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히 해가 점점 지고 있었지만 벌레는 방충망에만 붙어 있을 뿐 안으로 들어오는 벌레는 극소수였다. 아마 향냄새 덕분에 조금이나마 벌레 손님들이 많이 찾아오지는 않은 듯했다. 연기는 바베큐장 천장에 닿았다가 방충망을 타고 그대로 흘러나갔다. 야외에서 바베큐를 하기에 이보다 완벽한 조건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좋았다.
고기를 웬만큼 굽고 나서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집에서 소주잔을 챙겨올까 고민도 했었지만 승태가 낭만이 없다며 잔뜩 챙겨온 종이컵 소주잔에 술을 따랐다. 종이컵 안에 살얼음이 조명에 반사되어 반짝거리고 있었다.
“짠 하자! 다정아 이직 축하해!”
“짠! 고마워!”
다정과 승태는 술잔을 부딪히고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소주의 쓴맛이 혀에 닿자마자 소고기를 먹으니 기름기가 쓴맛을 훔쳐가 주었다. 정말 맛있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최고의 맛이었다.
고기가 어느 정도 줄어들 때쯤 다정은 승태의 옆에 앉아서 소시지와 새우를 구웠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새우는 감칠맛이 일품이었고 다양한 맛이 나는 소시지도 그 풍미가 상당했다. 다 익은 새우는 장갑을 끼고 있던 승태가 까주었는데 뜨겁다고 호들갑 떠는 모습이 너무 웃겼다. 그래도 승태가 정성스럽게 까준 새우는 깔끔했고 접시에 초장을 살짝 덜어 찍어 먹으니 너무 맛있었다.
“승태야 이거 먹어봐. 와 고기보다 맛있는데?”
“보자. 와 진짜 미쳤어. 고기 말고 새우를 더 사올 걸 그랬나?”
“그니까. 진짜 너무 맛있어.”
고기에 더해 새우와 소세지까지 구우니 술이 술술 넘어가 어느새 두 병이 비워졌다. 야외에서 먹어서 그런지 이상하게 평소보다 덜 취하는 기분이라 더 빨리 마신 것 같았다. 술을 넉넉하게 사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비해온 안주를 거의다 먹어갈 때쯤 해는 거의 다 넘어가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잠시 마시던 술을 멈추고 나란히 앉아 남아 있는 숯불의 열기에 마시멜로를 구워 먹었다. 승태가 마시멜로를 구울 때마다 몇 번이고 태워 먹을 뻔해서 다정이 젓가락으로 천천히 돌려가며 노릇하게 구워 주웠다. 승태는 고기 굽느라 지쳤는지, 아니면 술기운이 올라오는지 다정의 어깨에 기대 마시멜로를 호호 불어 조금씩 떼 먹었다. 입 안 가득 단맛이 퍼지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오길 잘했다. 그치?”
“응. 하루 종일 진짜 그 생각 밖에 안 들어.”
“아 맞다. 우리 그것도 챙겨 왔잖아. 불멍 가루.”
“맞지! 내가 가루 가져올게. 사장님한테 준비해달라구 해줘.”
“응. 다녀올게.”
승태가 사장님께 장작을 준비해 달라고 말씀드리러 갔고 다정은 그 사이에 먹은 것들을 조금 치워두었다. 아직 소세지가 남아 있어 이따 방에 들어가서 먹으면 되겠다 싶어 챙겨 놓고 나머지는 분리해둔 후 방에서 불멍 가루를 가져왔다. 사장님은 장작 한 무더기를 가져다 주셨다. 우리가 고기를 구워 먹었던 화로를 한번 싹 비워주시고는 그 위에 장작을 올려 불을 피워주셨다. 빨간 불길 위에 가루를 뿌려 주니 불꽃이 여러 색으로 빛나며 타올랐다. 이번엔 다정 승태 옆에 붙어 앉아 어깨를 기댔다. 승태는 그런 다정을 잠시 동안 지긋이 바라보다가 팔짱을 끼고 타오르는 불꽃을 멍하니 바라봤다.
“작년만 해도 우리가 이러고 있을 거라는 걸 상상도 못했었는데.”
“그치. 너가 그때 술 먹고 ‘너 나 좋아하지!’라고 안 했으면 우리도 아직 혁준이랑 서연이처럼 티격대고 있었을걸?”
“아 그 얘기를 갑자기 왜 해 멍충아!”
“왜 귀엽잖아.”
다정은 승태의 어깨를 팍 하고 때렸고 승태는 아파하면서도 다정을 보고 해맑게 웃었다. 그런 승태가 얄미웠는지 다정은 몇 대 더 때려줄 심산이었지만 승태가 다정의 손을 잡고 팔짱을 끼며 기대는 바람에 저지되었다. 불이 예뻐서 봐준다는 다정의 말에 승태는 헤헤 웃었고 그렇게 잠시 동안 다정과 승태는 말 없이 서로에게 기대 있었다.
가루가 모두 타고 다시 붉게 돌아온 불꽃으로 되돌아 왔을 때 승태는 냉장고에서 술 한 병을 더 꺼내왔다. 장작이 타닥타닥 타들어가는 소리를 소스 삼아 아까 남겨둔 소세지를 안주로 해 다정과 승태는 술을 한 병 더 마셨다. 술기운이 기분 좋게 온몸에 퍼졌고 밤은 더 깊어가고 있었다.
“그동안 별에 별일이 많았다 싶으면서도 별일 없이 잘 지나갔던 것 같기도 해.”
“음… 그런가? 별일 있을 게 있나?”
“있지. 너랑 연애를 하게 됐잖아. 지금은 같이 살고 있기도 하구.”
“그거야 그렇지만…”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우리가 이렇게 함께하고 있다는 거 자체가 별일이 아닌가 싶어.”
“뭐야 박승태 취했어? 오늘따라 감성적이네.”
“분위기 깨지마 바보야.”
승태가 잔을 들어 보이자 다정은 잔을 부딪혀줬다. 그동안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이 잔 부딪힘은 계속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연인이기 이전에 친구인 우리는 앞으로도 때로는 이렇게 잔잔하게, 때로는 즐겁게 함께 할 것이다.
불이 거의 사그라들었을 때 화로에 뚜껑을 덮어두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여름에 땀을 흘리며 불을 피우느라 찝찝했던 승태는 먼저 씻겠다고 했고 다정은 승태가 씻는 사이 마른 안주와 남은 술 두 병을 꺼내 왔다. 씻고 나온 승태는 이어서 다정이 씻는 사이 외부등을 끄고 잔잔한 재즈를 틀어둔 뒤 위층에 올라갔다 왔다.
“2층에는 왜 갔어?”
씻고 나온 다정이 머리를 털며 승태에게 물었다.
“다 씻었어? 짐 정리해놓구 에어컨 온도 좀 조절해 놓는다구.”
“하긴 이따 잘 때 너무 더우면 안되니까.”
“응. 와서 마저 먹자.”
승태가 마른 안주를 가위로 먹기 좋게 잘라주었고 다정은 승태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중간에 샤워를 한 덕인지 조금은 술이 깬 다정이 다시 아까와 같은 템포와 텐션으로 술을 먹기 시작했다.
“그래서 혁준이랑 서연이는 언제부터 사귄대?”
“글쎄? 혁준이가 어떻게 하는지에 달려있지 않을까? 그 이후로 서연이한테 연락 없었어?”
“음 특별한 건? 그냥 다음날 잘 일어났다는 연락만 왔었어.”
“나도 혁준이한테 어떻게 됐냐고 물어보고 싶어서 근질거려 죽겠어.”
“에이 오지랖 부리지 말래두. 알아서들 잘 하겠지.”
“그래 뭐. 아, 그때 이후로 한 대리님한테는 연락 없어?”
“응. 안 그래도 이직했다고 연락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중이야.”
“음… 김 주임님, 아니지 대리님도 그 이후로는 딱히 나한테 뭐라 안 하더라.”
“그 둘이 서로 관심 있는 게 진짜 의외였어.”
“한 대리님이 그 여우한테 물리지 않아야 할텐데…”
다정은 승태가 김 대리를 여우라고 얘기할 때마다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 이후에도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술을 마시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병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서 제가 준비한 이번 여행 소감은 어떠신가요?”
“너무 좋았어! 그리구 나도 준비하는 거 많이 도왔거든!”
“아잇 어쨌든. 너 이직 준비할 때 내가 신경 많이 못 써준 것 같아서 계속 마음에 걸렸거든. 마침 입사할 때까지 시간도 좀 여유 있고 해서 다행이었지 뭐.”
“그러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너랑 이렇게 여행도 오구.”
“그런 의미에서 내가 하나 더 준비한 게 있는데…”
“응?”
승태는 주머니에서 손바닥 만한 작은 선물 상자를 꺼내 다정에게 건넸다. 다정은 척 봐도 이게 뭔지 알 수 있었지만 괜히 승태에게 이게 뭐냐고 물어보며 상자를 열어보았다. 상자 안에는 다정이 끼고 있는 팔찌와 잘 어울리는 반지 한 쌍이 나란히 들어 있었다.
“뭐야… 이런 건 언제 준비했어…”
“너 합격했다고 했을 때 바로 준비하기 시작했어. 그리고 너 얼마 뒤면 생일이잖아.”
“아 맞네! 나 좀 있으면 생일이지! 우와 너무 정신 없어서 진짜 까먹고 있었어.”
“생일 축하해 다정아. 합격도 너무 축하해.”
승태는 상자에서 작은 반지를 꺼내 다정의 네 번째 약지에 끼워주었다. 반지 한 가운데 반짝이는 보석을 얇은 로즈골드 프레임이 감싸고 있는 예쁜 반지였다. 같은 디자인의 큰 반지는 다정이 승태에게 끼워주었다. 고맙다는 말을 하며 안기는 다정을 승태는 말없이 꼬옥 안아주었다.
마지막 잔을 비우고 다정과 승태는 잠시 밖으로 나왔다. 방충망에 붙어 있던 벌레들도 어느새 다 떨어져 있었고 주변은 칠흑 같은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 덕분에 맑은 밤하늘에 별이 잔뜩 빛나는 걸 볼 수 있었다. 승태는 다정의 손을 잡고 유난히 반짝이는 별들을 골라 북두칠성과 여름철 대표 별자리 등을 찾아주었다. 은하수까지 보이지는 않았지만 말로만 듣던 견우성과 직녀성이 보이는 것 자체가 너무 신기했다.
“우와. 나 이렇게 별 많은 거 진짜 처음 봐.”
“서울에서는 별이 잘 안 보이니까.”
“넌 어떻게 이런 걸 다 알아?”
“나 어릴 때 밤에 나와서 별 보는 게 취미였어.”
“오올 의외인데? 우리 승태 대단해!”
다정은 승태의 엉덩이를 토닥토닥 해주고는 다시 밤하늘을 보며 당장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별들을 감상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별빛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예뻤다. 슬쩍 승태를 보니 승태 역시 예쁜 밤하늘에 한눈이 팔린 듯 보였다. 다정은 그런 승태의 품에 살며시 파고들었고 승태는 그런 다정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주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먼저 뜬 다정은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빼 조몰락거렸다. 반지는 마치 다정에게 인사라도 하듯 창을 통해 들어온 아침 햇살에 반짝였다. 다정은 반지를 다시 손가락에 끼우고 아직 잠들어 있는 승태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뒤 일어나 어제 먹고 나서 대충 치워둔 쓰레기들을 꼼꼼히 치웠다. 바베큐장과 1층 거실을 청소하고 씻고 나왔는데도 승태는 아직 자고 있었다.
“승태야아 일어나. 밥먹구 나가야지.”
“으응… 언제 일어났어…?”
“한참 전에 일어났어. 언능 인나 언능.”
“하암… 뭐야… 벌써 씻었어?”
“밑에 다 치우고 씻고 왔어. 라면 먹자.”
“나 깨워서 같이 하지… 고생했네.”
승태가 다정을 끌어당겨 꼬옥 안아줬다. 다정에게서 은은하게 나는 샴푸향이 기분 좋았다.
“아잇 일어나라니까. 라면 내가 끓일게. 가서 씻고와.”
“응. 하암…”
승태는 하품을 하며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다정은 음악을 틀고 라면물을 받아 가스레인지에 올려 불을 켰다. 스프를 탈탈 털어 넣고 잠시 기다리니 라면 냄새가 퍼지기 시작했다. 면이 적당히 익었을 때쯤 승태가 다 씻고 나왔고 나란히 테이블에 앉아 라면으로 깔끔하게 해장을 했다. 은은하게 퍼지는 음악이 더해진 평화로운 아침 풍경이었다.
퇴실을 하고 다시 집까지 오는 데는 글램핑장에 왔을 때만큼 오래 걸리지 않았다. 차를 반납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다정은 짐을 풀기도 전에 침대에 누워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서 혼자 청소를 다했으니 피곤할 만했지. 다정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승태는 짐을 정리하고 다정의 옆에 나란히 누웠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