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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먼트 Jul 04. 2024

멈추어야 할 때를 알아야 해

어린선증후군(KID Syndrome) 아이와 함께 걷는 삶 (7)

하준이가 병원에서부터 집으로 돌아온 지도 약 두 달이 흘렀다. 그리고 그 사이 해가 바뀌어 2015년이 되었다. 하준이와의 첫 만남 이후의 내 시간은 정신없이 흘러갔다. 문제는 가족의 정착과 하준이의 일 외에도 나는 학업도 함께 해나가야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1월이 되니 내 석사과정 첫가을학기의 결과도 나왔다. 그간 겪은 시간의 어려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공부는 외려 쉬운 것이었으나, 그 결과는 내가 예상 또는 기대했던 성적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온전히 공부에 집중할 신체와 정신상태가 아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핑계가 내 마음을 설득하진 못했다. 분명 이런 상황 속에서도 초인적인 힘으로 육아와 학업 모두를 성공적으로 해내가는 사람들이 있을 테니까. 아이가 아파도 흔들리지 않고 본업을 충실히 해나가는 사람들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나 자신을 돌아보고 상황을 냉철하게 봤을 때 나의 상황은 그럴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나는 한 번 하는 공부는 ‘주어진 여건에서의 최대한’이 아닌 ‘처절하게 집중해서’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름 그렇게 살아왔었다. 그런 마음가짐에 비해 현재는 학업에 들어가는 인풋의 양이 현저하게 적었다. 그게 시간이든 노력이든 말이다. 읽어내야 할 자료와 책은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교수님과의 질의응답시간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급급하게 해결하는 과제도 조금씩 늘고 있었다. 당연히 학업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공부보다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것들이 쌓여있었다. 아이의 병원약속은 참 다양하게도 많았고, 가끔은 하준이의 보험 등을 위해 주정부 관련부서와 약속을 잡고 이야기해야 할 때도 있었다. 차 없이는 생활할 수 없는 애틀랜타라는 도시에서 내가 우리의 허름한 중고차를 갖고 학교에 나가면, 아내는 빛이 잘 들지 않는 추운 아파트에서 하준이와 외로이 시간을 보내며 나의 귀가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귀가시간 후 셋이서 시간을 같이 보내는 것이 우리 가족이 버텨나가는 데에 필수요소였다. 나름 신학기였던지라 신입생들을 위한 모임과 그룹스터디 시간도 많았고 같이 입학한 동기들이 시험대비 겸 같이 공부를 하자고 했지만, 난 난감한 표정을 보이며 늘 먼저 자리를 떠났다. 나의 학업을 위해 투자할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는 점점 줄고 있었다. 나는 진지하게 나의 학업과  책임감, 그리고 선택과 집중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나의 결정은 휴학이었다.


학교에 휴학신청을 하고 나자 일이 급박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우선 학생비자로 미국에 체류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했다. 길게 잡아 30일 이내로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아파트 관리사무실에 연락해서 계약기간만큼 살 수 없게 되었다 하니, 한 달치 월세에 해당하는 금액을 내놓고 나가라 했다. 그 금액을 조금이나마 조정하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다. 언젠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안이 있을까 해서 다른 비자를 내어줄 교회나 회사가 있는지도 알아보았다. 모든 걸 다 비워내고 있었지만, 단 하나, 몰고 다니던 낡은 중고차는 훗날을 대비해 친구네 집에 맡겨두었다. 이후, 양가 부모님께 우리의 귀국예정을 알리고 어찌어찌 돈을 구해 비행기 티켓을 구매하고 짐을 싸기 시작하니 그제야 한국으로 돌아가는 건가라는 실감이 났다. 


결국 반년도 채 안 되는 미국에서의 도전이랄까 임시거주랄까를 마치고 우린 애틀랜타 공항으로 향했다. 마침 처가의 지인 중 한 명이 애틀랜타에 살아서 그분의 도움으로 공항까지 갈 수 있었다. 입국심사는 그렇게 까다로웠던 애틀랜타 공항에서 출국은 왜 또 그리도 쉬운지. 그렇게 우리는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을 했다. 제법 큰 비행기라 이코노미 석이 3 구획으로 나눠져 있었고, 우린 창문과 맞닿아있지 않은 가운데 구역에 자리를 잡았다. 아이를 배려해 아기바구니가 있던 자리였다. 기내용 짐들이 실린 선반들이 턱턱 닫히고 승무원들이 벨트 착용을 부지런히 점검한 후 얼마되지 않아 육중한 비행기는 굉음을 내며 이륙했다. 다행히도 생후 3-4개월쯤 밖에 되지 않던 하준이는 직항 최장선 중 하나라는 애틀랜타-인천 비행을 잘 견뎌주었다. 큰 소리를 내서 울지도 않았고 찡찡대지도 않았고 우유병만 입에 넣어주면 잠이 들어 편안하게 갈 수 있었다. 반면, 편안해 보이는 하준이와 다르게 사실 내 마음은 그리 좋지 않았다. 뭐랄까. 내가 보는 나 자신이 흡사 패잔병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난, 하염없이 긴 생각 속에 휩쓸려 들어가고 있었다.


2012년, 호기롭게 영국으로 유학을 나갈 때는 내 앞에 놓인 난관 따윈 다 부숴버릴 각오로 나갔었다. 정말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소위 말하는 패기 하나로 나갔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렇다고 부모님이 여유가 있으셔서 날 보내’주신’ 것이 아니었다. 나와 아내가 가진 것만 가지고 거의 빈 주머니로 나간 것이었다. 위에서 말한 ‘처절하게 집중해서’ 공부를 잘하고 싶었던 마음도 여기에서 비롯했다. 나에겐 두 번째, 세 번째 기회가 있는 것이 아닐 테니. 그러나 단 한 번이라도, 넓은 세상과 신학의 선진이라고 하는 나라들의 학문을 경험하고 싶었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털어 내었던 나의 결정이었고, 이를 아내가 따라 준 것이었다. (아내는 결혼 전부터 이 계획을 지지해 준 사람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한 번도 후회가 없었다. 물론, 영국에서 늘 행복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타지에서 처음 해보는 공부에, 그 문화와 언어에, 또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곳에서 스트레스가 없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 경제적으로도 마찬가지였다. 3학기 제도를 가진 영국에서, 방학마다 유럽 여기저기 다니던 사람들이 주변에 많았어도 허리띠를 졸라매고 아쉬움을 삼키고 지역 국립공원을 방문하던 우리였다. 그래도 중도포기라는 단어를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영국에서보다 '더 가진 것이 없이' 미국으로 건너갈 때도 난 다 헤쳐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큼 난 내 의지와 독기에 있어서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 독기 서렸던 발걸음을 잠깐 멈춰야 할 때가 된 것이다. 멈춰야 할 때를 알아야 한다고 현 상황의 모든 세세한 부분까지도 외쳐대고 있었다. 내가 멈추지 않으면, 아내도 아이도 그리고 양가 부모님들도 계속해서 지쳐갈 것이었다. 아내와 아이에겐 100%의 내가 필요했고, 나는 이 역시 해내야 했다. 남편이고, 가장이니까. 다만, 이 멈춤이 ‘잠깐’ 일 것이라 믿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었다. 어쩌면 다시 공부를 재개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깊이 들여다보면 볼수록 그 마음은 곧 두려움이었다. 그토록 하고 싶었던 공부가 저 멀리 광속으로 멀어지는 것 같은 두려움. 그 두려움을 떨쳐내기 위해 곤히 자는 하준이를 바라보고 지친 아내의 잠든 모습을 쳐다보면서 마음을 다시 정리하며 비행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그 시간 내내 속으로 계속 되뇌었던 것 같다. 


‘우선은 쉬자. 잠깐이라도 쉬자. 그리고, 아내와 아이를 위한 최선의 선택들을 계속해서 해보자. 그리고, 언젠가는, 언젠가는..’


장거리 비행을 마치고, 입국수속을 마치고, 짐을 찾고 주위를 둘러보니 우리는 어느새 세계 제일의 관문이라는 인천공항에 도착해 있었다. 오랜만에 온 인천공항은 더 깨끗하고 더 화려해져 있었다. TV속에서 외국인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감탄을 감추지 못했던 그 화려함과 패잔병인 나의 모습이 어찌나 더 비교가 되던지. 우리의 짐을 실은 카트를 밀고 가면서 본 대형 광고판에 비친 나의 모습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게이트를 빠져나왔을 때, 공항에 우릴 마중 나온 이들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입국장과 넓디넓은 공항로비를 빠져나오니 2월의 찬 바람이 우리를 에워쌌다. 공항에서 나오는 우리와 출국을 위해 부지런히 캐리어를 끌며 공항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스쳐 지나갔다. 


우리가 미리 예약했던 택시가 약속한 출구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짐을 다 싣고 택시가 출발했다. 영종도를 빠져나와 자유로를 타고 성산대교 아래를 지나 월드컵경기장 쪽으로 빠져나와 불광역 쪽으로 택시가 내달리는 동안 나와 아내는 서로 별 대화 없이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드디어 택시가 멈춰 서고 기사님의 도움을 받아 짐을 다 내릴 무렵, 엄마가 길 건너편에서 건너오고 계시는 것을 보았다. 우리를 본 엄마의 눈시울은 붉어져있었고, 잠깐의 인사 후 우리의 캐리어 중 하나를 받아 끌고 가셨다. 단 몇 걸음 앞서가는 엄마의 발걸음을 뒤쫓아가는 데 수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던 것 같다. 풀렸던 긴장감이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몇 분여 걸어서 부모님의 집에 도착했다. 결국, 다시 돌아오고야 만 것이다. 


나의 꿈의 시간은 멈췄다. 필연까지는 아니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멈춰야 할 때라서 멈췄다. 멈춤을 결정한 것은 나지만, 다시 재개하는 것은 내 의지로 되지 않을 멈춤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진실로 '잠시' 멈춘 것이라면, 언젠가 이 시계는 다시 움직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열심히 태엽을 감아놔야 했다. 그 태엽을 감기 위해 내 고향 한국은 어쩌면 가장 좋은 장소일지도 몰랐다. 나에게도, 아내에게도, 그리고 하준이에게도.


그렇게 한국에서의 몇 달간의 삶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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