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코스타 델 솔 Costa del Sol로
[여행의 계절, 다시 걷는 모로코]
다양성과 풍요의 땅 모로코의 수도 라바트(Rabat)와 카사블랑카 Casablanca
아직 해뜨기 전이다. 사람들은 전 날의 고단함으로 잠에서 깨기 전이다.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차갑게 옷깃으로 파고든다. 거리 곳곳에 지난밤 취객들이 토해낸 힘겨운 삶의 파편들이 나뒹굴고 차가운 바람만이 도심 골목을 막 깨우려는 중이다. 마을 곳곳에 우뚝 선 모스크의 첨탑에선 예배시간을 알리는 아잔 Azzan 소리가 마을 구석구석 골목골목으로 스며들며 새벽을 깨운다. 모스크에서 울려 나오는 새벽 예배 소리는 평생 무슬림으로 살아온 낫시르의 발길을 재촉하고 생경하고 낯선 풍경은 여행자의 발길을 붙잡는다.
카사블랑카 Casablanca
카사블랑카!
뭔가 낭만적인 냄새가 폴폴 풍기는 그런 느낌으로 다가오는 도시! 영화 ‘카사블랑카’ 때문이겠지...
우리는 어제저녁에 아프리카 북서부 북대서양 연안 최대의 상공업도시 카사블랑카에서 하루를 묵었다. 카사블랑카는 ‘하얀 집’이라는 뜻으로 아랍어로는 다르엘베이다 الدَّار الْبَيْضَاء, Dar el-Beida라고 한다.
카사블랑카는 기원전 7세기쯤 베르베르족에 의해 세워진 작은 어촌 마을이었다. 고대에는 페니키아와 로마가 이 지역을 점령하며 무역의 요지로 삼았으며, 이후 15세기포르투갈의 해양 왕 엔리케 왕자의 아프리카 서해안 루트 개척과정에 건설된 도시다. 하지만 1755년 리스보아 대지진으로 대부분의 건축물이 파괴되었고, 포르투갈은 결국 도시를 포기하기에 이른다. 13세기경에는 아주 조그마한 어항이었던 카사블랑카는, 1757년 마라케시의 술탄이 도시를 재건하고 아랍식으로 ‘다르 알바이다’라 불렀으나, 이후 프랑스어식 이름인 ‘카사블랑카’로 더 널리 알려진 도시다.
20세기 초, 프랑스가 모로코를 보호령으로 삼으면서 카사블랑카는 프랑스식 건축과 도시 계획이 도입되어 빠르게 성장했으며,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연합군의 주요 기지 역할을 하며 전략적 중요성이 커졌다.
오늘날 카사블랑카는 모로코 최대의 경제 중심지이자 항구 도시로서, 전통적인 이슬람 문화와 프랑스 식민지 시대의 건축 양식이 어우러져 독특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1942년 워너브라더스사에서 제작한 험프리 보가트 Humphrey DeForest Bogart(1899~1957)와 스웨덴 출신의 배우 잉그리드버그만 Ingrid Bergman(1915~1982) 주연의 영화 ‘카사블랑카’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도시다. 잉그리드 버그먼과 험프리 보가트가 오간 그 도시의 카페와 거리, 그리고 어딘가 애수에 잠긴 듯한 분위기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것 같다. 아마 영화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카사블랑카’라는 도시 이름이 왠지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추억이 된 지 이미 오래된, 예전에 흑백 TV를 보던 시절 주말에 방송하는 명화극장에서 봤던 기억이 희미하게 떠오르는 영화 카사블랑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이곳에서 한 장면도 찍지 않았다 한다. 당시 북아프리카는 ‘횃불작전’이란 전쟁을 치르고 있어 이곳에서 영화를 찍을 수 없었으며 모두 워너브라더스사의 스튜디오에서 촬영되었다고 한다. 우리의 머릿속에 그려진 카사블랑카의 이미지는 순전히 영화 덕분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영화 속의 몇 장면을 기억하며 이곳 카사블랑카를 떠올린다고 하니, 과거 흑백영화 시대의 스크린의 힘 또한 가볍지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아무튼, 석연치 않게 이별했던 연인 릭(험프리보가트)과 일자(잉그리드버그만)는 가장 위험한 곳, 카사블랑카의 릭의 카페 아메리캥 Cafe Americain에서 재회한다. 그리고 영화사에서 가장 유명한 이별 장면, 안개 자욱한 비행장에서 릭은 일자를 떠나보내고 위험 속에 홀로 남는다. 이 영화의 명대사는 카사블랑카와 함께 오버랩되면서 사람들 가슴속에 남아있다. “당신 눈동자에 건배! Here’s looking at you, kid.”, “연주해 줘요 샘, As Time Goes By’를.”
유튜브에서 카사블랑카 영화 보기
https://youtu.be/8SwM9L061Eg?si=6PNN9oebLobB3JmY
https://youtu.be/g5lmK1GNkqU?si=q9SzXofJIdNo3g_i
여명은 어느새 영화 ‘카사블랑카’의 릭의 카페 Rick's Cafe를 어슴푸레 감싸며 건물들 사이사이로 이리저리 얽혀 있다.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희붐한 도로 위로 뿌띠 택시 petit taxi 만이 부지런히 오간다. 멀리 붉게 물든 지평선 너머에서 곧 태양을 토해낼 듯 새벽 여명을 밀어 올린다.
핫산 2세 모스크 핫산 마스지드 مسجد الحسن الثاني Hassan masjid
이른 아침 식사를 마친 우리는 새벽이 채 벗어지지 않은 이른 시간에 핫산 마스지드 Hassan masjid(스페인어:Mezquita)에 이른다. 새벽을 깨우고 모스크로 예배를 드리러 온 이곳 사람들의 모습이 드문드문 보인다. 붉은 조명에 감싸여 신비스럽기까지 한 모스크의 모습이 새벽어둠을 가르고 웅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210m에 이르는 모스크의 첨탑은 그 위용을 이방인에게 내보이기라도 하듯 붉은빛을 내뿜으며 섬세한 문양으로 정교하게 조각된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낸다.
조명을 받은 아라베스크 벽면장식이 더욱 선명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정교하게 세공된 출입문과 기둥, 미려한 문양으로 장식된 파사드 Façade의 아름다움은 여행자의 마음을 빼앗는다. 수학적인 기하학무늬로 특정되는 아라베스크 양식의 모스크는 마치 그네들이 기도할 때 ‘알라는 위대하시다 الله أكبر 알라후 아크바르!’란 말처럼, 알라의 위대함을 시각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듯했다. ‘신의 옥좌는 물 위에 지어졌다’는 코란의 구절처럼 대서양위에 떠있는 듯 묘한 신비감은 우연이 아니었다.
태양이 대서양에서 떠오르면 이 모스크가 얼마나 더 경이로운 빛을 발할지 궁금하지만, 지금은 아직 여명이 기다려야 할 시간. 우리에게 모스크의 내부는 제한되어 있지만, 참배객들이 드나드는 순간을 통해 잠깐씩 내부의 풍경을 엿볼 수 있었다. 이른 아침임에도 많은 사람들이 기도에 몰두하고 있다. 히잡과 차도르를 두른 여성들, 질레바 차림의 남성들이 신성한 공간을 가득 채우며, 이른 새벽의 경건함과 평화로움을 더하고 있었다.
이곳의 남성의상은 간단하다. 포대자루 같은 천을 걸치는데, 질레바라는 남자의 전통의상이다. 모로코의 여성의상은 보이는 정도에 따라 구분한다. 부르카는 온몸을 완전히 가려 완전히 보이지 않는 복색이다. 미깝은 눈동자와 손만 보이고 차도르는 얼굴과 손이 보인다. 히잡은 현대의상에 얼굴 부분만 스카프로 가렸다. 관광객들이 유의할 것은 사진이다. 함부로 사진을 찍으면 괜한 시비로 곤욕을 치를 수 있다. 이들은 여자를 소유물로 생각하는 이슬람 문화권의 사람들이다. 우리와는 다른 문화이다. 모로코 여행은 그러한 문화차이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핫산 마스지드는 카사블랑카 서쪽 해변 간척지 위에 8년에 걸쳐 지어진 실내 2만 명, 실외 8만 명 모두 10만 명이 동시에 예배를 볼 수 있는 이슬람 사원이다.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의 ‘알-하람 모스크’와 메디나의 ‘예언자 모스크’ 다음으로 큰 대규모 사원이다. 성직자가 없는 이슬람교에선 모두가 성직자이다, 누구나 성직자이면서 참배자이다. 이들의 예배는 집단주의적이다. 집단의식은 이슬람의 개념이다. 모스크는 이네들의 집단의식의 뿌리인 셈이다. 10만 명이 동시에 집단의식이 행하여진다. 코란에 뿌리를 둔 이들의 정신세계에 깃들어 있는 이슬람 정신이 모스크로부터 나오는 셈이다.
문양을 새겨 넣은 대리석 광장 바닥이 붉은 조명으로 따듯한 느낌이 든다. 어디서 왔는지 한 무리의 관광객들이 모스크의 맞은편에 자리 잡은 마드라사(아랍어: مدرسة, madrasah -모든 종류의 학교 또는 이슬람교 신학(神學) 대학) 건물 쪽에서 나온다. 아마도 한국관광객인 듯하다. 어슴푸레 새벽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모스크를 뒤로하고 일정에 따라 떠나는 여행자의 발걸음은 아쉬움만을 그곳에 남겨둔다.
모하메드 5세의 영묘 ضريح محمد الخامس Mausoleum of Mohammed V와 핫산 탑 صومعة حسان Hassan Tower
도시가 잠든 새벽바다 위에 가물가물 불을 밝히고 정박한 선박들은 어디론가 출항을 위한 준비에 한창이고 밤새 고기잡이 나섰던 고깃배들은 힘겨운 작업을 마치고 항구로 들어온다. 어부들의 손놀림은 더욱 빨라지고 대서양의 물결은 무심하게 잔잔하다. 그렇게 라바트 الرباط Rabat는 우리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한창 고속철 공사가 벌어지고 도시 곳곳에 현대식 택지개발과 건축이 활발한 풍광 좋은 대서양 해안을 따라 형성된 모로코의 수부도시 라바트다.
이곳의 땅은 어디를 가더라도 유난히 붉은 진흙 빛을 띤다. 사람들도 땅을 닮아서인지 붉은빛을 띤다. 붉은 흙벽으로 둘러싸인 왕궁건물이 차창 밖으로 지나간다. 흙벽 주위에서 왕궁을 호위하는 군인들의 모습이 여행객의 눈으로 들어온다. 현 국왕 모하메드 6세가 사는 왕궁이다. 거리를 오가는 허름한 이슬람 전통 복장 차림의 사람들 삶은 어떠한 삶일까? 여행객의 호기심은 이내 사람들의 바쁜 발길 속에 묻혀버린다.
대부분이 허물어지고 일부만이 남아 있는 붉은 벽돌을 쌓아 축성된 토벽의 뚫어진 틈으로 비둘기들이 어지럽게 날아든다. 둥지를 틀고 먹이를 물고 부지런히 드나드는 것으로 보아 새끼를 낳아 키우는 모양이다.
그 흙벽 너머에 섬세하고 정교한 이슬람 전통의 돔형 건축물은 모하메드 5세의 영묘 ضريح محمد الخامس Mausoleum of Mohammed V이다. 핫산 타워 맞은편에 자리한 왕조의 무덤으로 신비한 문양으로 한껏 치장한 아름다운 이슬람 전통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돔 아래 왕조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붉은색 전통 복장이 잘 어울리는 왕실 근위병들이 지키는 모로코 왕조의 무덤이다. 현 국왕의 조부인 모하메드 5세와 그의 아들 핫산 2세의 관이 안치되어 있다. 1912년 이래로 프랑스의 식민통치로부터 항거, 독립운동을 주도하여 온 술탄 벤 유세프는 1956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하며 왕위에 즉위한다. 그가 모하메드 5세이다. 그 후 1961년 서거하였으며 7년간 400명의 장인이 투입되어 완성된 이곳에 석관이 안치되어 있다. 무덤을 열어 누구나 들여다볼 수 있게 한, 우리에겐 아주 낯선 이슬람 문화다. 네 방향의 입구에는 소총을 들고 근엄한 자세로 무덤을 지키는 근위병이 여행객의 호기심 어린 시선과 마주한다. 긴 창을 들고 말을 탄 왕궁 근위병들이 무덤주위를 순찰한다.
영묘 앞 광장에 수많은 돌기둥들이 도열되어 있다. 오래전 이곳이 로마의 지배를 받았음을 묵묵히 보여주고 있는, 로마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돌기둥이다. 이 기둥들은 과거 1191년 이베리아반도의 베르베르 무슬림 제국 인 알 모하드 칼리프의 통치자 인 야쿱 알 만수르 Yaqub al-Mansur가 이곳 라바트에 제국의 새로운 요새화된 수도에 합당한 대규모 모스크와 핫산 탑을 짓기 위해 터파기 공사를 하던 중에 발견된 것으로, 당시 수도건설을 위한 토목 공사를 하던 중 1199 년 야쿱 알 만수르가 사망하며 미완성 상태로 남게 된다. 그 후 1912년~1956년 프랑스령 모로코 식민지 시대에 조사와 발굴이 이루어지고 독립 후 현재의 영묘와 모스크 등이 완성되었다 한다.
아무튼 역사의 큰 소용돌이와 함께 했던 이곳 모하메드 5세의 영묘를 지키는 왕궁 근위병들은 여행객들의 기념촬영 요구에 응해주느라 바빴고 만수르 사망이 후 미완성으로 남은 핫산 탑은 왕조의 영묘를 지켜보고 있다.
도심 주위와 도로 곳곳에 게양된 국기가 유난히 많다. 이제는 온전히 독립된 모로코 땅이라는 상징과 함께 국가발전을 독려하려는 듯 힘차게 나부낀다. 한기를 동반하고 바다에서 올라온 자욱한 안개는 여행자의 얇은 옷차림을 사정없이 파고든다. 말을 타고 한적한 시골길을 지나는 농부는 서두르지 않고 목장으로 향한다. 초원 한가운데 나지막이 엎드린 붉은 흙벽의 농가에서 나귀마차를 끌고 밭으로 향하는 농부도 역시 서두르지 않는다. 양 떼를 이끄는 목동의 발걸음도 결코 서두름이 없는 여유로운 들판 풍경이다. 나귀를 끌고 밭을 가는 농부의 목청은 초원 위를 가른다. 드넓은 초지 여기저기 흩어져 풀을 뜯는 소와 양들은 신선한 풀을 찾아 자유로이 움직인다. 소와 양을 몰고 나온 차도르 차림의 소녀는 들녘 한편에 앉아 그저 지켜볼 뿐이다.
라바트는 로마시대부터 형성된 도시이다. 라바트는 성벽을 기준으로 성안과 성 밖으로 구분된다. 성 밖은 라바트의 신시가지다. 왕궁과 정부청사, 라바트 대학, 외국인 공관과 유럽인 거리 등 유럽풍의 현대적인 거리다. 성 안은 구시가지이다. 모하메드 5세의 영묘와 핫산 탑, 핫산 모스크, 이슬람인 시장거리와 유대인이 주거지역인 밀라가 있다. 도심이나 시골 들녘이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여유로운 땅 라바트는 모로코의 정치적 중심지이자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를 지닌 도시 중 하나이다. 이곳은 페니키아와 로마의 유적이 남아 있을 만큼 오래된 도시이며, 현재의 라바트는 12세기 무와히드 왕조(Almohad) 시기에 그 기초가 다져졌다. 이때 아브 알무민 술탄이 라바트에 ‘리바트 알파트흐’(Ribat al-Fath)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는 ‘승리의 요새’라는 뜻으로, 이슬람 확장을 위한 전초 기지로 건설된 도시였다.
무와히드 왕조는 라바트를 요새 도시로 강화하며, 높은 성벽과 지금도 상징적인 우다야스 카스바(Udayas Kasbah)를 세웠다. 13세기 이후 여러 왕조가 라바트를 거점으로 삼으며 성벽을 증축하고, 스페인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며 상업 중심지로 성장했으며, 17세기에는 스페인에서 이주한 안달루시아인들이 정착하면서 문화적으로 다양해졌다. 또한, 1609년 스페인의 펠리페 3세에 의해 추방당한 무어인들 중 일부가 현재의 라바트 인근에 정착하였고, 이후 바르바리 해적의 근거지 해적 활동의 기지로도 이름을 알렸다.
1912년 프랑스가 모로코를 보호령으로 삼은 뒤, 라바트는 모로코의 공식 수도가 되었고, 프랑스는 현대적인 행정 중심지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이후 독립을 맞이한 1956년에도 라바트는 수도로 유지되었고, 오늘날까지 모로코의 정치적, 행정적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라바트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유적지로도 유명하며, 특히 우다야스 카스바, 하산 타워, 셸라 유적지와 같은 역사적 건축물이 잘 보존되어 있다.
우리를 태운 버스는 코르크나무가 즐비한 고속도로를 달려 다시 탠지어로 향한다. 적재함 한가득 물건을 싣고 달리는 트럭이 매우 위태하게 앞서 달리고 있다. 아마도 저 트럭도 탠지어로 가는 모양이다.
19세기 유럽의 탐험가들이 아프리카의 내륙을 탐험하지 못하고, 그곳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던 시대적 배경에서 유래한, 그저 ‘검은 대륙’이라 알고 있던 아프리카 땅이다. 하지만, 아프리카 땅의 극히 일부이지만, 모로코를 여행하며 필자의 그릇된 인식은 180도로 바뀌었다. 이곳은 50개 이상의 국가와 수백 개의 민족, 언어, 전통을 가진 ‘문화와 역사의 대륙’이다. 또한, 사막, 열대 우림, 고산지대, 대륙 사면이 바다와 접해 있는, 여러 생태계가 공존하는 ‘다양성과 풍요의 대륙’이라 할 수 있다.
필자가 여행한 모로코만 하더라도 아랍, 베르베르, 유럽, 그리고 서아프리카의 문화가 얽혀 있는 독특한 나라로, 다양한 민족과 전통이 공존하는 땅이다. 고대부터 이어진 이슬람 문화를 중심으로, 유럽과의 교류와 베르베르의 뿌리가 만들어낸 독특한 혼합이 이곳의 특성을 정의하고 있다. 또한, 사막, 산악지대, 해안선이 어우러져 자연적인 아름다움도 풍부한 땅이었다. 무엇보다 열정적이고 진취적인 모로코 사람들의 ‘새로운 나라 건설’의 꿈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땅이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부서진 푸른빛 대서양은 더욱더 눈부시다. 길가에는 금세라도 하비비 하비비 (Habibi, 문맥에 따라 오 내 사랑! 나의 친구! 등으로 쓰는 아랍어)를 외치는 붉은빛 얼굴의 아지즈 Azazi라는 가수의 노랫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https://youtu.be/4ZbTsfVATOo?si=vVLB_XUuH3QMLC38
이른 아침부터 카사블랑카와 라바트를 둘러본 우리는 이제 붉은 땅의 나라 모로코를 뒤로하고, 지브롤터 해협을 건넌다. 햇빛은 지중해를 가득 채우며 선명하고 강렬하게 빛나고, 맑은 하늘 아래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하다. 이런 완벽한 날씨는 흔치 않은 행운이라고 한다.
만약 날씨가 도와주지 않는 날이었다면, 우리는 아프리카 대륙 안의 스페인 땅 세우타로 이동해 배를 타고 3시간 이상 걸리는 여정을 거쳐야 했을 것이다.
최단거리의 탠지어-타리프 뱃길을 따라 떠난 페리는 별 어려움 없이 타리프에 도착하고, 간단한 입국 절차를 마친 후 우리는 다시 스페인 땅으로 들어선다. 해안을 따라 올라가면서, 바위산인 'The Rock'이라는 별칭으로 잘 알려진 영국령 지브롤터를 눈에 담는다. 지브롤터는 스페인 속의 영국 땅으로, 이곳은 300년 간 이어진 극심한 영유권 분쟁의 중심지다. 스페인과 영국은 지브롤터를 놓고 치열한 대립을 이어왔고, 현재까지도 양국 간의 긴장이 계속되고 있다.
지브롤터는 이베리아 반도의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지중해의 중요한 요충지로, 그 지정학적 중요성 덕분에 8세기 이슬람 세력의 점령 시도를 시작으로 여러 세력 간의 쟁탈전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만큼 이곳은 전략적 가치가 높아, 역사적으로 다양한 세력의 충돌과 권력 다툼의 중심에 서왔다.
코스타 델 솔 Costa del Sol
해안가를 따라 솟아오른 산악지대와 띠모양(帶狀)으로 형성된 해안저지대가 계속 이어진다. 지브롤터에서부터 형성되어 그라나다 각 주를 지나 알메리아에 이르는 해안을 이네들은 코스타 델 솔 Costa del Sol이라 부른다.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다 보면, 'Costa del Sol'이라는 입간판을 간혹 볼 수 있다. 이 지역은 '태양의 해변'이라는 뜻을 지닌 이름에 걸맞게, 연중 300일 이상 따뜻한 햇살이 비친다고 한다.
우리는 지중해 연안을 따라 펼쳐진 환상적인 해변 Costa del Sol 풍경을 감상하며, 말라가(Malaga)를 지나 오후 해가 저물어가는 시간에 미하스(Mijas)에 도착한다. 코스타 델 솔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도 매력적이지만, 해가 지고 나면 더욱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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