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아이들은 아직도 꿈나라이고 어젯밤 9시쯤에 잠이 든 민재만 눈이 떠졌다. 지금 시간은 7시 12분.
‘에이, 함 가보자. 아니면 말구지 뭐’
민재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금 가지 않으면 이 황금 같은 일요일에 민재의 스케줄이 원하는 대로 될 확률은 많이 줄어들 것 같았다. 아내와 아이들이 일어나면 음식을 먹을 때 메뉴의 선택권도 줄고 아이들이 학원을 가기 시작하면 학원 라이드와 픽업 등으로 시간을 어떻게 쓸지에 대한 선택권도 줄어든다.
‘떠나자 열심히 고민한 당신 ㅋㅋ’
민재는 갑자기 자신의 신세가 웃펐다. 주말에 뭘 하나 하는 것도 돈 한 푼 쓰는 것도 이렇게 고민을 해야 하다니. 하지만 이런 것도 행복에 겨운 것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이런 고민도 안 한다면 다른 열심히 사시는 분들에게 얼마나 얌체 같아 보이겠는가
민재는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에 올랐다. 인터넷으로 찾은 서울 3대 순댓국집 중 하나라는 곳의 주소를 넣고 천천히 출발했다. 보라매 공원 쪽에 있다는 이 식당은 30분 정도 걸리는 것으로 네비에 나왔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움직이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이니까...
민재의 차가 도로에 접어들자 휴대폰과 블루투스로 자동연결되어 Commodores의 Easy가 흘러나왔다.
‘~~easy like Sunday morning~~~’ 너무 완벽한 선곡 아닌가 일요일 아침에 스스로를 위해 집을 나선 민재에게 easy like Sunday morning이라니.
민재는 올림픽 대로를 나와 신대방동쪽으로 접어들었다. 자주 오는 지역이 아니어서 그런지 낯선 풍경들이 이채로왔다. 사거리가 아닌 로터리 길이 있는 것도 민재에게는 신기한 풍경이었다. 네비를 보니 전방 200미터 앞에 그 식당이 있었다. 속도를 줄이면서 매의 눈으로 식당을 찾았다.
‘아 여기구나.’
민재의 눈에 단층의 아담한 순댓국 집이 들어왔다. 같은 이름의 식당이 원, 투가 있었다. 대개의 맛집처럼 식당이 잘 되자 옆에 식당을 하나 더 낸 것 같았다. 민재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식당 안은 매우 깨끗하지도 더럽지도 않았다. 테이블과 방이 있었고 손님들은 3분의 1 정도 차 있었다.
서빙을 하는 사람은 1명인 듯했다. 아마 아침 시간이라 1명만 있겠구나 생각했다. 자리에 앉고 나서 그 아주머니가 나의 선택을 물어볼 때까지 기다리는 것보다 그냥 지나치면서 주문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순댓국 하나 주세요’
‘순댓국 하나요? 네~’
아주머니는 테이블 하나를 치우고 둥근 쟁반에 빈 그릇들을 꽤 많이 가지고 주방으로 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민재가 번거롭지 않게 그냥 쉽게 주문을 해서 그런지 꽤 밝은 목소리로 주방 앞에 쟁반을 내려놓으면서 ‘홀에 순대 하나요~를 외쳤다’ 민재는 아주머니를 지나치면서 가까운 빈 테이블에 앉으면서 그 아주머니와 아이컨택을 했다. 자신이 어디 앉는지 알려야 하니까 말이다.
조금 후 아주머니는 기본찬을 세팅하러 왔다. 새우적, 막장, 고추, 양파, 그리고 2개의 앞접시. 앞접시는 필시 테이블 위에 올려있는 2개의 고동색 단지를 위함이리라. 사실 고동색 단지를 보고 그 안에 모두 김치가 들어 있을까 하나는 김치, 하나는 깍두기(혹은 섞박지)가 들어있을까 의문이 들었었다. 왜냐하면 내가 앉은 곳은 2개의 테이블이 맞붙어 있었고 후추, 고추양념(흔히들 ‘다진 양념’라고 부르는 것 같다), 들개가 있는 양념통들은 두 개 테이블의 경계선에 의문의 고동색 단지는 각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었기 때문이다.
보물상자를 여는 것 같은 상상은 그만하고 민재는 뚜껑을 열기로 했다. 왼쪽 고동색 단지를 여니 겉절이가 들어 있었다. 상큼한 냄새가 났다. 그리고 옆 테이블 위에 있었던 단지도 열었다. 깍두기가 들어 있었다. 깍두기는 약간 매콤한 냄새가 났다.
‘그래 무슨 규칙이 있겠어. 그냥 놓다 보니까 이렇게 놓아진 거지’
민재는 두 개의 단지를 다 가져다가 일단 약간의 양만 앞 접시에 옮겨 놓았다. 나중에 민재가 앉은 옆 테이블에 두 명의 손님이 왔는데 민재가 한창 먹던 중에도 아주머니는 쿨하게 민재 앞에 있던 두 개의 단지를 덥석 짚어다가 옆 테이블에 옮겨 놓았다. 민재는 옆 테이블 손님이 도착했을 때 왠지 싸한 기분을 느껴 김치와 깍두기를 조금 더 덜어 놓았다. 민재가 순댓국을 다 먹을 때까지 김치와 깍두기는 부족하지 않았다.
아주머니는 무척 바빴다. 음식을 나르고 빈 그릇을 치우고 계산을 하고 손님을 안내했다. 민재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는데 주방 카운터에 순댓국이 하나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민재의 순댓국일 것 같은데 아주머니가 바빠서 빨리 받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가여운 걱정(?)을 하였다. 배가 고픈 건 아니었지만 모처럼 맛집에 와서 하는 식사이니 방금 나온 음식을 온전히 바로 눈 앞에 두고 싶었다. 아마 뚝배기에서 펄펄 끓고 있으면 몇 분동 안은 손을 대지 못하고 눈으로 바라만 봐야 할 것이다.
아주머니는 계산을 마치고 마침내 카운터로 가서 나와 있는 순댓국을 쟁반으로 옮겼다. 역시 예상대로 민재의 순댓국이었다.
‘겉모습은 다른 순댓국 하고 차이를 모르겠네’
민재는 속으로 생각하고 먼저 숟갈로 여전히 하얀 거품을 내고 끓고 있는 국물을 헤집고 한 숟갈 국물만 담아 입으로 가져갔다.
‘뭔가 모르게 담백하네. 아차차 들깨를 넣어야지’
민재는 들깨를 듬뿍 넣고 뜨거운 뚝배기에서 순대와 머리고기, 오소리 중 일부를 스테인리스 밥뚜껑에 옮겨 담았다. 뚝배기 안에 있는 것보다 빨리 식을 것이고 하나씩 먹어야지 다 식을 때까지 기다리기에는 너무 고통스러울 것 같았다. 우선 순대를 집어 앞에 놓인 새우젓에 톡 찍은 후 입안에 넣었다.
‘으음... 고소하다. 땅콩도 아닌 것이. 이런 순대 맛은 처음이네’
순대는 식당에서 다 직접 만든다고 한다. 보통 분식집이나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냉장고에서 꺼낸 비닐에 담긴 순대를 소쿠리에 옮겨서 데워서 파는 걸 보는데 확실히 달랐다.
민재는 순댓국의 맛에 흠뻑 빠져 뚝배기와 밥그릇에 테크니컬 하게 순대와 밥, 국물을 옮겨 가면서 적당한 온도와 구성으로 먹을 수 있게 최적화했다. 그리고 순대와 고기를 반 정도 먹고 이제 알맞게 식은 온도의 밥과 국물을 먹기 시작했다.
민재는 설렁탕을 먹을 때도 소금을 넣지 않는다. 그냥 섞박지나 김치를 가지고 간을 맞춰 먹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이 순댓국에서도 밥과 국물에 깍두기와 김치를 함께 입에 넣어가면서 먹었다. 그런데 먹는 도중 갑자기 새우젓에 다시 눈이 갔다. 보통 순댓국에서 주는 새우젓에 비해 양이 많았다. 처음에는 새우젓이 비싼데도 인심이 좋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었다. 처음 아주머니가 순댓국을 가져왔을 때 뜨거운 온도 때문에 순대와 고기를 밥그릇 뚜껑에 옮겨 놓고 젓가락으로 하나씩 들어 새우젓 혹은 막장을 톡 찍어 먹었다고 했다. 그때를 생각해보니 처음에 새우젓을 찍었는지 안 찍었는지 헷갈릴 정도로 새우젓이 짜지 않았다. 보통 가격 때문에 양에 비해 짜디짠 새우젓인데도 말이다. 그래서 평소보다 새우적을 더 많이 찍어 먹었다. ‘톡’이 아니라 ‘툭’ 아니 ‘툭 툭 툭’ 정도로 더 찍어 먹었다. 그런데 짜지 않았고 새우의 고소함이 당연히 더 많이 느껴졌다.
이 생각까지 오자 민재는 여전히 꽤 많이 남은 새우젓을 국물에 섞어 밥과 함께 먹어봐야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새우적을 숟가락을 적당히 덜어 뚝배기에 넣었다. 그리고 커피믹스 마실 때 티스푼 젓는 것처럼 커피에 푹 담가 밑에서부터 소용돌이를 만드는 것처럼 스푼을 세게 돌리는 것과는 아주 다르게 국물 표면에 얕게 숟가락을 스치듯이 마치 국물 외 거품을 제거하는 것처럼 얇고 또 얇게 숟가락을 아기 다루듯이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국물 표면을 살짝 헤치면서 돌렸다. 그리고 국물을 숟가락에 담고 입안에 양송이 수프 먹을 때처럼 흘려 넣었다.
‘오!’
말이 필요 없었다. 극한의 고소함이었다. 브라질리언 너트와는 너무 다른 고소함. 예상치 못하게 견과류가 아닌 순댓국에서 느끼는 고소함. 국물 자체, 들깨, 새우젓 고소고소 고소였다.
그 이후에는 마치 무엇에 홀린 것처럼 순댓국의 하나하나가 민재의 입속으로 사라져 갔다. 얼음 녹듯이, 크림 녹듯이 사라져 갔다. 그리고 마침내 뚝배기를 들고 국물 한 방울까지 다 입에 털어 넣었다. 근심 걱정도 같이 삼켜지기를 바라며 다 털어 넣었다.
계산을 마치고 민재는 문을 열고 식당을 나오면서 뒤를 돌아 식당을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일요일 오전 침대에서 갈까 말까를 수없이 되묻다가 오게 된 이 순댓국 집은 민재의 지도 앱 속에 녹색별 즐겨찾기로 남아 꽤 오랫동안 추억이 될 것 같았다. 국물→들깨→새우젓으로 쉴 새 없이 몰아친 그 고소함은 입안에 선원 오른팔에 퍼런색 잉크로 깊게 새겨진 돛 모양의 문신처럼 말이다. 잘 먹었습니다 사장님. 이 집 정말 잘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