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가을, 첫 번째 봄 #Fin

by 데어릿

처서가 다시 돌아왔다. 작년 이 시기 쯤에는 그래도 아침에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었는데 올해 여름이 유난히 더웠던 탓인지 아침, 저녁으로도 계속 더운 날씨가 계속되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작년보다 이상하게 해가 더 길어진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그래도 이 시기에 볼 수 있는 예쁜 구름만큼은 변함 없이 하늘 가득 걸려있었다.

토요일 아침 승태 혼자 남겨진 집안은 휑한 기운이 감돌았다. 다정이 집에 친척들이 온다며 어제 저녁에 본가에 가서 자고 온다고 해서 승태는 오랜만에 이 집에서 혼자 잠을 잤다. 부스스해진 머리카락을 머리로 대충 누르고 화장실을 다녀와서 라면으로 아침을 대충 떼웠다. 그 후 유튜브를 보며 커피를 한잔 마시고 설거지를 한 뒤 다시 침대에 누웠다.

누워서도 계속 유튜브 영상을 봤지만 눈에는 잘 들어오지 않았다. 매일 비슷한 영상을 보다 보니 조금은 지겨웠다. 승태는 잠시 누워 있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다정이 집에 왔을 때 깨끗한 집이면 기분이 좋을 것 같아 청소를 시작했다. 청소라고 해봤자 간단하게 구석에 쌓여 있는 먼지를 제거한다던지, 바닥에 걸레질을 한번 하는 정도지만 잔잔한 재즈를 틀어 놓고 여유롭게 청소를 하니 시간은 확실히 잘 가는 느낌이었다.

청소를 하다가 문득 언제 이렇게 다정의 물건들이 집을 가득 채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에도, 거실에도, 욕실에도, 부엌에도 집안 곳곳에 다정의 흔적이 없는 곳이 없었다. 불과 1년도 되지 않아서 생긴 많은 변화에 적응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지만 이런 순간들은 확실히 아직도 새삼스럽다. 승태는 다정의 물건들을 조심스럽게 닦으며 빨리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사이 다정에게 사진이 한 장 도착했다. 엄마가 차려준 반찬 양이 너무 많아서 배가 터질 지경이라고 했다. 사진 속 식탁에는 고기와 나물, 전 등 거의 명절을 방불케 하는 갖가지 반찬들이 놓여져 있었다. 어머니의 음식 솜씨라면 저 반찬들이 진짜 맛있을 것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 승태는 다정이 너무나 부러웠다. 모처럼이니 맛있게 먹으라는 답장을 보내고 승태는 청소를 마무리했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우니 뽀송한 이불이 온몸을 감쌌다. 이불에 거의 파묻히다시피 덮었는데 아직 다정의 향기가 이불에 약간 남아있는 듯해서 기분이 좋아졌다. 그 상태로 승태는 유튜브를 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그새 잠이 들었다.

꿈에 다정과 혁준, 서연이 나왔다. 함께 대학교 캠퍼스를 누비던 시절의 꿈이었다. 그 꿈에서 자신이 다정과 사귀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승태뿐이었다. 승태는 현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정을 대했다. 오늘 따라 왜 저러냐는 혁준과 서연의 몸서리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정작 다정은 승태가 그러는 게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어쩌면 우리의 지금 이 미래는 그때 이미 정해져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잠에서 깼다.

깨고 나서 스마트폰을 확인해 보니 다정에게 한 장의 사진이 더 와 있었다. 비몽사몽한 눈으로 사진을 봤는데 해가 구름 뒤로 서서히 지며 예쁜 노을을 만들어 내고 있는 사진이었다. 오늘 하늘 진짜 예쁘다며 다정이 보내온 사진은 말 그대로 진짜 예뻤다. 작년 이맘 때는 내가 이렇게 사진을 보내줬었는데. 확실히 우리는 많이 닮았나 보다 하고 승태는 생각했다. 그때 도어락 누르는 소리가 들리며 다정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 왔어!”

“일찍 왔네? 내일 오는 거 아니었어?”

“응. 원래 그러려고 했는데 그냥 일찍 왔어.”

“오랜만에 친척들 만나는 거 아냐?”

“맞지. 근데 네가 보고 싶잖아.”


다정은 두 손 가득 가져온 짐을 식탁에 내려두고 승태에게 가서 안겼다. 승태도 다정을 꼬옥 안아줬다. 이불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다정의 향이 진짜 다정이 오니 아주 진하게 승태에게 흘러들어 왔다. 하루 종일 뭔가 영혼이 반쯤 나가 있다가 다시 돌아온 느낌이었다.


“아이구, 우리 다정이 그렇게 내가 보고 싶었어?”

“아닌데! 헤헤.”

“뭐야. 이럴 땐 좀 그렇다 해주면 안되냐?”

“그냥 놀리고 싶잖아.”


다정은 승태를 올려다보며 환하게 웃었다. 잠시 그렇게 안고 있다가 다정은 엄마가 반찬을 잔뜩 싸줬다며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다. 승태는 너무 신나서 팔짝팔짝 뛰었고 다정은 종이 가방 안에서 반찬을 꺼내 접시에 소분해 담아줬다. 아까 사진으로만 봤던 반찬들이 조금씩 모두 승태네 식탁으로 옮겨졌다. 고기도 다정이 꺼내서 직접 구워줬다. 승태는 그 사이 밥을 데우고 냉장고에서 술을 꺼냈다.


“나중에 친척들이 너 한번 데리고 오래.”

“친척 분들이? 가서 내 얘기 했어?”

“나보다 우리 엄마랑 아빠가 더 많이 했어. 다정이가 남자친구가 생겼는데 애가 착하고 어떻고 저떻고 하면서 나보다 더 신나하더라니까?”

“진짜? 너무 감사한데 한편으로는 너무 웃기다.”


다정의 얘기에 승태는 평소보다 더 크게 웃으며 함께 저녁 식사 겸 반주를 했다. 분명 아침까지만 해도 있었던 공허함이 단숨에 사라졌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게 이렇게 큰 행복이라는 걸 알게 된 게 너무 좋았고 그 행복을 자신에게 알려준 게 다름 아닌 다정이라는 게 더없이 좋았다.


“아 맞다. 나 아까 낮잠 자다가 꿈을 꿨는데…”

“응? 무슨 꿈?”

“우리 대학 다닐 때 꿈이었어. 근데 거기서 나만 우리가 이렇게 사귀게 될 걸 알고 있었거든. 그래서 나는 그냥 지금 평소 하는 것처럼 대했다? 근데 혁준이랑 서연이는 왜 저러냐면서 징그러워하는데 너는 되게 자연스럽게 받더라?”

“오호, 그랬어?”

“응. 너 솔직히 말해봐. 대학 때부터 나 좋아했지?”

“아이고 박승태! 너 아직 꿈 속이야? 정신 차리시죠?”

“왜? 아니야? 너무 자연스러웠는데.”

“아휴 뭐래. 술이나 마셔.”


다정은 잔을 들어 승태의 잔에 부딪혔다. 강하게 부정하고 있는 다정이지만 승태는 그 동안 다정과 함께 했던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다정은 승태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다는 걸.


“후… 배부르다. 어머니한테 너무 맛있었다고 꼭 말해줘.”

“그냥 전화를 하면 되잖아.”


다정이 갑자기 스마트폰을 들더니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배가 불러서 잠깐 넋을 놓고 있던 승태는 갑자기 전화를 하는 다정 덕에 당황하며 스마트폰을 받아 들었다.


“여보세요?”

“어머니 저 승태에요.”

“어머 우리 승태! 어쩐 일이야?”

“아, 반찬 너무 맛있게 잘 먹었다고 말씀드리려고 전화했어요.”

“어머 정말? 봐봐 얘가 이렇게 착하다니까. 그래 그래 너네 맛있게 먹었으면 됐다. 다음에 또 놀러와.”

“네, 어머니. 다음에 꼭 놀러 갈게요!”


어머니는 친척들과 아직 한창 대화 중이신지 황급히 전화를 끊으셨다. 그 모습을 본 다정은 키득거리며 놀려댔다. 승태는 그런 다정의 볼을 살짝 찌르고는 다 먹은 그릇들을 설거지했다.

설거지를 마친 승태는 쇼파에 앉아 있는 다정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다정은 스마트폰을 보다가 승태가 와서 눕자 왜 이렇게 어리광쟁이가 됐냐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승태는 말없이 다정의 손길을 느꼈다. 다정의 온기가 승태의 이마를 타고 들어왔다. 더 없이 행복한 이 순간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우리 계속 이렇게 살 수 있을까?”

“갑자기 뭔 소리야?”

“그냥. 지금 너무 좋아서.”


다정은 스마트폰을 내려 놓고 잠시 승태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고 잠시 뒤 환하게 미소 지으며 승태의 입술에 뽀뽀를 해주었다.


“그럼, 당연하지. 내가 너 아니면 누구랑 살아.”


그 말을 들은 승태는 일어나 다정을 쇼파에 그대로 눕히고는 부드럽게 키스를 했다. 누구보다 친했던 우리가 더 없이 행복한 이 순간에 도착하기까지 거의 9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지만 지금 이 키스와 앞으로의 행복 모두 그 시간보다 훨씬 더 오래 지속될 것이라는 걸 그 순간의 승태는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아니, 조금 더 욕심을 부려도 되겠다. 그냥 이런 일상이 영원히 계속될 거라고 그냥 확정을 지어버리자. 그래, 우리라면 분명 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다정은 티 하나 묻지 않은 환한 얼굴로 승태를 마주 보았다. 나도 너랑 같은 생각이라는 표정으로.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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