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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어릿 Dec 22. 2024

여덟 번째 가을, 첫 번째 봄 #33

승태와 김 주임은 점심 시간에 회사 근처 양식집으로 향했다. 점심을 같이 먹자는 말 이후로 김 주임은 승태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히려 아무 말이 없었기에 승태는 김 주임의 눈치가 보였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할까. 아무래도 한 대리님 관련 얘기인 것 같긴 한데 같은 팀에서 일한다고는 하지만 승태 역시 김 주임에 대한 정보가 없으니 아무 예측도 할 수 없었다.


“승태 씨 뭐 먹을래?” 

”저는 베이컨 로제 파스타로 할게요.”

“그래. 저희 베이컨 로제 파스타랑 까르보나라 하나 주세요.”


김 주임은 주문을 마치고 물을 한잔 따르더니 거의 입에 대는 정도로 조금 마셨다. 그 모습을 본 승태도 말 없이 물을 따라 마시고 김 주임에게 수저와 앞접시를 건넸다. 김 주임은 접시를 받고 잠시 창밖을 바라보더니 다시 승태쪽으로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좀 있으면 장마도 끝나겠지? 내가 좋아하는 계절이 돌아왔어.”

“주임님이 여름을 좋아하시는지는 몰랐네요.”

“열정적이잖아. 에너지가 넘치는 느낌이라 해야 하나.”

“저는 더운 걸 싫어해서…”

“그래? 그럴 수 있지.”


김 주임은 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상철 씨,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 굳이 따지자면 마음에 드는 편이었어.”

“두 분이 따로 몇 번이나 만났다고 해서 좀 놀랐어요.”

“뭘 그런 걸로 놀라?”

“당연히 놀라죠. 주임님 남자친구 있으시잖아요.”

“남자친구 있으면 다른 남자랑 저녁도 먹으면 안돼?”

“뭐 그렇다기 보다는…”


승태의 말을 끊고 직원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파스타를 가져다줬다. 김 주임은 직원에게 고개를 까딱 하며 감사합니다 하고 말하고는 포크를 들어 파스타를 뒤적였다. 승태도 파스타를 소스와 잘 섞어 포크로 조금 떠 먹었다. 로제 소스의 감칠맛과 풍미가 입안에 가득 퍼졌다.


“나는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사람들이 일종의 구속이라 생각하는 게 싫어. 남자친구가 있어도 얼마든지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좋아. 지금 내 남자친구는 내가 이런 걸 다 알고도 만나주는 사람이고.”

“음…”


승태는 김 주임의 얘기를 파스타와 함께 곱씹었다. 어느 정도는 동의하는 이야기다. 남자친구 혹은 여자친구라는 게 생기면 사람들은 뭘 하든 그 사람과 함께 해야 하고 그 사람에게 뭐든 알려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걸 일종의 그 사람 또는 자신에 대한 구속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건 확실히 문제다.


“그래서 상철 씨한테 남자친구가 데리러 온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 사람은 연락을 딱 끊어 버리더라. 이해는 해. 나를 배려해서 그런 거겠지. 혹은 남자친구가 있으니까 자기랑은 발전 가능성이 없겠다고 생각했거나. 둘 중 뭐가 됐든 나랑 그냥 친구는 하기 싫은 거겠지.”

“그럼 한 대리님한테 그런 얘기를 하실 생각은 없어요?”

“굳이? 뭐 하러? 내가 10대나 20대였으면 어떻게든 이해 시키려고 했을지도 몰라. 근데 생각해봐. 상철 씨는 그냥 어쩌다 만난, 사실상 모르는 사람이야. 남자친구한테 나 친구 좀 만나고 올게 하고 설득 시키는 것과 저는 남자친구가 있지만 당신과 친구하고 싶어요 하고 설득 시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야. 어느 쪽이든 나는 그런 일에 시간과 내 체력을 쓸 생각은 없어. 싫으면 말고. 딱 그런 느낌이야.”

“듣고 보니 그렇네요… 무슨 말씀인지 알 것 같아요.”

“승태 씨가 어떤 연애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서로를 구속하는 연애는 하지 마. 서로한테 안 좋아.”

“네… 근데 주임님 원래 이렇게 말이 많으신 분이었어요?”

“어머, 내가 그랬나? 재미 없었으면 말고.”


한바탕 자신의 연애관에 대해 쏟아 낸 김 주임은 마지막 말을 끝으로 평소의 능청스러운 여우로 돌아왔다. 그 이후로 계속 파스타를 먹으며 승태는 김 주임의 말을 계속 되감아 봤다. 어쩌면 승태가 꿈꾸던 연애관이 김 주임의 방식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다정이와 연애를 하면서 하고 싶었던 걸 못한 적은 없다. 애초에 다정과 취미나 식습관이 잘 맞는 것도 있었지만 오랫동안 친구였던 그 기간이 지금의 연애를 편하게 만든 게 크지 않았나 싶다. 한편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지 얼마 되지 않아 연애를 하기도 하니 더욱 서로의 취미나 주변 인간 관계들이 더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아무튼 복잡한 문제다.

밥을 먹고 돌아와서는 승태도 김 주임도 서로 일 이외의 얘기는 하지 않았다. 김 주임의 연애관을 알게 됐기 때문일까. 이제는 김 주임이 왜 남자친구 얘기를 굳이 먼저 꺼내지 않는지도 알 것 같았다. 아무튼 이상하면서도 신기한 사람이다 싶었다.


“나 왔어 다정! 오늘 진짜 재밌는 일 있었다?”

“뭔데 뭔데? 일단 씻고 와. 밥부터 먹자.”

“응!”


퇴근을 하자마자 승태는 집으로 달려왔다. 집에 도착하니 다정이 치킨을 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후다닥 씻고 식탁에 앉은 승태는 닭다리를 하나 뜯으며 술을 한잔 마셨다. 다정이 천천히 먹으라고 말했지만 너무 기분 좋아지는 맛이라 승태는 순식간에 닭다리 하나를 먹어치웠다.


“우와. 진짜 맛있어!”

“그치 맛있지! 그래서 재밌는 일이 뭔데?”

“아니 오늘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


승태는 오늘 아침에 출근해서부터 점심 시간이 끝날 때까지 김 주임과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 없이 얘기해줬다. 결론부터 얘기해버리는 바람에 다정에게 오지랖 부리지 말라고 했지 하며 잔소리를 들을 뻔하긴 했지만 다행히 다정은 침착하게 승태가 쏟아내는 말을 중간에 추임새까지 넣어가며 경청해주었다.


“오호… 그 분 입장도 이해는 가네. 네가 얘기한 것처럼 우리는 오랫동안 친구여서 딱히 그런 걸 신경 쓸 필요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해.”

“그치. 그래서 난 네가 좋아.”

“응? 갑자기?”

“응. 친구일 때도 그랬는데 나를 제일 잘 이해하고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너라는 생각이 들어서.”

“음… 그렇긴 하지? 그래도 살다 보면 이해가 안되는 순간들이 있지 않을까?”

“그럴 수도 있는데 우리는 연인이기 이전에 9년 차 친구잖아! 아마 뭔 일이 있어도 괜찮을 걸?”

“그건 그렇겠다. 너무 좋네.”


다정은 해맑게 웃으며 승태와 같이 술잔을 부딪혀줬다. 청량한 소리가 집안에 울려퍼졌다.


“근데 오늘 네가 그 얘기를 딱 할지 몰랐네. 나도 오늘 재밌는 일 있었거든.”

“뭔데?”

“이거 봐.”


다정은 스마트폰을 켜 승태에게 메신저를 보여주었다. 화면에는 한 대리와의 대화 내용이 보였는데 어제 잘 들어갔냐는 내용을 시작으로 한 대리는 뭔가 결심을 한 듯 김 주임에게 다시 연락을 해보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냥 연락하지 말까 싶기도 했는데 며칠 같이 얘기해 보니 말이 너무 잘 통하더라. 그래 까짓 거 뭐 연애 못하면 친구라도 하면 되지!]


메신저로 온 한 대리의 말에는 확신이 가득 차 있었다. 확신과 함께 김 주임에 대한 마음도 느껴졌다. 승태는 그 메시지를 보고 우와 하며 연신 감탄을 했다.


“대리님이 나중에 다같이 밥이나 먹재. 자기가 산다고.”

“너무 좋네. 둘이 잘 지냈으면 좋겠다!”

“혹시 알아? 너랑 나 같은 친구가 될지.”

“오 그렇게 되면 진짜 너무 신기하겠는데?”

“그치. 그러게 내가 오지랖 부리지 말랬잖아.”

“진짜 괜한 오지랖이었어. 헤헤.”

“근데 재밌는 소식이 하나 더 있는데.”


승태가 잔을 들려고 할 때 다정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스마트폰으로 다른 화면을 켜서 화면을 다시 보여줬다. 화면에는 다정에게 온 메일이 있었고 그 메일에는 ‘합격’이라는 글씨가 유독 강조되어 있었다.


“나 합격했지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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