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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먼트 Aug 01. 2024

조금 더 자란 채로

어린선증후군 (KID Syndrome) 아이와 함께 걷는 삶 (11)

총 6개월 여, 한국에서의 일정이 모두 끝났다. 기다리던 비자도 나오고, 존재 자체로 빛이 나던 우리 하준이의 돌 사진도 인화해서 액자로 만들고 (물론 양가에 하나씩 나눠드리기도 했다), 돌잔치도 양가 가족들의 축하 속에 잘 마무리했다. 그리고 우린 본격적으로 미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시작했다. 마무리로 지인들을 모두 만난 후, 다시 여행용 캐리어를 꺼내서 이것저것 채워 넣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다시 꺼낸 캐리어에 보이는 상처들. 여기저기 상처 난 캐리어는 한국, 영국, 미국을 옮겨 다니며 터전을 잡으려다가 여차저차 여기까지 온 우리의 모습 같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상처 난 캐리어도 여전히 쓸모가 있을진대, 우리라고 없을까. 그나저나, 이것저것 채우려 해도 채울 게 별로 없었다. 결국 한국으로 단출하게 온 우리는 다시 단출하게 떠날 듯싶었다. 뭐, 애틀랜타에 가서도 당분간 단출하기란 마찬가지일 터였다.


잠깐 생각을 달리하자면, 단출이라 함은 그래도 '무'보다는 나음이었다. 그 나음은 우리에겐 긍정적인 면을 보게 했다. 애틀랜타에서 기다리고 있을 단출함에는 다음과 같은 이들과 물건들이 포함될 것이었다. 우선, 아무리 연고 하나 없었던 애틀랜타였어도,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몇몇의 사람들이 있었다. 대학 석사과정에 같이 입학한 동기 들 중 가깝게 지냈던 친구들과, 우리에게 비자를 내주었던 교회 사람들이었다. 그중 한 친구는 반년이 넘게 나의 오래된 연식의 차를 보관하고 있었고, 교회 분들은 한국에 간 이후로 별 소식 없던 우리를 많이 보고 싶어 하시고 궁금해하시던 차였다. 또한, 교회의 빈 창고에는 우리가 기존에 살던 아파트에서 쓰던 몇몇 가재도구와 가구 몇 점이 보관되고 있었다. 그것이 우리의 단출함의 전부였다. 하지만, 결코 작지 않은 단출함.


애틀랜타에 도착한 후에는 거의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할 터였다. 당장 머무를 곳도 없었기에 새로운 거처를 얻기까지는 얼마 전 글에서 언급한 처가의 지인 댁에서 신세를 좀 지기로 했다. 큰 민폐가 되지 않도록 최대한 빨리 새로운 거처를 얻을 셈이었다. 비록 아이 없이 두 분과 나이가 좀 있는 반려묘 한 마리만 사는 집일지라도, 민폐는 민폐인 것이다. 도착 후부터 우린 서두를 생각이었다. 그 지인 댁은 애틀랜타 도심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우리는 정착을 원하는 지역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고, 무엇보다 내가 일을 할 (종교비자를 스폰해 주었던) 교회와 가까운 곳에 보금자리를 얻어야 할 필요도 있었다. 그러나, 딱 이 정도의 예상과 생각일 뿐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뚜렷한 계획이 없는 비어있는 페이지였다. 


독자들이 혹시 이 상황에서의 나를 이해할지는 모르겠지만 난 되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시작해야 하는 이 상황이 마음이 더 편안했다. 빈 도화지에 스케치부터 다시 시작해서 그림을 그려나가야 하는 상황이라 애써 복잡한 생각으로 내 마음을 어지럽게 할 필요가 없었다. 혹자는 내가 계획적인 사람이 아니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또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새로 정착할 생각을 하면서 너무 무계획인 것 아니었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평소에 나는 굉장히 계획적인 사람임을 밝힌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나 자신도 이상하리만치 마음은 차분했고 다른 한편으론 집중력을 예리하게 벼리고 있었다. 아내는 종종 앞으로 어떻게 생계를 꾸려나갈 거냐, 어디다가 집을 마련할 거냐, 아이 병원은 어떻게 할 거냐 등등 많은 질문을 던지곤 했지만, 걱정하는 아내와 다르게 내 마음 안에서는 이왕지사 새로 시작하는 기회, 더 잘해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리고 더 잘해야만 했다.


인천공항으로 가는 내 발걸음은 (아내의 발걸음은 아니었을 것 같지만) 우리의 캐리어만큼이나 가벼웠다. 탑승수속을 밟고 검색대를 통과하고 게이트로 향하는 모든 절차와 과정에서 내가 생각한 것은, 더 정확히 말하면 내 눈에 보인 것은, 바로 하준이었다. 돌이켜보면, 이 아이가 우리 가정에 태어나서부터 급박하고 다이내믹하게 전개된 우리의 삶이었다. 그게 어려웠나? 힘들었나? 이 아이와 걷는 삶이 분명 보통의 길과는 달랐고 앞으로도 다르겠지만, 또한 지금까지의 우리의 삶이 힘들지 않았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겪어보니 그리고 걸어가다 보니 어떻게든 걸어가게 되더라. 곧 정확히 만 1살이 되는 하준이가 가르쳐준 1년의 삶에서, 그 전의 나의 시간보다 더 찐하게 성숙함이 우러나왔다 해도 과장은 아니었다.


다행이었다. 한국으로 나올 때의 패잔병과 같았던 기분과 마음은 (더 정확히는 '현실은') 반년이 조금 넘는 한국에서의 시간 동안 충분히 갈무리되어 있었다. 뭔지 모르게 서운하고 억울하던 마음은 희석되어 있었다. 목표를 이루지 못해서 초조해하며 들쑥날쑥하던 나의 마음도 잠잠한 수면을 되찾았다. 나는 외려 현재를 살펴보며 무엇에 집중해야 할지를 알아가고 있었다. 나에게 남아있어야 할 것은 20대 후반의 패기와 호기가 아니었다. 무엇에 집중해야 할지를 아는 성숙과 지혜였다. 이제 가정과 이 아이에게만 집중하며 살아가다 보면 또 다른 한 챕터가 살아가지게 될 것이었다. 그래, 분명 수동태다. 살아가지게 될 것이었다.


비행기에 탑승했다. 곧, 육중한 동체는 굉음을 내며 사뿐히 지상에서 도약을 했다. 올 때와는 다르게, 하준이는 비행기 안에서의 시간을 힘들어했다. 14시간이 넘는 비행시간 동안, 짜증도 내고 울기도 하고, 잘 잠들지도 않았다. 같은 비행기에 탑승한 사람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으려, 아내와 내가 번갈아 아기띠에 안고 사람들이 잘 안 찾는 복도를 찾아 걸어 다니며 재워야 했다. 덕분에 비행시간이 더디게 흘렀지만, 이 또한 아이가 잘 커가는 증거라고 생각하면 딱히 힘들 것도 아니었다. 분명 청력테스트를 통과 못했다고 하는 이 아이의 귀에 저 커다란 엔진 소리가 들리니까 짜증을 내는 것이었고, 거친 피부로도 비행기 안이 춥다고 느끼기에 안아달라고 보채는 것이었다. 올바로 커가고 있다면 당연히 느낄법한 감정을 표출하고 있는 하준이었다. 하준이는 좀 더 성장한 채로 미국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아빠만 성장시키는 것이 아닌, 자신도 성장하는 하준이었다. 


애틀랜타 국제공항에 착륙한 비행기는 이내 게이트를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곧 문이 열리고 우리는 짐을 챙겨 내렸다.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올 때 증빙했던 학생비자가 아닌 종교비자를 심사관에게 보여주며 입국수속을 마쳤다. 마지막으로 수하물을 찾고 카트를 밀어 입국장으로 빠져나갔다. 입국장에는 마중 나오기로 한 처가의 지인이 나와있었다. 우리를 위해 애써주심에 고마움을 표하고 주차장으로 갔다. 사람이든 짐이든 차에 되는대로 밀어 넣고, 다시 또 1시간여 달렸다. 왕복 16차선에 달하는 애틀랜타 도심의 대로와 여기가 미국이오 하고 외치는 높은 빌딩 숲을 지나 도심 외곽을 빠져나와 근교의 소도시로 달렸다. 우리는 장시간의 비행에 녹초가 된 몸과 캐리어 두 개를 끌고 집에 들어갔다. 미리 마련해 주신 방에 캐리어를 던져두고, 우리는 바로 지쳐 쓰러졌다.


시차에 적응도 되지 않은 다음 날 아침, 난 하준이를 아기띠에 매고 밖에 산책 겸 나갔다. 익숙한 미국 주거단지, 지나가며 Hi라고 말을 건네는 사람들, 저 건너편에 보이는 영어 간판들. 높디높은 하늘에서 8월의 햇살을 쪼아대는 애틀랜타의 늦여름. 작년 2014년의 8월에는 저 햇살을 맞으며 학교 근처 허름한 아파트에서 하준이가 건강하게 잘 태어나길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하준이가 태어났고, 휴학을 했다. 1년이 지났고, 지난 6개월은 한국에서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나와 아내, 하준이 모두 딱 그 반년의 시간만큼 성장한 채 미국으로 돌아왔다. 이제 다시 시작할 시간이었다. 다시 달려야 할 시간이었다. 무엇이 가장 먼저 필요할까. 그래, 친구에게 연락해서 맡겨놓은 차부터 찾아야겠다. 다시 시동을 켜야 할 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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