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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먼트 Jul 18. 2024

넌 Bold 하니까

어린선증후군(KID Syndrome) 아이와 함께 걷는 삶 (9)

2024년 7월 현재, 미국 조지아주는 여름방학이다. 아들 녀석들은 이 방학 동안 그간의 설움을 다 털어내듯 놀고 있다. 뭐 하나 잠깐 돌아보면 놀고 있다. TV를 보거나 장난감을 가지고 놀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퍼즐을 맞추거나 뭔갈 만들고 있거나, 암튼 볼 때마다 놀고 있다. 기분 탓인가. 물론 그 노는 범주가 매우 건전하기 때문에 별 말 안 하는 편이지만, 부모 입장에서 마냥 놀기만 하는 아이들을 보며 조금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다. 곧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는 데, 또 학년은 하나씩 더 올라가는 데 저래도 괜찮을까.


그래서 큰 아이 하준이는 오전마다 나와 함께 조금씩 영단어도 외우고 수학문제도 풀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러다가 며칠 전 하준이가 ‘confident’라는 단어를 외워야 했다. ‘자신감 있는, 용감한’ 등의 뜻을 곱씹으며 외우고 있다가, 그 단어 아랫줄에 적혀있는 동의어를 보았나 보다. 거기에는 여러 동의어들이 나와 있었는데, ‘bold’라는 단어에 하준이의 시선이 멈췄다. 그런데, 연거푸 몇 번 그 단어를 읽어보더니 이내 표정이 굳는다.


“하준아 왜 그래?”

“아빠 이거 나쁜 뜻이지? 이거 애들이 나 놀릴 때 말하는 ‘bald [형용사: 대머리의]’ 아냐?”

“아냐, 하준아. 이 ‘bold’는 용감한, 대담한 뭐 이런 뜻이야. brave 나 courageous 같은 거야.”

“아, 그래? 난 ‘bald’인 줄 알았어…”

“언뜻 들으면 발음은 비슷하겠다. 그래도 아냐. ‘bald’ 랑 ‘bold’는 다른 거야. 그런데 왜? 하준이가 저런 단어를 보니까 애들이 그런 말 했던 게 생각나서 속상했어?”

“.. 응..”


하준이의 눈시울이 조금 그렁그렁 해지고 있었다. 안경을 들추고 벌게지는 눈을 마구 손으로 문질렀다. 난 하준이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하준아, 네가 어떤 모습이든 지금의 너 모습 이대로가 가장 멋있어. 아빠는 세상에서 우리 하준이가 제일 멋있어. 넌, bald 가 아냐. 여기저기 머리카락도 있잖아. 넌 오히려 bold 야. 용감하고 씩씩하고. 그런 네가 너무 대견하고 정말 대단하다고 믿어.”


하준이는 내가 이 말을 건네는 동안 내 눈동자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내 말이 진심인지를 헤아리는 건지.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모든 말을 전하고 나니, 하준이가 제 작은 손을 붙잡은 내 손 위에 다른 손을 올려놓으며 말했다.


“아빠.. 고마워..”


‘하준아, 넌 네가 얼마나 빛이 나는지 모르는구나.’ 






2015년 한국에서의 여름..


영어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그간 못 만났던 사람들도 만나고 하다 보니 한국에서의 시간도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처갓댁에서의 생활도 불편함 없이 보내고 있었다. 아주 가끔은 밖에 나가서 한국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도 먹곤 했다. 뼈해장국이니 생선구이니, 크게 비싸지 않은 음식들이어도 미국에 가면 한동안 못 먹을 터라 더욱 맛있게 느껴지곤 했다. 누군가는 애틀랜타에서도 먹을 수 있겠다 하겠지만, 본토의 맛을 어찌 비교하리. 소소하게 즐기는 한국음식들은 결코 소소하지 않은 행복감을 주었다. 


날은 점점 따뜻해지고 습해지고 더워지고 이내 장마가 찾아왔다. 회칠한 듯 구름 가득한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가 대지를 연신 적셔댔다. 2주간의 장마가 끝나니 곧이어 습하디 습한 한국의 더위가 여름의 한가운데에 들어왔음을 알려주었다. 조금만 나가 있어도 꿉꿉해지는 겉옷, 오랜만에 겪어보는 찜통 같은 더위, 그칠 줄 모르는 찌를 듯한 매미소리 그리고 반갑지 않은 모기와 파리의 방문가 잠시 잊었던 한국의 여름을 체감하게 했다. 그럼에도 하준이는 크게 별 탈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 무탈한 하준이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하준이가 가진 증후군을 이따금 잊게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던 중 변호사와 상의해 보니, 비자발급을 고려하면 8월쯤에 다시 미국으로 갈 수 있을 것이란 이야기를 들었다. 8월이라. 저기 어귀만 지나면 곧 다가올 8월이었다. 생각보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양가 부모님들은 조금이라도 더 우리와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셨고, 우리 또한 부모님들 그리고 미처 얘기를 나누지 못한 친구들과 좀 더 시간을 내고 싶었다. 사람들 만나는 일이야 너무나도 즐거웠고 또 중요했지만, 그런 식으로 만 남은 시간을 쓸 수는 없었다. 우리는 떠나기 전에 ‘한국에서 가족들과’ 하준이와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우리가 정착한 아이디어는 바로 돌사진을 찍고 돌잔치를 하는 것이었다. 이는 바로 아내의 아이디어였다. 하준이의 실제 태어난 달은 사실 9월이다. 하지만, 이렇게 한국에서 온 가족과 만날 수 있는 여건이 될 때 앞당겨 돌잔치를 하는 게 나을 듯싶었다. 또한 이에 맞춰 돌사진도 찍어서 기록으로 남겨놓으면 더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아내의 이런 제안이 난 고마웠다. 늘 삶에 바쁘게 임하느라 이러저러한 것에 둔감한 나와는 다르게 참 소소한 것들을 살뜰하게 잘 챙기는 아내이다.


며칠 후 예약을 잡고 아내, 하준이, 장모님과 함께 사진관을 방문했다. 정확히 어느 사진관이었는지 기억은 안 난다. 다만 지하철 7호선 어느 역에서 내려서 걸어갔다는 것만 기억난다. 어린아이들 사진을 많이 찍는 곳이라 그런지 스튜디오에는 화사한 분위기 속에 다양한 소품이 준비되어 있었다. 사진관에서 준비해 준 예쁜 옷들을 연달아 바꿔 입혀가며 하준이의 돌사진을 찍었다. 하준이는 앙증맞게도 빵긋빵긋 웃으며 우리의 박수소리에, 우리의 지시소리에 고개를 돌려가며 플래시 세례를 맞았다. 


원하는 표정이 잘 나오자 사진사가 추가로 제안을 했다. 캐릭터가 그려진 머리띠를 해보자는 것이었다. 해보는 거야 뭐 어렵지 않으니. 그런데, 머리띠에 나와있는 돌기들이 하준이의 헛헛한 정수리에 닿자 아이가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러자, 사진사가 모자를 한 번 씌워보자고 했다. 사진관에 있는 모자들과 우리가 가져간 모자들을 바꿔 씌워가며 사진을 찍었다. 사진사는 모자를 쓴 하준이의 모습이 맘에 들었는지 거듭 ‘좋아’를 외치며 컷을 늘려나갔다. 하준이도 엎드렸다가 앉았다가 하면서 귀여운 재롱을 부렸다. 진정 주인공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난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그 웃음 뒤에서 나는 이 아이가 내 마음에 얼마나 충만한지를 느끼고 있었다.


모자를 쓰던 안 쓰던, 머리띠를 하던 안 하던, 예쁜 캐릭터 옷을 입던 물방울무늬 무늬 옷을 입던, 이 아이는 내 마음에 충만했다. 머리카락이 많이 있던, 설령 다 벗겨졌던 상관없었다. 내 눈에 담은 하준이는 사진기의 뷰파인더에 담기는 피사체로서의 하준이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내 안에 담긴 하준이는 그 어느 것으로도 묘사가 불가능했다. 하준이가 재롱을 피워서 그 아이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었다. 재롱이 물론 귀여웠을지언정, 하준이의 존재자체는 그 귀여움만으로 다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말그대로 빛이 나고 있었다. 


하준이는 그간 한국에서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 꽁꽁 싸매져 있고, 부모의 철저한 맨투맨 수비 안에서 가려져있었다. 공공장소에서의 흘끗흘끗을 피하기 위한 전략이었다지만, 동시에 그 전략 때문에 하준이의 존재감도 가리어지고 있었다. 그런 내 아이가 스튜디오 안에서 자유를 얻어 빛나고 있었다. 지금 날개를 달고 자신도 날 수 있다며, 자신도 빛이 난다며 거기 모인 모든 사람에게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난 그것을 오롯이 느끼고 있었다. (독자들이 오해할까 봐 하는 말이지만) 흔히 부모들이 생각하듯 '우리 아이가 천재인가 봐' 하는 마음이 아니었다. 재능이나 잠재력 때문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의 하준이가 빛이 나고 있었다. 'Bold'하게. 






잠시 울먹거렸던 하준이는 공부를 마친 후 아내와 내가 점심준비를 하는 동안 우리 주변을 서성거렸다. 행여나 엄마 아빠가 무료해할까 봐 언제 우울했냐는 듯 (말도 안 되는 춤사위로) 춤도 추고 흥얼거리며 콧노래도 부르는 하준이다. 감출 필요 없는 보석 같은 아이다. 세상엔 분명 하준이의 외모만을 보고 거리를 두려는 사람도 있겠지만, 하준이가 ‘bald’가 아닌 ‘bold’라고 봐주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대담하고, 용기 있고, 굳센 아이로. 


이 모습 이대로 최고인 내 아이에게 난 무대를 마련해주고 싶다. 세상에서 하준이가 당당히 서서 그 존재를 빛내 보일만한 무대를. 진심으로 자신이 최고냐고 묻는 하준이의 맑고 깊은 눈빛에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무대를 말이다.


하준이 넌 bold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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