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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덕화 Apr 28. 2020

녹물

초단편소설

<연봉대별 유지 가능한 자동차 종결해준다. -추천 398회, -댓글 2,364개>

딸깍 '연봉 3,000만 원 대면... 아반떼.. 어디 보자 BMW 3 시리즈는... 연봉 7,000만 원은 되어야 유지가 된다고..' 지난 주말 당당하게 차가 뭐냐고 물어보는 소개팅녀의 질문에 BMW를 정비소에 맡기는 바람에 택시를 타고 왔다는 거짓말을 얼떨결에 해버렸다. 우물쭈물 당황한 내 모습 때문이었을지 아니면 내가 소개팅 내내 벗지 않았던 명품 재킷 안에 입은 유니클로 티셔츠를 알아보았던 건지 그녀는 내 거짓말을 이미 간파한 것 같기도 하다. 이후 시종일관 냉랭한 말투로 날 대하는 소개팅녀 눈치만 보다가 애프터 얘기는 꺼내지도 못한 터였고 설령 물어보았다 하더라도 그녀가 그 자리에서 흔쾌히 오케이 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몇 날 며칠을 자동차 커뮤니티만 기웃기웃거리고 있었다. 27년 평생 벗어나 본 적 없는 고향을 떠나 서울로 상경한 건 6개월 전이었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같이 다닌 불알친구들 모두 집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회사를 다녔던 터라 작년까지만 해도 나 또한 고향에서 뼈를 묻겠거니 했었다. 하지만 (제대 후 칼 복학에 실패한 관계로) 친구들보다 졸업이 한 학기 늦은 탓에 이래저래 조바심이 났던 나는 취업공고가 보이는 족족 원서를 써서 보냈고 당황스럽게도 서울에 위치한 중견기업으로부터 유일한 합격통보를 받았다. 생각지도 않았던 서울생활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을까 변변찮은 살림으로 서울로 가는 아들 뒷바라지를 해야 할 부모님의 걱정도, 촌놈이 서울 가면 눈뜨고 코베인 다고 고향에서 다른 회사 찾아보라는 친구들의 아쉬움 섞인 질투도 뒤로 한 채 서울에 올라오기로 마음먹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나는 난생처음 KTX를 타고 도착한 서울역에서 본 눈이 뒤집어지는 광경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어마어마한 사람들로 북적이는 서울역 광장, 드라마 미생에서 본 거대하고 웅장한 붉은 빌딩, 밤새 온 서울 하늘을 환하게 밝히는 네온사인들을 보고 심장이 쿵쾅돼서 미칠 뻔했는데 사실 제일 기억 속에서 잊히지 않는 건 서울 공기였다. 비릿한 풀냄새로 가득한 시골의 공기와는 달리 대도시 서울의 매캐한 쇠 냄새는 성별 구분이 따로 없는 페로몬 향수처럼 시골 촌놈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나는 설렘을 잠시 뒤로 하고 부모님이 어렵게 보태준 보증금 천만 원을 들고 자취방을 구하러 다녔다. 회사 근처 부동산을 찾아가니 머리에 힘을 잔뜩 준 부동산 아주머니가 이곳저곳 깔끔한 신축 원룸들을 보여줬지만 대부분 내 월급으로 감당할 수준의 월세가 아니었다. 겨우겨우 생활비와 타협해가며 찾은 곳은 보증금 1,000에 월세 47짜리 반지하 원룸이었는데 이마저도 50만 원 가까운 돈을 매달 허공에 날린다는 기분에 계약서를 쓰면서도 손이 벌벌 떨렸다. 고향집 내 방 보다도 작은 쥐콩만한 사이즈에 수돗물에서는 비릿한 쇠 냄새가 나는 낡아빠진 반지하 원룸이었지만 웃긴 점은 자취방이 주소상으로 그 유명한 청담동이었던 터라 전입신고를 한 날 고향 친구들한테 전화를 걸었다. ‘형님 이제 청담동 주민이다. 출세했으니 알아서 모셔라.‘ 라는 시시한 농담으로 자랑 아닌 자랑을 늘어놓자 친구들 모두 허파에 바람차서 죽겠다고 콧방귀나 뀌어댔지만 은근히 느껴지는 시기와 질투가 싫지 않아서 친구 하나 빠짐없이 일일이 밤새 전화를 돌렸다. 청담동 주민이라는 게 회사 사람들이 보기에도 좀 다른 의미였나 보다. 첫 회식 날 어디 사냐는 팀장 질문에 대답하기 무섭게 청담동에 자취한다는 이유로 여기저기서 이번 신입이 지방유지 집안이라고 헛소리를 해대기 시작하는데 며칠 지나니 내 별명은 '청담동 유지'가 되어있었다. 지방 유지는커녕 1,000/47짜리 반지하 신세라고 바로 잡을 겨를이 없었던 건지 아니면 난생처음 느껴보는 부자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싫지 않았던 건지 사람들의 오해를 그냥 내버려 두게 되었다. 그 결과 회사에서 나는 집 좀 사는 신입으로 이미지가 굳어졌고 우리 집안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화제는 늘 동기들 술자리 화제 중 하나가 되었다. 내 얘기에 늘 시큰둥하던 여자 동기 S가 날 보는 눈빛이 좀 바뀐 것도 그때쯤부터였던 것 같다.

 하루는 동기들과 한잔하기로 하고 사무실은 나서려는데 그 시큰둥하던 여자 동기 S한테서 갠톡이 왔더랬다. 예쁘장한 외모 덕에 입사 동기 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S는 '시간 괜찮으면 같이 저녁이나 먹자'라고 했고 나는 한치의 망설임 없이 동기들과의 약속을 파투 내버렸고 치맥이나 하자는 그녀에 말에 회사 근처 치킨집까지 마음을 졸이며 따라갔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조마조마한 마음에 평소 없어서 못 먹는 치킨은 뜯지도 못하고 맥주만 홀짝홀짝 마시는데 S가 대뜸 여자 친구가 있느냐고 물었다. 의도가 뻔해 보이는 질문에 이게 무슨 장난인가 싶어서 봤더니 S는 귀가 빨개진 얼굴로 손가락을 모아 빙빙 돌려가며 쑥스러워하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여태껏 주변 사람들이 장난이 아니라 진짜로 내가 부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미 주워 담기에는 늦었다고 판단한 나는 어느덧 이 상황을 즐기면 안 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고 생각했다. 나에게 대놓고 호감을 표시하는 S와 어쩌면 잘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잔뜩 기대에 가득 찬 표정으로 질문을 늘어놓는 S에게 하나씩 거짓말을 더해가기 시작했다. 전업주부인 어머니는 약사가 되셨고 평생 작은 구멍가게를 운영하셨던 아버지는 어느새 어엿한 중견기업 사장님으로 바뀌셨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신기루 같은 행복을 진짜인 양 구체화해나가면서 S와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고 치킨집에서 나오자 S가 불쑥 자취방이 회사 근처 아니냐고 물었다. 산책도 할 겸 우리 집까지 걸어가자는 S의 말에 나는 자연스럽게 집 방향이 아니라 언감생심 꿈도 못 꿨던 집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고급 오피스텔 쪽으로 방향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S와 대화하는 동안 목적지가 점점 가까워지는데 이상하게도 불안해지지 않는 것이 원래부터 내가 거짓말에 능숙했던 사람이 아닌가 의심이 들기도 시작한다.


 어느덧 오피스텔 앞에 도착할 때쯤 나는 걷는 동안 S와 나의 거리가 팔이 살짝살짝 닿을 정도로 가까워져 있다는 것을 느꼈다. 작별인사를 하려 돌아본 순간 S가 잠깐 집 구경을 시켜줄 수 있느냐고 묻는데 여기가 진짜 내 집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하지만 당연히 그녀를 데리고 올라갈 오피스텔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기에 나는 최대한 당황한 기색을 들어내지 않으며 늦었다는 핑계로 S를 돌려보냈다. 나는 오피스텔에 들어가는 척하다가 S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반지하 자취방으로 터벅터벅 돌아가기 시작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집안에 널어놓은 빨래 때문인지 습한 기운과 곰팡이 냄새가 덮쳐왔다. 얼른 지면과 맞닿은 반쪽짜리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지난밤 라면을 끓여먹고 난 설거지를 처리하기 위해 싱크대 수도를 틀었는데 처음 이사 왔을 때보다 희미하게 녹물이 더 심해진 것처럼 느껴진다. 그 날 이후 S는 나에게 더 적극적인 태도로 다가왔지만 이상하게도 나의 관심은 다른 것들로 쏠렸는데, 내가 꽤나 부자인 것으로 소문나자 주변으로부터 끊임없이 소개팅이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소개팅 상대들은 하나같이 쫌 사는 집안분들이었고 몇 벌 되지도 않는 옷을 돌려 입어 가며 계속 소개팅을 나가다 보니 스스로가 점점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던 나는 생활비를 줄여 비싼 재킷을 하나 구매했다. 난생처음으로 한 벌에 100만 원이 넘는 옷을 사면서 손이 벌벌 떨렸지만 이후 소개팅 자리에서 ‘어 그거 A브랜드 아니에요?’ 하고 알아보는 소개팅녀의 반응에 그만한 값어치를 하는구나 하고 뿌듯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비싼 재킷을 알아봐 준 소개팅녀와도 한 번의 애프터 후 연락이 끊겼는데 아마도 두 번째 만남에서도 같은 재킷을 입고 나갔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후 왜 잘 안된 건지 묻는 소개팅 주선자의 물음에 단지 내 취향이 아니었다고 얼버무리고 난 후에 나는 더욱더 비싼 옷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입사하면서 만들었던 마이너스 통장잔고의 한계에 다다를 만큼 비싼 옷을 사모으기 시작했고 어느덧 사모은 옷값은 부모님이 어렵게 보태주신 반지하 원룸 보증금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소개팅 자리에서의 내 모습에 끝없이 빠져들고 있었다. 비싼 옷을 입고 소개팅에 갈 때면 실제 내가 가진 것보다 몇 배는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같은 소개팅녀와의 몇 번의 만남이 더 이어질 때면 반지하 원룸에 사는 마이너스 통장 인생이 들통날까 봐 아슬아슬 거짓말로 외줄 타기를 하는 것도 힘들었기에 애프터에 실패하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름 가장 비싼 재킷을 골라 입고 나간 소개팅 자리에서 만난 한 소개팅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압도적인 아우라를 풍겼다. 부티가 난다는 게 이런 말인 싶기도 하고 그녀를 보자마자 눈을 뗄 수가 없어 어안이 벙벙해졌지만 최대한 태연한 척하려 노력했다. 겉모습뿐만 아니라 내면까지 알차 보이는 그녀가 당연한 듯 차가 뭐냐고 물어보았고 그 순간 나는 BMW를 탄다고 대답해버렸다. 소개팅 내내 바짝 졸아있는 상태로 겨우겨우 소개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 나는 너무나도 당연한 듯 차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몇 날 며칠을 인터넷을 뒤졌는지 모르겠다. 자동차 커뮤니티에 올린 내 질문글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아냥 거리듯 내 연봉으로는 국산 경차도 버겁다고 했다. 내 옷장에 들어있는 명품 옷값만 해도 경차 한대는 충분히 사고 남을 텐데 말이다. 그러던 중 나보다도 적은 연봉으로 BMW 3 시리즈를 무리 없이 타고 다닌다는 댓글을 본 순간 나는 당장 차를 계약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눈을 뜨자마자 소개팅녀에게 애프터 신청 카톡을 보내 놓고 차를 계약하러 갈 준비를 한다. 차를 인도받는 날에 맞춰서 약속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하며 퉁퉁 부은 눈으로 세면대 수도꼭지를 튼 순간 수도꼭지는 괴성을 내며 주황빛에 가까운 녹물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혹시나 해서 변기 옆에 붙어있는 샤워기도 틀어보았지만 똑같이 쇠 비린내 나는 녹물을 토해낼 뿐이다. 꽤나 당황한 나는 얼른 옷가지를 챙겨서 집 근처에 유일한 고급 사우나에 가서 씻기로 한다. 3만 원짜리 사우나에서 대충 샤워만 마치고 나서 종이가방에 챙겨간 명품 옷으로 단장을 했다. 그리고 사우나를 나서면서 아직 대답이 없는 소개팅녀에게 ‘아직 주무시나 봐요.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 하며 셀카를 하나 찍어서 보낸다.

 택시를 타고 청담동에 위치한 BMW 매장에 도착해서 딜러에게 이것저것 계약조건에 대한 설명을 듣는데 60개월 기준 매월 할부금액이 인터넷에서 본 사람이 말한 금액보다 더 높았다. 뺀지르한 포마드 머리의 딜러가 선수금 금액에 따른 차이라고 설명을 하며 계약조건을 줄줄 설명해 내려가는 동안 나는 부모님께 매달 보내드리는 용돈을 어떤 핑계로든 줄여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1시간쯤 지나 나는 반지하 원룸 월세에 두배가 넘는 할부금 자동이체와 각종 서류들에 싸인을 마치고 딜러와 악수를 하고 매장을 나섰다. 벌써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시간이었지만 아직까지 소개팅녀는 답장이 없다.

 집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타려다가 이미 선수금과 첫 달 할부 금액에 3달치 생활비를 써버리기도 했고 아직 내 카톡을 확인하지 않은 소개팅녀의 답장도 기다릴 겸 1시간 거리를 걸어가기로 한다. 기껏 가장 비싼 명품 재킷을 입고 나왔는데 한참 걷다 보니 땀이 나기 시작한다. 등이 조금씩 땀에 젖는 것 같지만 한껏 치장하고 나온 사람들로 가득한 주말 낮 청담동 거리에서 속에 입은 유니클로 티셔츠를 보이고 싶진 않아 재킷은 벗지 않기로 한다. 집에 거의 다다를 때쯤 소개팅녀가 카톡을 확인한 듯 ‘1’ 표시가 없어져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답장이 올 때까지 동네를 좀 더 걷기로 한다.

 그렇게 1시간 반을 더 걷고 나자 재킷 등이 젖어버려 반지하 집으로 들아가기로 한다. 겨우 집에 도착해서 현관문을 여니 집안에는 비릿한 쇠 냄새가 습한 공기 속에 가득하다. 얼른 반쪽짜리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려는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나마 밖에 있는 동안 비가 오지 않은 덕분에 재킷이 젖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창문을 닫는데 허기가 올라옴을 느낀다. 라면을 끓여야겠다고 생각해보니 간밤에 미리 해놓지 않은 설거지 때문에 쓸 수 있는 냄비가 없었다. 혹시나 해서 싱크대 수도꼭지를 열어보니 아침보다는 덜 하지만 한눈에 봐도 옅은 녹물이 새어 나왔고 나는 체념한 듯 녹물로 설거지를 시작한다. 냉장고를 열어 라면 끓일 생수를 찾아보지만 이미 떨어진 지 며칠이나 됐다는 게 떠올랐다. 고개를 돌려 핸드폰을 보는데 여전히 소개팅녀는 9시간째 답장이 없다. 나는 그냥 라면을 끓이기로 하고 주황빛 물로 대충 씻어낸 냄비에 다시 주황빛 물을 담기 시작한다. 밖에서는 제법 거세진 빗방울이 지면과 맞닿아 있는 내 방 창문을 두드리고 그 좁은 집안은 비릿한 쇠 냄새로 가득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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