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렁다리를 건너며 9화

굿모닝 샌디에이고

by 무똥

※ 알림: 이 글은 허구이며, 등장인물과 사건은 실제와 관련이 없습니다.


“아들이 있다고요? 농담 아니죠?” 최대한 무례하지 않게 되물으려 나는 애썼다.

“농담 아니에요. 사진 보여줄게요. 귀엽죠? 이제 10개월이에요.”

“유부남이었어요?” 내 목소리가 떨렸다.

“아니에요. 내 아들의 엄마와는 대학 시절부터 교제해서 동거했었어요. 결혼은 안 했고요.”

“아들까지 낳아놓고 왜 결혼 안 했어요?”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그냥 준비가 안 됐다고 느꼈어요. 나는 아직 27살이고요.”

“애엄마는 어디 있어요?”

“다른 남자랑 결혼했고 샌디에이고에 살아요. 우린 돌아가며 서로 애를 보고 있어요. 내가 아들을 사랑하는 만큼 내 아들의 엄마도 아들을 사랑해요.”


브라이언은 전 여자친구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내 아들의 엄마’라고 고집스럽게 그녀를 칭했다. 나는 충격이 가시지 않았고 우리 사이에는 약간의 긴장감과 어색함이 감돌았다. 대화가 이어지지 않아 우리는 함께 카사 데 호세를 나왔다.

“혹시 나한테 실망했어요?” 브라이언이 눈썹을 까딱하며 물었다.

“아니에요. 그런 거. 그냥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해요. 집은 나 혼자 갈게요.” 뒤에서 브라이언이 날 잡을까 망설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우리는 거기서 작별 인사를 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훌리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는 어학원에서도 같은 반이고 시내의 같은 기숙사에 살고 있었다.


‘패티오에서 접선하자’

‘데이트 어땠어?’

‘말해줄 테니까 당장 내려올 것’

훌리오는 편한 운동복 차림으로 패티오에 왔다. 그곳엔 담배를 피우고 있는 스위스 여자애들이 두어 명 있었다. 날이 어두웠지만 패티오에 바로 연결된 빨래실에서 새어 나오는 빛 덕에 훌리오와 나는 서로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급하게 왜 불렀어?” 특유의 스페인어 억양을 잔뜩 늘이며 훌리오가 웃었다.

“나 오늘 브라이언이랑 데이트한 거 알지? 근데 대박 사건이야.”

“키스했어?”

“아 좀! 안 했어. 그런 게 아니라 그 사람 아들이 있대.”

“하하하! 어학원 직원에다가 애까지 딸렸다고? 너무 험난한데 앞길이.”

“그냥 이제 적당히 모른 척하고 지낼까?” 나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말했다.

훌리오는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조언을 일절 해주지 않았다. ‘인생은 즐기는 것이니 그냥 행복해라’라는 모호한 말만 남기고 방에서 보던 미드를 마저 보겠다며 유유히 사라졌다. 질질 끄는 슬리퍼에서 뭔가 여유가 느껴졌다.


다음날 어학원에 도착하자마자 화장실을 가던 중인 브라이언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우리의 관계가 어느 정도 비밀이라는 눈치는 서로 말 안 해도 알았기 때문에 우리는 눈인사만 하고 서로를 지나쳤다. 한 걸음, 두 걸음, 교실을 향해 가다가 내가 뒤를 돌아보았다. 브라이언도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첫 단추를 제대로 꿰지도 못하고 우리가 어긋나는 것 같아 두려웠다. 어두운 피부와 밝은 백발의 대비로 오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브라이언을 보고 있자니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어렵게 교실로 다시 발걸음을 돌렸고 그날 수업 시간 내내 창밖만 응시하다가 담임 선생님에게 한 소리를 들었다.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오늘 오후 5시에 씨포트 빌리지 산책할래요?’ 브라이언에게 문자를 보냈다.

‘괜찮아요? 난 좋아요.’ 바로 답장이 왔다.

수업이 끝나고 훌리오에게는 갈 데가 있어 먼저 기숙사로 들어가라는 말을 남기고 홀튼 플라자로 향했다. 나는 한국에서 사간 화려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역시나 몇몇 쇼핑객들이 원피스가 예쁘다고 지나가며 말을 걸었다. 나는 홀튼 플라자 이곳저곳을 급하게 걸어 다녔다. 신발 구경도 했다가 옷 구경도 했다가 식당가도 둘러보았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진정되지 않아 계속 돌아다니며 걷고 있는데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예지? 여기서 뭐 해요? 이따가 씨포트 빌리지에서 만나기로 했잖아요.” 브라이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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