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태는 혁준의 말을 듣고 손을 씻다가 거울로 멍하니 혁준을 바라보았다. 혁준은 승태가 계속 쳐다만 보고 있자 약간 쑥쓰러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그 표정이 거울에 반사되어 승태의 눈에 고스란히 들어왔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뒤 승태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너네 그럴 줄 알았다니까!”
“아 좀 닥쳐. 서연이는 아직 몰라.”
“뭐야? 뭔데? 대체 언제부터야?”
“몰라 임마. 얼마 안됐어. 걔 남친 생겼을 때부터?”
“그래? 근데 진짜 너무 갑자기 그러네.”
“너네도 갑자기 그랬잖아.”
“아 그랬지 참.”
“뭐 아무튼. 그렇게 됐는데 도대체 어떻게 마음을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혁준은 머쓱해 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승태와 다정이 서로에 대한 마음이 갑자기 튀어 나온 것처럼 혁준과 서연도 그렇게 연인으로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승태의 머릿속을 잠시 스쳤다. 그러나 겉으로 봤을 때 서로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인 지금의 상황이 그러한 둘의 새로운 시작을 가로막고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혁준은 애들 기다리겠다며 먼저 자리로 돌아갔다. 승태도 뒤따라 가니 서연을 따라 술을 계속 마셨는지 다정 역시 얼굴이 조금 빨개져 있었다. 승태가 자리에 앉자마자 다정은 왜 이렇게 늦게 왔냐며 승태의 등을 퍽퍽 내리쳤다. 그런 다정에게 승태가 손등을 살짝 톡 하고 쳐서 둘의 투닥거림이 시작됐고 그 투닥거림은 다정의 젓가락 한짝을 떨어트리고 나서야 끝이 났다. 그 모습을 보던 서연은 오늘 헤어진 사람 앞에서 그렇게 애정행각 해도 되는 거냐며 울상을 지었다. 승태와 다정은 그런 서연의 눈치를 살짝 보며 다시 서연에게 집중했다. 그러자 서연이 다시 얘기를 이어갔다.
“생각보다 나랑 잘 맞는 사람이랑 연애한다는 게 진짜 힘든 일인 것 같아.”
“네가 생각하는 잘 맞는다는 게 뭔데?“
서연의 말에 혁준이 기다렸다는 듯이 이어서 질문을 했다.
“그냥 뭐 별 거 없잖아. 심심하면 같이 놀고, 말도 잘 통하고 뭐 그런 게 잘 맞는다는 거 아니야?”
“그렇긴 한데 그게 뭐 그렇게 어렵나?“
“그게 세상에서 제일 어려워 멍청아.”
“또 시비건다 또.”
늘 그래왔던 것처럼 혁준과 서연의 티격태격이 시작되는 듯했지만 적어도 승태는 알 수 있었다. 혁준이 나름대로는 서연에게 조금씩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아니, 정확하게는 이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을 수도 있었는데 알아차리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쪽이든 저 둘 사이에 뭔가가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승태는 다정도 혹시 알아봤을까 싶어 살짝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다정은 혁준과 서연이 서로 티격대는 걸 재밌어하기만 할 뿐 별 다른 낌새를 눈치채지는 못한 것 같았다.
“아휴 그래도 너네 만나니까 확실히 좀 낫다. 친구 좋다는 게 이런 건가봐.”
“그래 서연아 힘들면 언제든지 연락하구!”
“너는 맨날 박승태랑 붙어 있을 거 아냐.”
“아잇 그래두! 우리 서연이가 부르면 나는 당장 나오지!”
“으휴 그래그래. 야 혁준아 너도 이런 것 좀 해봐 나한테.”
“미쳤냐. 야 그래도 나 네가 불러서 안 나온적 없다?“
“있을걸? 네 성격이 그렇게 지랄맞은데 없을 리가 없어.”
“아 진짜 너 뒤진다 진짜로.”
서연은 혁준을 놀리면서 기분이 좋아진 듯 싱글벙글하며 잔에 술을 채웠다. 앞에서 다정이 자작해도 되는 거냐며 물으니 이미 잔뜩 상기된 서연은 어차피 남자친구랑 헤어진 마당에 그런 거 모르겠다며 잔을 가득 따랐다. 서연은 나머지 친구들의 잔에도 비슷한 양으로 가득 채워주었다.
“어휴 맨날 그렇게 싸우면 안 질려?”
“싸우다니 다정아. 우리 그냥 대화하는 거야.”
“그럼그럼. 우린 싸우면 큰일 나지. 가게 다 뒤집어 엎지.”
“뒤집어 엎긴 왜 엎어 멍청아.”
“말이 그렇다는 거지 어휴.”
“너네 그러다 정들겠다. 그냥 너네끼리 사귀는 게 어때.”
승태가 서연과 혁준의 티키타카를 보다가 혁준의 눈치를 보며 끼어들었다. 사귀는 게 어떻냐는 말을 하자마자 혁준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사색이 되었다가 다시 원래 표정으로 돌아왔다.
“아유 승태야 내가 오지랖 좀 그만 부리랬지!”
“아야! 근데 맞잖아. 서연이가 얘기했던 잘 맞는 사람 여깄잖아.”
“잘 맞지 진짜. 그러다가 너 서연이한테 잘 쳐 맞지.”
다정이 승태를 때리는 시늉을 하자 서연이 잘한다 잘한다 하며 다정을 응원했다. 혁준은 그런 서연과 다정을 말렸다. 그렇게 네 명은 먹고 마시며 즐겁게 놀았다.
기분 좋게 취한 서연은 노래방에 가자고 했고 혁준도 오랜만이라며 서연의 옆에 나란히 걸었다. 승태와 다정은 그런 두 사람의 뒤에 몇 발자국 떨어져 따라갔다. 승태는 가는 길에 혁준이 서연을 좋아한다는 얘기를 다정에게 해줬다. 화들짝 놀랄 줄 알고 얘기해줬는데 의외로 다정은 담담했다. 마치 결국은 그렇게 될 줄 알았다는 느낌이었다.
노래방에서 서연은 자기가 남자친구랑 헤어졌으니 발라드는 절대 부르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고 혁준은 그런 서연을 놀려 먹듯 발라드를 예약했다가 강제로 취소를 당했다. 그런 장난들을 제외하면 혁준은 서연을 알뜰히 챙겼다. 자기도 분명 취했을 텐데 잔뜩 취해 신이 난 서연이 간식을 먹고 싶다 하거나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하면 늘 혁준이 나서서 챙겼다. 그 모습이 승태 눈에는 마치 ‘나 김서연 좋아하는 거 너한테 얘기했으니까 이제 내 맘대로 한다’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그걸 다음 날 서연이 기억할지 못 할지는 모를 일이지만.
“야 야 3차 가자 3차!”
“어우 서연아 너 지금 너무 취했어.”
“뭔 소리야! 야 혁준아아 3차 가야지이!”
“어 그럼 그럼 가야지! 야 얘 내가 챙길 테니까 너네는 이제 들어가.”
“괜찮겠어? 쟤 취하면 진짜 집에 안 갈려 하는데.”
“뭐 하루 이틀이냐. 내일 연락하자. 야! 김서연 3차!”
“오케이! 가자 가자! 뭐야 승태랑 다정이 어디가!”
“이따 올 거야. 일단 우리 먼저 가자!”
“아싸 가자아!”
노래방에서 나와 신나서 방방 뛰며 3차로 이동하는 서연과 그런 서연을 챙기는 혁준을 안쓰러운 눈빛으로 인사를 하고 승태와 다정은 집으로 향했다. 둘만 남아서 긴장이 풀렸기 때문일까 승태도 취기가 확 올라왔다. 택시를 타고 다정의 어깨에 기대 집으로 향하고 있으니 작년 늦가을에 다정이네 집에 택시를 타고 데려다 주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 다정이가 해장하고 가자고 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잠시 상상해봤다. 그랬어도 우리는 지금처럼 연애를 하고 있었을까?
그런 승태의 마음을 읽었는지 다정이 승태의 손에 깍지를 꼈다. 마치 어떤 일이 있었어도 우리는 이렇게 함께 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승와 가장 자신과 잘 맞는 사람은 다정이고 그렇기에 앞으로도 함께 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승태에게는 있었다. 서연이 찾고 있는 가장 잘 맞는 사람이 혁준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지금의 서연이 옆에 있어줄 수 있는 사람은 혁준뿐이라고 승태는 생각했다.
그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택시는 어느새 집 앞에 도착했다. 다정도 택시를 타고 오는 길에 꽤 취했는지 비틀거리며 택시에서 내렸다. 함께 집에 들어온 승태와 다정은 간단하게 씻고 침대에 널부러졌다. 아직 서로에게 술냄새가 났지만 그런 건 상관 없었다. 결국 서연의 이별을 위로해주기 위한 오늘의 만남은 혁준의 뜬금 없는 고백과 다정의 소중함을 깨닫는 걸로 마무리 되었다.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창문을 타고 넘어와 자고 있는 승태와 다정을 따끈하게 데워줬다. 더위에 뒤척이며 일어난 다정은 아직 자고 있는 승태가 깨지 않게 조심히 부엌으로 나와 냉수를 한잔 마셨다. 어제 귀찮아서 미처 정리하지 못한 옷을 세탁기에 넣고 서연에게 전화를 해봤는데 다행히 잘 들어간 듯했다. 다음에 또 보자며 인사를 마친 뒤 미지근한 물로 어제의 술기운을 씻어 내렸다.
그 사이 승태는 일어나 거실 쇼파에 몽롱한 상태로 앉아 있었다. 베란다 창 밖으로 내리쬐는 햇빛에 몸을 맡기고 쇼파에 마치 도인처럼 앉아 있어 씻고 나온 다정은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랄 뻔했다. 따끈한 국물로 해장을 하고 일단 널부러졌다.
“근데 다정아. 이제 놀 시간 한 달 정도 밖에 안 남았는데 그동안 뭐 계획 있어?”
“음… 특별한 건 없는데 왜?”
“내가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우리 글램핑 갈래?”
“글램핑?”
“응. 뭐 어디 여행가서 돌아다니는 것보다 이럴 때 그냥 진짜 맘 놓고 며칠 푹 쉬다 오면 너무 좋을 것 같아서.”
“오 좋아 좋아. 모처럼이니까 진짜 가서 재밌게 놀자!”
“그래! 그럼 준비는 내가 다 할테니까 딱 기다리고 있어!”
다정은 기분이 잔뜩 좋아져 승태에게 달려가 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