만이 존재하며, 모든 텍스트는 영원히 지금 여기서 씌어진다. 쓴다는 것은 더 이상 기록, 확인, 재현, 묘사(peinture, 고전주의자들이 말하는)의 조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언어학자들이 수행동사(performantif)라고 부르는 것, 정확히 말해 언술행위가 발화하는 행위 외에 어떤 내용(어떤 언표)도 가지지 아니하는, 그런 진귀한 언술적인 형태를 가리킨다. 이렇게 저자를 매장하고 난 현대의 필사자는 (…) 적어도 언어라는 기원 외에는, 다시 말해 모든 기원을 끊임없이 문제시하는 언어 외에는 다른 어떤 기원도 가지지 아니한다. (32p)
저자를 계승한 필사자는 이제 더 이상 그의 마음속에 정념이나 기분, 감정,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고, 다만 하나의 거대한 사전을 가지고 있어, 거기서부터 결코 멈출 줄 모르는 글쓰기를 길어올린다. 삶은 책을 모방할 뿐이며, 그리고 이 책 자체도 기호들의 짜임, 상실되고 무한히 지연된 모방일 뿐이다.
- 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저자의 죽음’ 33p 중에서
‘글쓰기’라는 행위에 들어서는 순간 ‘즐거움’은 사라지고 ‘즐김’만이 남는다. ‘즐김’의 작가는 전형적인 독자에게 ‘즐거움’을 주지 못할 수도 있다. ‘즐김’의 독자는 전형적인 작가에게서 ‘즐거움’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어떤 ‘즐김’의 작가가 있을까. 프루스트를 기점으로, 편집증에 가까운 묘사로 전형적인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누보 로망의 앞줄에 섰던) 알랭 로브그리예 같은 작가가 한 예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즐김’의 작가의 작품 속에서 ‘즐김’을 만끽하는 독자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한 상호작용(그러니까 롤랑 바르트가 말하는 상호 텍스트성Inter-Texte)은 그 누구도 강요할 수도 강요될 수도 없다. 그렇다면 ‘텍스트’ 자체도 도구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머리가 슬슬 아파온다.)
내 인생에 둘도 없는 도구가 있다면 그것은 아날로그의 첨병, 필기도구일 것이고 그중에서도 특히 ‘연필’일 것이다. 내 인생에 둘도 없는 '디지털' 도구를 꼽으라면 단연 아이폰이다. 스티브 잡스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이라는 글을 쓰고 싶을 만큼 그는 내게 결정적인 도구를 제공한 사람이다. (애플社와 나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아이폰이라는 신통한 도구를 갖춤으로써 나는 전우치 부럽지 않은 요술을 부릴 수 있게 되었다. 아무 곳에나 메모를 써놓고 그 메모를 어디에 써두었는지 몰라 정작 필요할 때 찾아 헤매던 나에게, 아이팟이라는 기기를 별도로 구입하면서까지 줄곧 음악을 들을 것 같지는 않던 나에게, 꽂히면 어떻게든 카메라로 찍어두고 싶은 욕구 때문에 어쩔 줄 몰라하던 나에게, 떠오르면 꼭 찾아 보고픈 사전을 늘 곁에 둘 수 없는 나에게, 아이폰은 말 그대로 원 스탑 솔루션one-stop solution이었다.
다양한 도구를 다양하게 잘 다룰 줄 모르면 어떠랴. 내게 꼭 필요한 도구 몇 개를 원활히 잘 다루어 영혼을 증진시키고 삶의 질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된 것 아닌가.
호모 파베르(Homo Faber). 도구의 인간. 인간의 본질을 (유형 혹은 무형의) 도구를 사용하여 무엇인가 창조할 줄 아는 것으로 파악한 철학자 베르그송은 옳았다.
# 도구로서의 손에서 '즐기는' 손으로
물리적 유형의 도구를 사용하는 수준에서 더 나아가, 인간은 무형의 정신활동을 통하여(도구로 삼아) 새로운 것을 생성하려는 본질이 있다고 이해한다면, 도구로서의 ‘손’도 좀더 정신적인 영역에까지 확장될 수 있지 않을까. 도구로서의 손을 이용해 연필이든 만년필이든 컴퓨터 자판이든 활용하여 글을 쓰는 것 역시 창조 ‘작업’이니 말이다. (한나 아렌트가 <인간의 조건>에서 ‘노동’이나 ‘행위’와 구분하여 사용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의미로서의 ‘작업’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도구로서의’ 손이 어떻게 ‘생각하는’ 손으로 나아가는지가 풀린다. 더 나아가 ‘즐기는’ 손으로까지도.
어쩌면 호모 파베르(도구적 인간)라는 말은 호모 사피엔스(생각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 기타 호모 무엇 무엇으로 불리는 개념의 범주들을 통합할 수 있는 매개 영역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전혀 ‘호모 파베르’적이지 못한 내가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도, 손 사용법에 있어 할 말이 없는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도, 믿을 것은 ‘도구’로서의 ‘나의 손’ 즉 ‘육체’이며 결국 그것이 빚어내는 유무형의 결과물 혹은 과정 자체를 즐기는 것이 곧 ‘호모 루덴스’적 인간과 상통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 때문이다. 그렇다면 호모 파베르와 호모 루덴스는 굳이 대비적 구도에 서 있을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나는 호모 파베르적 인간이 아니다'로 이 글을 시작했다. 쓰다 보니, 나는 호모 파베르적 인간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은가? 라는 자문(을 빙자한 결론)으로 수렴되었다. 단언컨대, 이 세상에 단언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2015. 9.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