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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서 빛으로, 아네모네

by 모즈

상징주의(Symbolism)는 현실 이면에 숨겨진 추상적인 개념이나 내면의 감정, 혹은 영적이거나 꿈, 환상 처럼 비현실적이며 신비로운 세계를 표현하고자 합니다. 객관적 현실보다 작가의 사색이나 무의식에서 영감을 얻기 때문에 신화나 전설, 종교적 주제 그리고 미신과 오컬트도 주요한 소재가 돼요.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작가의 경험이나 상상 혹은 환상을 표현하는 것에는 물리적인 한계가 따랐기 때문에 자연스레 작가들은 현실의 물체에 새로운 의미와 상징을 부여하여 메세지를 전달하게 됩니다.


오딜로 르동(Odilon Redon, 1840-1916)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상징주의 화가로 그가 심볼로 삼은 것은 눈, 그리고 눈을 담고 있는 얼굴입니다.

Vision 1883 / The egg 1885 이미지출처 wikiart
Everywhere eyeballs are aflame 1888 / The Crying Spider1881 이미지출처 wikiart


기괴하며, 다소 불쾌감을 주기까지 하는 그의 그림들은 르동의 정신세계를 명확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고독한 무의식

선천적으로 뇌전증을 앓은 르동은 병약한 체질이었습니다. 게다가 부모의 돌봄 조차 받지 못해 일찍부터 홀로지내야 하는 시간이 많았다고 해요.

아픈 아이는 혼자의 시간을 어떻게 보냈을까요? 아마도 다양한 상상을 하며 무료함을 이겨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결핍에서 오는 상상은 긍정적인 것 보다는 다소 어두운 부분도 많았을 것 같아요. 이러한 부분들이 그를 깊은 내면에 빠지게 하고 작가적 세계관을 완성해 가는데 큰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흔히 눈을 마음의 창이라 합니다. 르동도 비슷하게 여겼던 것 같아요. 그는 눈을 단순히 신체의 일부가 아닌 꿈, 무의식 그리고 내면의 시선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는 작품에서 수 많은 눈을 그렸지만 그의 눈들은 초점이 없거나 공포에 사로잡혔거나 불안에 휩싸인 듯한 모습들 뿐입니다. 시선의 방향을 찾지 못할 땐 차라리 감아 버리기도 하지요.

Head of a martyr 1877


이러한 눈들이 바로 르동의 내면의 고스란히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 눈을 외로운 내면, 르동 자신도 알지 못했던 고독한 무의식이라 생각합니다.


흑과 백, 느와르

어린 시절, 르동의 외로움을 달래준 것이 바로 '목탄'입니다. 싸고 흔해서 어려운 환경에서도 목탄 만큼은 구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어요. 그는 이 목탄으로 자신의 내면 세계를 무한히 펼쳐 나갑니다.

르동의 목탄 그림은 '느와르(Noirs)' 라는 하나의 장르가 됩니다. 목탄은 흑과 백의 명암 만으로 표현되기에 그의 어두운 내면을 가장 잘 나타내어주는 도구가 되어 줍니다.

하지만 그는 느와르라는 것도, 심지어 그를 상징주의의 화가로 이름지어 주는 것도 크게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르동은 평생을 고독속에 살며 파리 미술계와도 거리를 두었어요. 그의 그림 역시 1900년대가 넘어서고 부터 재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생의 대부분을 온전한 고독 속에서 지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의 그림이 뜻하지 않게 유명 소설에 등장하게 되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에서는 탈출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거예요.

1884년에 발간 된 소설 '아 레부르(À rebours)' 에서 주인공 에셍트는 다소 퇴폐적인 캐릭터로 여유가 있을 때마다 르동의 목탄화를 수집하는 것으로 소설 속에서 묘사 됩니다. 그는 르동의 그림을 '악몽과 같은 상상력' 등으로 표현했는데 이것이 많은 이들의 반향을 일으켜 순식간에 르동이 주목 받는 계기가 됩니다. 이 작은 행운으로 그는 가난으로부터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됩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인플루언서가 팔로우와 코멘트를 해 준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 여유는 그를 새로운 작품 세계로 이끄는 여러 계기 중 하나가 되어 줍니다.


파스텔, 어둠에서 빛으로

1890년대 중 후반 부터 르동은 목탄으로 그려진 흑백의 어두운 그림을 버리고 점차 다양한 색채를 가진 유화와 파스텔화로 전환하게 됩니다.

이에대한 이유는 여럿 있겠지만, 앞서말한 경제적인 이유와 더불어 가정에서의 안정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이유가 되는 것 같아요. 1880년, 마흔이라는 늦은 나이에 결혼한 르동은 86년에 아이를 얻지만 채 6개월 만에 떠나 보내게 됩니다. 가뜩이나 내면의 우울을 가진 그가 얼마나 감당하기 어려웠을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이후 89년에 태어난 아들 아리Ari는 다행히도 잘 자라 주었고 중년으로 들어서는 르동의 삶 역시 한층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무엇보다 흑백이 주는 단조로운 색으로는 다양한 메세지를 전하기에는 한계를 느꼈을 것 같아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생을 살아오며 여러 경험들을 통해 그의 가치관 역시 변했던 것이죠. 또한 이 시기 출시된 파스텔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습니다.

파스텔은 사용법이 목탄과 비슷한지만 색 표현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부합니다. 그는 익숙한 감촉의 파스텔을 통해 목탄으로는 표현할 수 없었던 내면의 세계를 마음껏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르동은 이 무렵 꽃에 관심을 두기 시작합니다. 꽃잎의 다양한 색에 매료된 그는 더 이상 흑과 백의 단조로움에 머물수 없게 됩니다. 누아르 시대가 저물고 색체의 시대로, 어둠에서 빛으로 향하게 되는 것이죠.


The Masked Anemone 1896


1896년에 그려진 '가면을 쓴 아네모네 The Masked Anemone' 를 보면 그의 그림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여전히 꽃이라는 비인격체에 사람의 눈과 얼굴을 그려넣었지만 예전과 같은 암울한 표정은 많이 사라져 보입니다. 오히려 옅은 미소가 느껴지는 것 같아요. 이유는 입이 그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입은 눈과 더불어 사람의 표정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르동의 다른 그림을 보면 눈만 있거나, 입과 코는 그리더라도 음영으로 뭉그러지게 표현한 것들이 대부분이거든요. 이 그림에서는 입꼬리가 실룩 올라간 것 처럼 확연히 구분이 됩니다.


바람의 꽃 아네모네


아네모네(Anemone, 학명 Anemone coronaria)는 미나리아재비과 식물로 지중해가 원산지로 알려져 있어요. 여느 꽃들과 마찬가지로 4, 5월에 개화를 합니다. 색은 흰색, 빨강, 파랑, 노랑 등 다양하며 재배와 개량을 통해 줄무늬나 무늬가 있는 것등 다양한 종류가 있습니다.

아네모네, 이미지출처 pixel


길이가 짧고 잘 물러지는 줄기를 가지고 있어서 꽃꽂이 용으로 쓰기에는 은근 난이도가 있지만 화병에 담아두면 꽤 오래 싱싱함을 유지할 수 있는, 보기보다 강한 꽃입니다.


꽃 잎은 종이를 대어 보면 글자가 비칠 정도로 얇습니다. 그 하늘함이 매력인데요, 살랑이 부는 바람에도 꽃잎이 흔들리는 모양 때문인지 바람꽃이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그리스어로 바람은 아네모스 ánemos 입니다. 또한 이 꽃은 아프로디테와 아도니스의 전설처럼 그리스 신화와도 연관이 있기 때문에 신화와 종교 등 영적인 것에 집착하는 르동에게 아주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 같아요.


르동은 이후 부터 본격적으로 꽃 그림을 그립니다. 특히 그의 꽃에는 아네모네가 자주 모습을 보입니다.

Vase of Flowers !905 출처 wikiart


이 꽃 그림과 르동의 초기 목탄 그림들을 보면 그의 정신 세계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림의 풍이 어딘가 낯익지 않나요? 르동은 1900년 이후 부터는 일본의 우키요에와 이를 모방, 오마주 한 '자포니즘'에 많은 영향을 받아요. 그의 그림에서 동양적인 색체가 느껴지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물론 르동은 이후에도 꽃만 그린 것은 아니예요. 자포니즘과 함께 불교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는데 이 또한 그의 작품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앞서 언급한 마스크를 쓴 아네모네 그림도 연꽃에서 태어난 부처에서 모티프를 가져오지 않았나 생각돼요.

Buddha 1906 이미지 출처 wikiart


언뜻 예수의 이미지를 가진 것 같지만 작품의 이름은 '부처'입니다. 르동은 평생을 꿈과 같은 무의식 그리고 신화와 전설, 종교 등에도 심취했는데요 현실 너머의 진실을 추구하려는 상징주의 화가로서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 같아요.


Ophelia 1903 이미지출처 wikiart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에 등장하는 오필리어의 이야기도 이제는 사랑스럽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느와르 시기에 목탄으로 이 그림을 그렸다면 얼마나 암울하게 그렸을지, 생각만 해도 기괴한 장면이 떠오릅니다.(공포에 절은 눈알이 물 위에 둥둥.. 뭐 그런)


오딜롱 르동은 암흑과 빛, 흑백과 색의 세계를 오가며 수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의 그림은 이후 초현실주의와 추상미술에 까지 큰 영향을 미치게 돼요. 뿐만 아니라 그의 내면 세계는 심리적, 철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까지 확대되어 여전히 현재의 시대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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