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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멜레온 Aug 09. 2022

[산티아고 순례길] 메사 20

깜삐에요에서 구한 알베르게는 지어진지 얼마되지 않았는지 전체적으로 새 것인 느낌이었다. 2층 벙커 프레임이 원목으로 되어있고 벙커 사이가 널찍해서 12인실임에도 불구하고 난민촌 느낌은 들지 않았다. 대학생 기숙사같았다. 사람들의 움직임 소리에 깨어나 나가보니 다들 아침 식사를 하며 곧 출발하는 분위기였다. 고급 커피 머신이 있어 커피를 내렸다.

- 스팀 밀크 드실래요?

- 그런 것도 여기 있나요?

- 제가 바리스타거든요. 하하하. 여기 마침 커피 머신도 있네요.

까미노 아미고는 냉장고에서 꺼낸 찬 우유를 한 가득 우유 피쳐에 넣더니 긴 커피 머신 노즐을 그 속에 넣어 기다렸다. 치이익 소리와 함께 곧 거품이 생기고 따뜻한 스팀 밀크가 완성되었다. 아메리카노만 마실 뻔했는데 바리스타 덕분에 따뜻한 카페라떼를 마셨다. 스팀 밀크로 몸도 마음도 따뜻해졌다. 약 10명이  함께 긴 테이블에 아침 식사를 했는데 서로 처음 만나는 사람이 대부분인 듯했다.

- 푸실리 파스타 좀 드실래요?

20대 여성이 물었다. 20대 여성 1명과 40대 여성 2명이 한 팀인 듯했다. 엄마-이모-딸 관계일까 레즈비언-딸 관계일까 궁금했다.

- 어제 저녁으로 만들었다가 조금 남았는데 아침으로 먹으려니 약간 헤비하네요. 

가족 단위로 와서 그런지 잘 챙겨 먹는 것같다. 하양, 노랑, 초록 색색의 후실리 파스타에 올리브, 토마토, 참치까지 넣어 먹음직해보였다.

- 와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은 크로와상 1-2개가 아침인데 나는 파스타를 1-2인분을 먹고 힘차게 출발했다. 구름 낀 날씨였는데 다행히 비가 내리지는 않았다. 산등성이에는 다양한 종류의 꽃과 나무가 있었다. 가장 가까이에는 하얀, 핑크, 자주색 야생화가 흐드러져있었다. 그 다음에는 줄기도 가지도 보이지 않는 나무 덤불들이 산골짜기에서 굴러내려온 큰 눈덩이처럼  동그랗게 말려 요새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 뒤에는 큼지막한 침엽수들이 어지럽게 성곽을 만들어 놓은 듯했다.

분명히 아침 식사를 많이 한 듯한데 허기가 졌다. 1-2시간마다 앙증맞은 막달레나 컵케익을 2개씩 먹으면서 쉬기로 했다. 

어제와 다르게 산길은 적당한 흙길과 풀길로 폭신폭신했다. 바로 옆에는 10m쯤 되는 침엽수가 상쾌한 향을 뿜어내고 있었다. 피톤치드 세례를 받는 기분이었다. 직선 평지가 지나고 곡선 언덕이 나왔다. S자로 휘어지는 능선에 황소 열댓마리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황소에게는 사방이 식탁인 셈이다. 오르락 내리락 여기 저기 걸어가며 풀을 뜯는 모습을 보면서 공장에서 사육되는 소도 저들처럼 움직일 수 있는 자유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겨우 자기 몸만한 우리에 갇혀 시멘트 바닥에서 앉았다 일어났다밖에 할 수 없는 소와 온 산을 밟으며 뛰놀 수 있는 소를 보며 누가 더 행복할까 상상했다.

지금까지 산 위를 걸었다면 이제는 산 속을 걷는 기분이다. 사람 한 명 겨우 지나갈 수 있는 폭의 길을 노란색 화살표를 따라 지나갔다. 조금씩 해가 나기 시작해 사방이 다시 초록색으로 빛나려고 했다. 어떻게 사방이 이렇게 온통 초록색일까. 내 얼굴과 몸이 모두 초록색으로 물드는 기분이었다. 작은 개울이 나왔다. 약간 흐트러진 나뭇가지가 보이고 맑은 시냇물이 흘렀다. 시원한 시냇물에 손을 씻었다. 물을 마시러 내려오는 작은 동물이 없을까 했지만 보이지 않았다.

동물도, 사람의 흔적도 없었다. 너무 음식을 많이 챙겼나 생각했는데 계속 먹을 곳도, 물 마실 곳도 보이지 않았다. 북쪽길은 급수대가 자주 있는데 프리모티보는 그런 곳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계속 오르막길이었다. 7kg 이상의 배낭을 메고 하루 종일 오르막길을 걷는 건 생각보다 많이 힘들었다. 앞으로 계속 숙여서 그런지 배낭을 조인 쇄골과 어깨가 많이 아팠다. 내가 왜 이런 오르막 길을 걷는 걸까? 피잉 눈물이 어렸다. 내가 길을 잘못 들어섰나? 이제는 화살표도 보이지 않았다. 화살표가 없으면 일단은 가든 길을 직진한다. 그 때 큰 화살표가 등장했다. 나보다 먼저 온 순례자들이 크고 작은 돌맹이를 구해 큼직막한 화살표를 길가에 만든 것이었다. 예상치 못한 도움에 감사하며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을 이어갔다. 그리고 몇 시간 더 가다가 또 화살표를 잃었다가, 또 순례자들이 만든 돌맹이 화살표를 발견했다. 

산 꼭대기까지 오르긴 했는데 또 방향을 잃었다. 오늘만 몇 번째야! 이쪽으로 내려가는 길 같은데 노란색 화살표가 보이지 않았다. 

- 아유데메 포르 파보르! (¡Ayúdeme, por favor!) 

도와달라고 소리쳐도 적막만 돌아왔다. 날도 어두워지는데 여기 허허벌판에서 자야 하나. 침낭을 가져올 껄 그랬나. 가져온 옷을 다 껴입어도 저체온증으로 사망할 것같았다. 눈물이 났다. 그 때 멀리서 빨간색 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구조대원인가? 내 쪽으로 가까이 오니 빨간색 배낭을 맨 순례자다. 나와 다른 길에서 나타났는데 중간에 다른 길이 있었나보다. 

- 안녕하세요. 이쪽 길 맞는데 거기서 혼자 뭐하세요?

이탈리아에서 온 파울로는 시크하게 인사를 던지고 앞장서갔다. 지금까지 계속 오르막길이더니 이제 계속 내리막길이다. 등산스틱을 갖고 오지 않았다면 무릎이 나갔을 것같았다.

- 사진 찍어줄까요?

앞모습보다 자연스럽게 걸어가는 뒷모습이 더 예쁘게 나온다며 내가 걷는 척하는 사진을 뒤에서 찍어줬다. 배낭에는 아직 마르지 않은 상의 속옷과 양말이 달려 있었다. 사진은 추하게 나왔다.

- 이거 좀 먹을래요?

오늘 코스는 출발지에서 도착지까지 오르막이 많은 산 길이었다. 그 사이에는 음식 살 곳도 물을 구할 곳도 없어 음식과 물을 충분히 챙겼어야 했다. 파울로는 자신의 샌드위치 반과 에너지 캔음료를 건넸다. 나는 갖고 있던 과자를 건넸는데 괜찮다고 했다. 샌드위치는 살라미와 치즈를 대충 붙여 만든 게 아니고 호밀빵에 토마토, 계란 후라이, 양상추를 쌓은 건강식이었다. 불량식품을 건넨 것같아 무안했다. 오랜만에 먹은 에너지 드링크가 인위적으로 심장을 움직인 덕분인지 동행자가 있어서인지 걸음도 더 빨라졌다.

멀리 석양이 지고 있었다. 발 상처 때문에 속도가 늦어 파울로 아저씨를 보내고 목표 알베르게까지 오래 걸었다. 회색 구름 사이로 금색 노을이 은은하게 퍼졌다.

먼 산 위에 풍력발전소가 돌아가고 있었다. 우뚝 솟은 기둥에 날개 3개가 제 각기 다른 속도로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6개가 보였다. 감사한 사람 6명이 떠올랐다.

- 엄마

- 아빠

- 동생

- 반려견

- 엄마쪽 할머니 (할머니는 한자로 ‘바깥 외’를 쓰는 단어를 싫어하셨다)

- 아빠쪽 할머니

더 들어가니까 풍력발전소 6개가 더 보였다. 감사한 사람 또 누가 있더라?

- 기쁨과 물집을 동시에 주며 시절 인연에 집착하지 말라고 일깨워준 잘생긴 이탈리아 청년 피에르

- 화장품과 책 때문에 가방이 무겁다는 말에 외모와 성공에 대한 집착이라며 일깨워준 페드로 아저씨

- 천천히 걸으면서 인생의 달콤함을 느껴라며 이방인에게 커피 한 잔을 사주신 산탄데르 할머니

- 발 치료해주고, 중요한 건 산티아고 도착지가 아니라 가는 길 위에 과정에서 경험하는 것이라고 말해준 미겔 아저씨

- 이틀 동안 발 치료해주고, 성공을 해도 못해도 지금 여기에서 행복할 수 있다고 했던 마누 아저씨

- 내가 내 생각보다 강하고 타인의 기준이 아닌 내 기준에 따라 확신 갖고 살아라고 말해준 그레이스 아주머니

감사한 사람이 6명보다 더 많지만 풍력발전소 언덕을 넘으니 작은 마을이 나왔다.

온 몸이 너덜너덜하다. 집에 가고 싶다. 신체적으로 제일 힘들었다. 오르막길을 하도 많이 걷다보니 힘들다고 말할 수 있는 역치가 한 단계 올라간 것같다. 하루에 두 번이나 눈물이 난 날이다. 한 번은 오르막길이 너무 몸이 힘들어서. 한 번은 허허벌판에서 노란색 화살표도, 사람도 보이지 않아 무서워서.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 메사(Mesa) 표지판이 보인다. 메사(mesa)가 스페인어로 침대였나 책상이었나 잠시 떠올렸다. 침대는 cama고 mesa는 책상이었다. 2층 벙커로 놓인 16인실 알베르게다. 오늘도 내가 제일 마지막으로 도착한 것같다. 빈 침대를 찾는 데 한 침대 위에 검정색 캡이 올려 있었다.

- 거기 아마 꼬마 아이가 쓰는 침대일거예요. 한 어머니가 애 둘을 데리고 까미노를 하러 왔더군요. 참 대단하죠? 하하하.

어린 아이가 어떻게 이 오르막길을 올랐을까 상상이 되지 않았다. 어린 아이 둘을 데리고 다녀야 하는 어머니의 고생은 더 상상할 수 없었다.

많은 준비 없이 떠난 여행이지만 소음방지 귀마개가 추천 준비물 목록에 있었다. 여러 사람이 한 공간에서 취침하기 때문에 혹시 코 고는 소리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그 동안 쓸 일이 없어서 포장조차 뜯지 않았고 가방 구석에 있었는데 써야 할 사태가 3주만에 일어났다.

- 크렁크렁 푸우우우우~

처음엔 트럭이 지나가는 줄 알고 뒤척였다.

- 쿠억쿠억쿠억 푸우우우우우~

기차가 지나가는 줄 알고 드디어 깼다.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앞쪽인지 워낙 서라운드 입체 음향이라 어디서 나오는 소리인지조차 모르겠다. 산 속이라 사방이 칠흑같고, 2층 벙커에 있어서 1층에 있는 배낭을 찾으러 내려가기가 어려워서 깨다, 자다, 깨다, 자다 결국 띵 하는 두통과 함께 아침에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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