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단어 『옛사랑』, 박상자님의 글
‘공든 탑이 무너지랴’라는 말이 있다. 어떤 일에 정성을 들이면 그 일은 쉽게 헛된 일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세상일은 탑쌓기처럼 그리 간단치 않다. 우리는 이미 무수한 사례의 헛수고를 보고 듣고 실천하여 결국엔 둥그런 양은 식탁에 앉아 허탈하게 소주를 한 잔 들이킨다.
캬-. 바보 같은 놈.
예전에 나는 소리를 참으로 많이 질렀다. 답답함을 표출할 방법이 그 것 밖에 없었다. 활발한 성격과 달리 정적인 일들만 가까이 하며 익숙하게 지내온 나였기에 어떻게 답답한 에너지를 쏟아내야 할 지 몰랐기 때문인 듯하다. 학창시절 내 친구들은 모두 나를 또라이로 기억할 거다. 쩝…
그래도 이런 괴행동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때도 있었다. 대학시절 한 친구는 자기의 생각을 과신하여 인생의 큰 선택을 한 뒤 그 선택에 따른 현실의 무게가 너무 커서 평소 이성적이던 모습과 다르게 어쩔 줄 몰라 했다. 옆에서 지켜봤지만 무얼 해도 풀리지 않았기에 나는 소리지르는 게 답답함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된다며 아무도 없는 운동장으로 데려가 바람이 많이 부는 밤에 함께 소리를 지른 적이 있다.
으아아아아-!
친구는 조금 괜찮아진 듯했다. 하지만 소중한 사람이 괴로워할 때에 내가 직접적으로 도울 수가 없다는 사실은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결국엔 사람과 사람 사이가 별과 별만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걸 느끼게 했다.
요즘은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 이미 소리지를 답답함은 전부 다 빠져나갔기 때문일까. 술을 마시고 캬- 감탄을 할 수 있기 때문일까. 게임을 하며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거나 마침 생각나는 친구에게 전화로 연락을 할 수 있기 때문일까. 그 시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 끙끙대던 나는 이제 답답해 하는 나를 다루는 방법을 어느정도 찾았나 보다.
역설적이게도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괴로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를 다루는 방법을 익혔던 것 같다. 공허하기만 했던 타지생활, 서툴렀던 첫사랑, 크게 다친 일, 불합리한 조직생활, 모든 걸 잃은 듯한 헤어짐, 무기력한 시간들. 죽을 만큼 힘들었던 시간도 있었지만 죽지 않고 살아남으면 그런 시간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 옆에 남아 비슷한 상황에 도움을 준다.
옛사랑이 그리운 건 그 사람 보다는 그 시간과 그 때의 아무 것도 몰랐던 내 모습이 그리워서라고 한다. 나의 어리숙한 모습이 뛰노는 그 애틋한 시간의 조각들을 옛사랑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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