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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덕화 Apr 16. 2020

옷의 시간

초단편소설

취급상 주의사항

 내 안감 깊은 곳에 자리한 새하얀 택에는 많은 유의사항이 적혀있는데 그중 ‘드라이클리닝 only’ 마크는 고급진 태생을 말해준다. 면이나 폴리에스터 같이 흔한 재질로 만들어진 다른 애들과는 달리 나는 오직 캐시미어 100%로 이루어져 있다. 코트계에서는 울로 만들어진 아이들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데 그건 안타깝게도 쇼핑을 하는 데 있어서 지갑 사정과 타협하는 주인들이 많기 때문이다. 무릇 패션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트랜드를 앞서 나가는 품위 있는 패션리더들만이 캐시미어 코트의 진가를 알아본다. 나의 우아한 캐시미어 100% 원단은 주인의 몸에 최상의 포근함을 선사하며, 따뜻하지만 하늘하늘 떨어지는 핏은 두터운 울코트 녀석들과는 비교를 거부한다.

 나는 꽤나 유명한 디자이너 브랜드에서 18ss 시즌에 야심 차게 태어났다. 나는 시즌 메인 제품이기도 했고 한 단계 성장하고자 하는 디자이너의 욕심까지 담겨 기존의 코트보다 꽤나 높은 가격으로 책정되었다. 부담스러운 가격이긴 했지만 당시 라이징 스타로 떠오르는 브랜드에서 시즌 메인 제품으로 걸었던 코트였던 만큼 나는 ‘론칭 당일 솔드아웃’이라는 타이틀을 차지할 기대를 품은 채 대망의 론칭 날짜를 손꼽으며 기다렸다.

 불티나게 주인을 찾아 떠날 거라고 생각했던 바람과는 달리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 겉감과 안감을 만지작거리기만 할 뿐 아무도 날 입어보지도 않은 채 매장을 떠났다. 하늘하늘하게 떨어지는 핏의 우아한 캐시미어 코트에 거추장스러운 후드가 달려있다는 이유였다. 그 해 내가 태어난 브랜드의 위상은 곤두박질쳤다. 하입비스트에선 어머니*의 추락에 대한 기사를 내면서 나를 해당 기사의 타이틀 사진으로 걸었다. 마치 내가 끝없는 추락의 원인이라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10%, 20%, 30% off 딱지를 바꿔달다가 결국 반년이 지나서 불명예스러운 역시즌 세일 품목에 이름을 올렸다. 역시즌 세일이라는 것은 옷의 세계에서 시즌오프 세일보다도 한 단계 더 치욕스러운 일이다. 나는 그 계절 내내 매캐한 냄새가 가득한 창고에서 평생 아무도 나를 찾지 않을 것만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날 덮고 있는 비닐덮개에 정전기를 만들며 점점 더 찰싹 달라붙어갔다.

 -

 

 현재 내 주인은 1년 전 여름에 나를 구입했다. 주인이 나를 장바구니에 담으면서 ‘나는 유행을 거스르는 사람이야’라고 중얼거렸다는 얘기를 주인이 매일 신는 슬리퍼에게서 나중에서야 들었다. 주인이 나를 배송받아보기까지는 3일이 걸렸는데 배송 중에 친해진 같은 박스 안의 다른 녀석들은 제각각의 사연이 있었다. 그중 네온색 후드티는 내 바로 밑에 자리한 관계로 가장 많은 얘기를 나누었는데 배송 도착 예정일 즈음엔 꽤나 친해져서 우리 둘을 같이 코디할 경우 더블 후드*가 되는데 그런 것도 소화해주는 주인이었으면 좋겠다는 농담을 하며 주인집 문 앞에 도착했다.

 나를 배송받은 주인은 들뜬 표정으로 같이 주문한 8개의 역시즌 세일 제품 중에 나를 가장 먼저 입어보았다. 박스 가장 위쪽에 자리를 잡은 것도 아닌데 중간에 끼어있는 나를 가장 먼저 입어본 것은 나에겐 매우 큰 의미였다. 아직 한여름인 관계로 주인은 곧장 나를 옷장에 걸어두었지만 혹여나 내 제봉선이 틀어질까, 어깨에 이상한 주름이 잡힐까 걱정해서인지 넓고 단단한 나무로 된 고급 옷걸이에 정성스레 비닐덮개까지 덮어서 나를 옷장 속에 걸어주었다.

 여름이 지나고 서늘한 바람이 옷장 속으로도 스며들 즈음에 어마 무시한 소식이 들려왔다. 개인적인 신변의 변화였는지 새로 생긴 애인의 취향 때문인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개성 있는 옷을 좋아하던 주인이 평범한 옷들을 사모으기 시작했다. 무채색 칼라의 개성 없는 옷들이 옷장 속으로 이사 오기 시작했다.


 기다리던 11월 중순이 되었지만 주인은 아직 나를 한 번도 꺼내보지 않았다. 옆 칸의 평범한 트랜치 코트는 9월 말부터 벌써 30번이 넘게 옷장 밖을 들락날락했지만 나의 비닐덮개는 계속 덮어둔 채였다. 같이 이 집에 온 8개의 옷들 대부분이 같은 신세였다. 네온색 후드티 녀석은 주인이 고심 끝에 입고 나갔다가 1층 로비에서 주인이 발을 돌려 집으로 돌아와 평범한 회색 후드티로 갈아입고 나가버렸다. 그리고 제대로 개어지지도 않은 채 소파 위에 널브러져 있은지 벌써 1주일째다. 주인의 몸을 휘감고 거리를 누빌 상상으로 가득했던 가을이 왔는데 되려 의변의 위협을 느껴야 할 정도로 서늘한 기운이 옷장 속을 맴돌고 있었다.

 언제 버려질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가을, 겨울을 보내고 나는 다행히 해를 넘겨 여름을 맞이했다. 나와 몇몇 개성 있는 옷들은 올해는 주인의 마음이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며 매일 조금이라도 습기를 내뿜으며 멀끔한 상태로 여름을 보내려고 애썼다. 그러던 어느 주말 아침, 선선함이 집안 곳곳을 감싸고 곰팡이들도 자연스레 도망치는 초가을 무렵 주인이 옷장 문을 열었다. 주인은 나를 옷장에서 꺼내어 정성스레 비닐덮개를 벗겨냈다. 1년 전 주인이 날 처음 입어본 날 이후로 비닐덮개를 떼어낸 건 처음이었다. 습기를 먹지 않지 위해 온 힘을 다해 애쓴 탓에 주인이 나를 만질 때마다 내 겉감에서는 바스락 거리는 기분 좋은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주인이 나를 입고 나설 때가 온 것이구나 하는 찰나, 나는 시커먼 박스 안에 내동댕이 쳐졌다. 길에서 주워온 듯한 상태의 박스 안에는 네온색 후드티 녀석도 이미 구겨진 채 널브러져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이대로라면 금방 주름이 잡혀버리고 말 꺼야.” 나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박스 안에 널브러진 네온색 후드티는 이미 생명을 잃은 듯 특유의 형광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공포에 질려 내가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기부로 운영되는 상점이었다. 주인은 결국 개성을 버리고 나와 같은 귀중한 옷들을 버려버리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곳에서 나와 다른 친구들은 옷의 종류와 값어치는 무시된 채 단지 몇‘벌’이라는 취급을 받았다. 심지어 유니클로 반팔티와 같은 취급을 받았다는 게 너무 화가 치밀었지만 그런 것을 따지고 있을 정신은 없었다.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누구 아는 옷 있어?” 내 말에 대답하는 옷들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잔뜩 구겨진 채 겁에 질려 경기를 일으키거나 이미 특유의 색과 촉감을 잃은 채 죽음을 맞이한 상태였다. 어떤 운명을 맞이할지 모른 채 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푸른색 박스에서 분류작업이라는 것을 받기 위해 무한정 대기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다행히도 나에게는 5만 원이라는 가격이 책정되고 가게에 진열되게 되었다. 비록 가느다란 철사 옷걸이에 걸려 어깨선이 틀어지긴 했지만 목이 늘어나거나 곰팡이가 생겼단 이유로 가게에 진열되지 못하고 쓰레기장으로 가버린 옷들을 생각하면 천만다행이었다. 가게에 진열되고 나서 주변 옷들에게 듣기로 그 정도 가격이면 이 가게에서 가장 비싼 취급을 받은 것이니 뿌듯해해도 된다고 했다. 세상에 태어난 지 2년 이상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아무에게도 입혀져 본 적이 없었기에 사실 이제 와서 가격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젠 그저 재봉선이 더 망가져버리기 전에 누군가 나를 알아봐 주고 입어주기만 바랄 뿐이었다. -


 나의 새로운 주인은 나를 4만 원에 구입했다. 기부 상점에서 흥정하는 사람은 처음이라며 가게 주인이 손사래를 쳤지만 나의 새로운 주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내 후드를 가리키며 코트에 무슨 모자가 달렸냐며 이런 못생긴 옷은 5만 원이나 줄 수 없다며 결국 나를 4만 원에 샀다. 그래도 누군가 나를 입기 위해 사주었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끼며 새로운 주인의 집으로 향하던 중에 묵직한 빗방울이 툭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종이가방 안쪽에 자리 잡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그 순간 나의 새로운 주인은 손을 깊숙이 집어넣어서 나를 꺼내 들었다. 설마 하는 순간 주인은 캐시미어 100%인 나를 빗속에서 입어버렸다. 후드득 하는 거센 빗소리에 나의 어깨와 후드는 젖기 시작했고 점점 정신이 혼미해져 갔다. 빨리 집에 도착해서 조심스럽게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제거하지 않으면 빗물에 흠뻑 젖어 수축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본래의 핏을 잃는다면 옷의 생명은 다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애타는 내 마음도 모른 채 주인은 느긋하게 볼일을 다 보고 흠뻑 젖은 상태로 집에 도착했다. 다행히 거실 의자에 마른 수건이 걸려있다. 지금이라도 나를 잘 닦아내기만 한다면 어떻게든 큰 수축은 막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직은 재봉선이 틀어지거나 할 정도의 위험은 아닐지도 모른다. ‘휙’ 새 주인은 나를 벗어서 물기도 닦지 않은 채 드럼세탁기에 집어넣어 버렸다. 아무 생각이 없는 듯한 그는 내 안감에 자리 잡은 취급상 유의사항은 읽어보지도 않은 채 섬유유연제와 일반세제를 넣고 표준코스로 세탁기를 가동했다. 뜨거운 물이 들어차기 시작하면서 정신이 혼미해져 간다. 이렇게 내 짧은 의생은 한 번의 외출로 끝을 맞이하게 된다. 나한테 후드가 없었으면 내 의생은 좀 달랐을까 하고 생각하며 마지막 숨을 내쉬며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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