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가을, 첫 번째 봄 #38

by 데어릿

대서가 지나고 입추가 지나도 여름의 더위는 여전히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햇볕은 여전히 뜨거웠고 사람들의 옷차림은 가벼웠으며 에어컨 없이는 잠을 잘 수 없는 날씨가 이어졌다.

다정은 새로운 회사에 출근해 열심히 적응 중이었다. 처음 출근하는 날 그동안 너무 잘 쉬었던 탓인지 지독하게도 출근하기 싫었지만 막상 출근하니 새로운 회사 시스템과 새로운 사람들의 얼굴을 익히느라 일하기 싫다는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출판사 답게 전에 다니던 회사와 비슷하게 조용한 것 자체는 나쁘지 않았으나 너무 조용하다 보니 가끔 뜬금 없는 얘기로 분위기를 풀어주던 한 대리님이 조금은 그리웠다.


“자, 다들 점심 먹고 합시다.”

“네, 식사 맛있게 하세요.”

“한 주임 오늘 뭐 먹을 거야?”

“아, 저 간단하게 먹고 산책이나 다녀오려구요.”

“이 더운데 참 열정이야. 그래 맛있게 먹어요.”

“네, 부장님도 맛있게 드세요.”


다정은 이번 회사로 이직을 하면서 주임 직급을 받았다. 이전 회사에서의 경력을 어느 정도 인정해 준 것이다. 연봉도 전에 다니던 회사보다 조금이지만 더 받을 수 있었다. 아직 출근한 지 며칠 되지는 않았지만 전체적인 면에서 이직을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정은 편의점에서 김밥 한 줄을 사서 대충 먹고 근처에 산책을 나왔다. 이 근처에 일하는 직장인들 몇몇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대화를 나누며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다정은 이어폰을 끼고 사람들을 피해 다니며 주변 풍경을 눈에 담았다. 그러다 근처에 카페가 보여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했다. 아마 아까 그 직장인들도 여기서 사먹은 듯했다. 커피는 금세 나왔고 다정은 근처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승태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이고오 우리 한 주임님!”

“뭐야. 그만 놀려. 밥 먹었어?”

“나는 먹었지. 밥 먹었어?”

“응.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김밥 먹구 산책 나왔어.”

“밖에 안 더워? 오늘 진짜 덥던데…”

“괜찮아. 나 너만큼 더위 많이 안 타잖아.”

“그렇긴 하지. 요즘도 회사 사람들이랑 같이 밥 안 먹어?”

“응. 그냥 나 혼자 먹는 게 편해. 너랑 이렇게 전화도 할 수 있고.”

“그거 하나는 좋네. 나 근데 이제 들어가 봐야 해.”

“응. 이따 집에서 봐.”

“그랭! 이따 봐.”


승태는 애교 섞인 말투로 전화를 끊었다. 다정도 슬슬 들어가 봐야겠다 싶어 커피를 챙겨 들고 일어났다. 나무 사이로 바람이 기분 좋게 불었다.

회사에 돌아와서 일 하는 동안에도 중간에 여유가 있을 때마다 승태와 연락을 주고 받았다. 오늘 저녁은 뭘 먹을지, 회사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같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눴다. 이전 회사를 퇴사하고 지금의 회사에 다시 취업하기까지 그 사이에 있었던 많은 일들을 추억으로 남기고 이제야 일상으로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정은 이런 일상적인 느낌에서 오는 편안함이 좋았다. 몸도 마음도 여유가 있는 이런 상태가 계속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승태! 내가 쓰레기 문 앞에 두지 말랬지!”


다정이 퇴근을 하고 집에 왔는데 쓰레기가 현관문 앞에 놓여 있었다. 잔소리를 하면서 들어가니 화장실 안에서 승태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만! 나 화장실 청소 중이야!”

“아유 정말. 쓰레기 버려 놓구 청소해도 되잖아.”

“청소하고 바로 버릴랬지. 미안미안. 거기다 둬.”

“이따 바로 버려야 해! 밥 아직 안 시켰지?”

“응. 밥만 시켜줘.”


승태는 같이 살게 된 이후로 저렇게 청소를 열심히 한다. 전에 혼자 살 때는 이렇게까지 열심히 청소 안 했던 것 같은데. 언젠가 승태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같이 산다고 생각하니까 뭔가 더 깔끔하게 살고 싶어서라고 했다. 그 마음이 예쁘고 기특해서 밥 준비나 설거지 같은 건 다정이 하는 편이다. 초반에는 청소도 설거지도 조금씩 나눠서 하거나 번갈아가면서 했지만 한 사람이 한 가지 일을 전담해서 하니까 더 깔끔하게 되는 편인 것 같았다. 물론 가끔 하기 싫은 날도 있지만 그런 날은 서로 합의하에 둘 다 아무 것도 안하고 말 그대로 푹 쉬었다. 그런 점은 확실히 승태와 오랫동안 친구였기에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족발에 술을 마시며 늘 그랬던 것처럼 시덥잖은 얘기를 나눴다. 승태는 요즘 새로운 게임에 관심이 생긴 것 같았다. 자기가 보통 스토리를 보며 게임을 하는 편이 아닌데 이 게임은 스토리가 너무 재밌다며 다정도 꼭 해보라며 적극적으로 권했다. 다정도 게임을 즐기는 편이긴 했지만 예전부터 승태와 서로 즐기는 장르가 달라 같이 하는 게임이 겹쳤던 적은 없었는데 이번 만큼은 왠지 승태와 같이 해보고 싶어졌다. 이것도 같이 살면서 생긴 변화점일까 싶었다.

그 뒤로도 서로 발견한 재밌는 영상을 보내주기도 하고 후식도 먹으며 쉬었다. 승태에게 기대 누워 있는데 요즘 문득 살이 좀 찐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승태에게 물어봤다.


“이제 알았어? 요즘 그렇게 잘 먹고 다니더니.”

“뭐? 진짜로? 나 쪘어?”

“농담이야. 안 쪘어. 네가 제일 이뻐.”

“왜 나는 네 말이 찌긴 쪘는데 그래도 이쁘다는 말로 들릴까 승태야?”

“에이 그럴 리가. 아! 잠깐만!”


다정이 승태의 허벅지를 살짝 꼬집었을 뿐인데 승태가 호들갑을 떨었다. 쟤한테 물어본 내가 바보지 어휴. 승태가 놀린 것에 대한 복수로 당분간은 저녁에 샐러드만 먹여야겠다고 다정은 생각했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단순히 기분이 좋다기 보단 즐겁고 행복하다고 하는 게 맞겠다. 승태와 이렇게 함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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