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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먼트 Jun 27. 2024

너는 너로 충분해

Tinley의 짧고 찬란했던 삶을 기리며

“아뇨, 이건 유전적인 것이라 고칠 수는 없고 계속 관리만 해야 한대요. 

현재로선 방법이 없다니까요. 

글쎄, 그게 우리 맘대로 되는 게 아니라니까요. 

아뇨, 좀 더 기다려야 해요. 

아니, 거기서 우리가 밥을 잘해 먹고 사니 안 사니라는 얘기가 왜 나와요. 

아직, 모르겠어요. 의사들이 나중에 또 얘기해 줄 거예요. 

아 몰라요, 끊어요.”


조금 퉁명스럽고 격하게 전화를 끊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한숨도 같이 패키지로 나왔다. 이는 한국에 계신 부모님에게 하준이의 소식을 전한 이후부터 바뀌지 않는 레퍼토리다. 부모님은 늘 이런저런 맥락 없는 질문을 쏟아내고, 나는 질문마다 ‘아뇨’라며 방어하기 일쑤였고, 또 부모님은 자신들의 평을 덧붙이시는 게 루틴이 되었다. 아마도 부모님은 하준이가 그런 희귀 질환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임을 인정하지 못하시는 듯했다. 더 정확하게는, 그것이 고칠 수 없는 질환이라는 사실을 맹렬히 거부하고 계셨다. 유전학의사 Dr. Spiro 가 우리에게 전해준 하준이의 증후군에 관련된 모든 내용은, 그분들 나름의 (그러나 의학적인 신뢰도는 거의 없는) 경험에 의해 깡그리 무시되고 있었다. 


예를 들어, 하준이의 피부 증상에 대해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니, 애가 태어나서 아토피 같은 게 있을 수도 있지. 그런 거 시간 지나면 다 없어져.”


또한 유전적인 이유로 발현되는 모든 증상에 대해서도,

“얘, 너희들이 맨날 유학 중에 밥도 잘 안 챙겨 먹고 건강관리도 안 하니까 그렇게 된 거지. 시간이 지나고 하준이가 좀 크게 되면 다 괜찮아질 거야. 아주 어릴 때는 아기 귀가 잘 안 들릴 수도 있어. 그러니, 좀만 기다려봐. 멀쩡할 거야.”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괜스레 짜증 섞인 방어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분명 아토피와는 전혀 다른 증상임을 설명드렸는데 왜 밑도 끝도 없이 그런 피부병은 다 괜찮아질 거라는 말씀만 되풀이하시는지. 이것이 아토피와는 비교도 안 될 위험성을 지닌 증후군이라는 사실 그 자체를 인정 못하시는 것 같았다. 또, 도대체 과학적으로 증명된 유전적 질환에 우리의 생활패턴 이야기는 왜 나오는지. 힘들었던 영국에서의 유학생활이 우리의 성염색체에 악영향이라도 끼쳤다고 생각하시는 건지. 그렇게 해서라도, 간접적으로 하준이의 질환을 우리의 탓으로 돌리시고 싶으신 건지. 이런 대화를 마치고 나면 내 마음 깊은 바다에 겨우 고정시켜 걸어놓았던 닻이 흐느적 풀려버리는 것 같았다. 그럴 때면, 겨우 다잡아놨던 마음의 배가 다시 표류하기 시작했다. 부모님들의 마음과 그 의도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현실을 힘들게 받아들이고 또 그 현실을 뚫고 나아가려는 나의 결심에 이 대화들이 결코 좋을 리 없었다. 무엇보다 그런 가벼운 생각과 말로 인해 내가 무겁게 또 무겁게 쌓아 내린 나의 결심이란 녀석이 흔들리는 느낌이 싫었다. 


아마, 그때쯤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그보다 조금 더 지나 2014년의 겨울을 향해 가던 시점.

병원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너희 아이와 완전히 같은 증후군을 지닌 아이가 애틀랜타 인근 Lithonia라는 소도시에 살고 있어. 태어난 것도 비슷한 시기야. 하준이가 한 달 정도 빠를 듯해. 서로 알아두면 좋을 것 같은데, 한 번 연락해보지 않겠어?”


난 어떤 표현할 수 없는 반가움에 즉각 그 제안을 수락했고, 곧 그 아이의 엄마의 전화번호를 받을 수 있었다. 병원관계자는 그분에게도 곧 내 전화번호를 주겠다고 했다. 내가 어떻게 인사를 하며 어떤 문자메시지를 보낼지 고민하던 찰나에, 고맙게도 먼저 그 엄마 Julie가 문자를 보내주었다.


아이의 이름은 Tinley였다. 평범한 백인 가정에서 태어난 여자아이였다. 하준이와 마찬가지로 출산직후 KID Syndrome임을 알게 되었고 그 이후 지금까지 약 5주 정도 신생아 집중치료실에 머물고 있었다고 했다. 그간 있었던 일을 들어보니, 우리 아이보다는 조금 더 위험한 순간들을 많이 넘긴 듯했다. 부부가 모두 기도하며 하루하루를 이겨내고 있었다가 얼마 전에야 겨우 퇴원할 수 있었다고 했다. 나도 그와 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에 우린 진심으로 서로를 위로하며 서로의 아이와 가정에 축복을 빌어주었다. Tinley의 엄마는 나에게 페이스북을 하냐며, 친구추가를 하고 서로 자주 이야기하자고 했다. 그리곤 곧 연락을 마무리했다. 아내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우리 아이와 같은 증상의 아이가 있다고 하니 왠지 모를 안도나 위로를 느끼는 것 같았다.


그렇게 Tinley에 대해서 알게 된 이후, 난 그 가족의 페이스북 페이지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매일 성실히 업데이트가 되고 있었다. 나와는 달리 Julie는 적극적으로 Tinley의 사진도 포스팅하고, 여기저기 기도부탁도 하고, 날마다 Tinley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등에 대해서 계속 게시를 하고 있었다. 부러웠던 건 양가 모든 가족구성원들이 자주 Tinley를 보러 오고 함께 이 순간들을 이겨내고 있었던 점이다. 조부모 및 삼촌과 이모 등 모두가 한 마음으로 Tinley를 응원하고 기도하고 있었다. 비단 가족들 뿐만이 아니었다. 부모가 마당발이었는지, 모든 친구들과 이웃들도 함께 이 어려운 시기에 동참하고 있었다. 사진 속 그 모습들은 애틀랜타에서 달랑 3명이 이 현실을 이겨내고 있었던 내 가족과는 왠지 모르게 대비되어 보였다.


그렇게 첫 연락 이후 이주일 정도 지났을 무렵, 갑자기 Julie 에게서 문자를 받았다.

‘Tinley에게 다시 피부감염이 발생한 것 같아요. 우린 급하게 중환자실로 가고 있어요. 제발 함께 기도해 주세요. 사진 하나를 보낼 건데, 혹시 하준이도 이런 증상이 있었나요?’


그 문자에 첨부된 Tinley의 사진은 (그 가족에게는 미안하게도) 가히 충격적이었다. Tinley의 조그마한 몸 전체가 탁한 색깔로 덮여있었다. 피부감염이었다. 온몸에 울긋불긋 덮인 염증으로 피부가 움푹 파여있었고, 그로 인해 몸에 열이 나서 피부색이 변색되고 있었다. 피부가 생기를 잃어 있었다. 하준이는 Dr. Spiro가 지난번에 말한 대로 태어나자마자 시행했던 초기조치가 너무 잘 되었기 때문에 이런 피부감염은 걸린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Tinley는 높은 열과 감염으로 인해 각종 수치가 치솟고 있었다. Tinley는 호흡을 힘들어하고 있었고, 이를 지켜본 지역의사가 애틀랜타 시내에 있는 에모리대학병원에 급히 이송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난 급히 Dr. Spiro에게서 받은 서류뭉치 중에서 피부감염증세에 도움이 될 만한 약제 및 연고가 적힌 리스트를 사진 찍어 보내줬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싶어서 말이다. 그리고, 정말 진심을 다해 기도하고 응원하겠다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Tinley는 그 후 에모리 병원에서 2주를 더 있었는데, 그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었다. 날마다 페이스북에 업데이트되는 내용은 Tinley, 그리고 부모, 그리고 의료관계자들 모두의 분투를 낱낱이 기록하고 있었다. 의사들이 모두 나서서 이런저런 치료를 시도해 본 모양이었다. 그 처치 하나하나에 모든 가족과 지인들의 희로애락이 결정되었다. Tinley 또한 힘을 내고 있었다. 좋았던 날들, 안 좋았던 날들도 있지만, 생이 주는 힘이 조금은 더 큰 듯했다. 다들 이 생후 2달도 안 된 아이의 승리를 염원하고 있었다.


조금씩 좋은 소식도 들리고 있었다. Tinley의 작은 승전보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승리들을 만끽할 시간이 너무 짧았다. 그 작은 소녀는 그렇게 모두가 조금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한 12월의 어느 날 밤 생후 8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무도 예상 못했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수치들이 어느 정도 정상화 되고 있다고 페이스북에 업데이트가 올라온 후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날의 페이스북은 온통 슬픔으로 도배되었다. 


난 적잖은 충격에 빠졌다.


우리 아이와 같은 증후군을 가지고 있는 아이가 사망한 것이다. 결코 가벼이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한동안 악몽도 꾸었다. 놀라서 벌떡 일어나 보면, 하준이가 아직 작은 간이 매트리스에 누워 쌔근쌔근 자고 있었다. 



페이스북에서는 Tinley의 장례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추도문이 공개되고 장례예배 장소 또한 알려졌다. 마지막까지 사력을 다했던 엄마 Julie와 그의 남편은 Tinley를 완전히 떠나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장례를 마치고 어느 교회 뒤 뜰 묘지에 Tinley가 작은 거처를 마련한 날, Julie는 페이스북에 글을 남겼다. 기도하고 응원해 준 모든 이들에게 고맙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Tinley에게도 한 줄 남겼다.


너와의 모든 순간이 감사의 순간이었어, 지금조차도.



한 번도 직접보지는 못했지만, Tinley의 생과 사는 하준이의 증상 및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는 내 시각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난 그 가족들의 슬픔에 내 마음 닿는 데 까지 공감했으며, 내 품에 아직 안겨있는 하준이로 인해 모든 걸 다해 감사하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내 현실이 어둡다고 생각하고 이를 이겨내기 위해 온갖 끌어다 붙일 수 있는 가장의 책임감으로 나를 무장시키려고 노력했다면, 단순히 그저 앞만 보고 헤쳐나가기에 혈안이 되어있는 아빠였다면, 이제는 정말 진지하게 하준이의 존재자체의 의미를 생각하고 이 아이의 생명에 감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가장으로서 아빠로서 그 간의 각오와 결단이 무의미하다는 말이 아니다. 그 각오와 결단 이전에 먼저 감사해야 할 것을 놓쳤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아이가 태어났잖은가. 생명이 나에게 왔잖은가. 가족이 생겼지 않은가. 둘만 살던 집에 셋이 살지 않는가. 살아있다면 숨을 쉰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인데, 왜 그 자체를 먼저 깊이 감사하며 이 시간을 보낼 수 없었던가. 바보 같은 나는 왜 꼭 이런 걸 다른 이를 통해 깨닫는 가 말인가.


짜증을 낼 일도, 불평할 필요도 없었다.

모름지기 아빠라면 누구나 다하는/해야 하는 각오가 몇 마디 가벼운 말로 가리어진다 해도 역정 낼 필요도 없었다. 


하준이가 내 옆에 존재하니까. 고마워해야 하는 것이었다.


하준아, 고맙다. 옆에 와주어서. 

너는 너로 충분해. 나도 너로 충분해.




* Julie의 가정은 매년 12월 무렵 백합 수백 송이와 어린아이들 옷을 근처 고아원과 병원으로 보낸다. Tinley를 기리는 그들만의 방식이다. 그리고 가족사진을 찍을 때마다 Tinley의 사진이 담긴 액자를 들고 찍는다. 그것을 종종 페이스북을 통해 보고 있노라면, 나 역시 Tinley의 이야기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Tinley의 생과 사가 나에게 주었던 깨달음과 그 작은 소녀의 작은 승리들을 떠올린다. 이 글을 통해, 잠시 이 땅에 머물렀던 그리고 지금은 천사가 된 그 귀한 생명을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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