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접관 세 명이 다정의 맞은 편에 앉아 각자 가져온 다정의 이력서를 면밀히 살피며 이런 저런 질문들을 했다. 어떤 회사든 항상 물어보는 지원 동기라던지, 입사에 대한 포부라던지, 성격의 장단점 등 여러 질문들을 했다. 그리고 이전 직장에서의 경력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물어봤다. 면접관들의 표정은 마음에 드는 듯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묘했다.
“꽤 괜찮네요. 전 회사에서 커리어를 착실하게 쌓으셨네요.”
“아, 네. 감사합니다.”
“결과는 메일로 알려드릴 거예요. 면접 보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다정은 면접관들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회사를 빠져 나왔다. 다정은 옷자락을 매만지며 우산을 쓰고 회사 앞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면접이 어땠는지 가늠하기는 어려웠지만, 면접관들의 반응이 나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한숨을 내쉬며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흐린 하늘에서는 빗방울이 흩날리듯 내리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다정은 승태에게 면접 끝나고 집에 가는 중이라고 연락을 남기고 창밖을 바라봤다. 이미 마음속에는 당장 다음 주부터 출근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집에서 전철 타면 20분 조금 넘게 걸리니까 거리도 딱 적당하네 하며 김칫국을 마셨다.
집에 돌아오자 마자 한가득 쌓여 있는 빨래더미를 발견했다. 한동안 비가 와서 집에서 빨래를 하기가 어려워진 데다 사람이 둘이 되니 빨래가 훨씬 빨리 쌓였다. 같이 산다는 건 이런 거구나 하고 다정은 생각했다. 함께 사는 만큼 행복이나 즐거움도 두 배지만 그만큼 설거지나 빨래 같은 집안일도 두 배로 해야 했다. 다정은 빨래감을 모두 빨래 가방에 다 담아 넣고 밖으로 나와 집 근처에 있는 코인빨래방으로 향했다. 이렇게 집안일을 하는 것에 대해 다정은 귀찮다거나 하기 싫다는 느낌은 없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그 사이 승태는 상반기 결산으로 바쁘게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거래처와의 거래 내역이나 상반기에 진행했던 프로젝트 내역을 정리하는 것은 대부분 김 주임이 도맡아 했지만 승태도 옆에서 서포터 역할을 해야 했기에 정신이 없었다.
“승태 씨, A회사한테 아직 명세서 다 못 받았지?”
“네, 안 그래도 오늘 오전에 리마인드 한번 더 드렸더니 오후 중에 넘겨준다고 하십니다.”
“그래. 그나저나 승태 씨도 요 1년 새 일이 많이 늘었네?”
“네, 뭐… 감사합니다.”
이 사람이 웬일로 칭찬을 하지 하는 생각을 하며 서류 뭉치를 책상에 탁탁 쳐 정리해서 김 주임에게 넘겨줬다. 김 주임은 승태가 정리한 서류를 쭉 넘겨 보더니 잘 정리했다며 한번 더 칭찬을 해주었다.
“오늘 그래도 얼추 상반기 결산 마감인데 저녁에 회식이나 한번 할까?”
갑자기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회식을 제안했고 승태를 제외한 팀원들 모두가 좋다며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고 했다. 승태 혼자 우물쭈물하고 있자 팀장이 승태를 지목하며 물었다.
“승태 씨는 오늘 저녁에 일정 따로 있나?”
“네? 아, 아뇨. 뭐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승태 씨도 회식 꼭 참석해. 요즘 승태 씨가 아주 일을 잘해.”
“네…”
자리로 돌아온 승태는 다정에게 오늘 회식에 가야 해서 저녁은 먹고 들어간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다정은 같이 저녁 먹고 싶다고 빠르게 답장을 했고 승태도 안 가고 싶었는데 거의 반쯤 끌려가는 거라며 집에 일찍 가지 못해 아쉽다고 했다.
퇴근 시간은 빠르게 다가왔고 승태와 팀원들은 팀장을 포함해 근처 고깃집으로 이동했다. 가게 한쪽에 있는 테이블 한 줄을 통째로 승태네 팀 사람들로 가득찼다. 최대한 바깥쪽에 앉으려던 승태는 반 강제적으로 왼쪽에는 김 주임, 오른쪽에는 팀장이 앉게 되었다. 가만히 술만 먹다가 가야지 하고 생각하는 동안 밑반찬들과 술, 고기가 테이블마다 세팅되었다. 그렇게 말 없이 팀장과 김 주임에게 고기를 구워주다가 어느 정도 고기들이 익자 팀장이 술잔을 채우더니 벌떡 일어났다.
“자, 다들 잔 좀 채워주세요.”
팀장의 말에 따라 다른 팀원들은 각자 잔을 채우기 시작했다. 팀장은 여유롭게 그들의 잔이 모두 가득 찰 때까지 기다렸다.
“원래는 회사 있을 때 말해주려 했는데 좋은 일이다 보니 우리 팀 안에서는 미리 알면 좋을 것 같아서 오늘 이렇게 회식 자리를 마련했는데 다들 참석해줘서 고마워요. 다름이 아니라 우리 김 주임이 곧 대리로 승진할 예정입니다. 자 다들 박수!”
팀원들은 팀장의 말이 끝나자 마자 김 주임을 향해 박수를 쳤다. 김 주임은 전혀 몰랐다는 듯 놀란 표정을 잠시 지었다가 능청스럽게 모두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다. 그렇게 마신 첫 잔과 함께 회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김 주임, 아니지 김 대리 축하해. 인사 발령은 7월 초에 바로 날 거야.”
“감사합니다 팀장님. 근데 저는 오히려 승태 씨한테 고맙네요.”
“아 그렇지 그렇지. 승태 씨가 요즘 일 처리가 아주 깔끔해. 아마 다음 승진은 승태 씨가 될 거야. 사실 뭐 경력이나 이런 걸 생각하면 승태 씨도 당장 주임으로 올라가도 이상하지 않지. 그럼 그럼.”
“그렇죠. 승태 씨 고마워요.”
“아닙니다. 대리님 축하드려요.”
승태는 양 옆에서 쏟아지는 칭찬 세례에 괜히 쑥쓰러워 하면서도 내심 그동안 일을 열심히 했긴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좋아졌다. 회사에서 인정 받는다는 게 이런 기분인가 싶었다.
그 뒤로 술을 연달아 먹다 보니 승태는 생각보다 빠르게 취기가 올랐다. 그나마 다행인 건 팀장을 포함한 다른 팀원들도 생각보다 빨리 취해서 회식 자체는 금방 끝이 났다. 한두 명씩 나와 누구는 택시를 타고, 누구는 전철을 타고 집에 갔다. 마지막까지 남은 건 승태와 김 주임이었다.
“나도 슬슬 가야겠네. 승태 씨는 전철 타고 가?”
“네. 주임님은요?”
“나는 남자친구가 데리러 온다고 해서.”
“아, 네. 남자친구랑 오래 가시네요.”
“몇 번 헤어질 뻔하긴 했어. 저번엔 나한테 같이 살자고 했는데 내가 싫다고 하니까 헤어지자고 하더라고.”
“진짜요?”
승태는 하마터면 저는 지금 다정이랑 같이 살고 있거든요 하고 말할 뻔했다. 거의 혀 끝까지 그 말이 올라왔다가 굳이 말할 필요 없지 하고 다시 삼켰다. 아직 덜 취했네.
“그래서 그럼 알겠다 잘 가라 했는데 며칠 지나니까 지가 다시 만나재. 같이 안 살아도 된다고.”
“남자친구 분이 주임님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뭐, 나한테 그렇게 매달리는 남자 나쁘지 않지.”
저 여우 같은 게.
“승태 씨도 혹시나 나중에 다정 씨랑 같이 한번 살아봐.”
“네? 근데 주임님은 남자친구랑 같이 안 사신다면서요.”
“그건 걔가 워낙 안 치우고 사는 걸 내가 알아서 그런 거고. 같이 살면 내가 다 치워야 할 것 같으니까.”
“아… 그런 이유로…”
“암튼 난 추천해. 같이 살다 보면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잖아?”
이미 같이 살고 있고 생각보다 같이 사는 거 정말 좋네요 하고 승태는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김 주임이 말한 대로 정말 새로운 모습들을 많이 발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불에 돌돌 말려 있는 모습이라던가, 잠들기 전에 꼭 물을 한 잔 마시는 습관이라던가. 이런 소소한 것들을 알아가는 게 행복이라고 느껴졌다.
“승태 씨 나 먼저 가볼게. 내일 회사에서 봐.”
“아 네, 들어가세요.”
김 주임은 자신을 데리러 온 차를 타고 갔고 승태도 전철을 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과 함께 있었을 땐 괜찮았는데 흔들리는 전철을 타고 있자니 술기운이 조금씩 올라오는 듯했다. 빨리 집에 가야지. 승태의 머릿속엔 그 생각뿐이었다.
“나 왔어.”
“생각 보다 일찍 왔네?”
“응 일찍 끝나서. 저녁은 챙겨 먹었어?”
“응 대충. 아이 술냄새!”
다정은 코를 막는 시늉을 하며 승태의 등짝을 살살 때렸다. 승태가 깜짝 놀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많이 나? 아니 나왔을 땐 괜찮았는데 전철 타니까 술기운이 확 오르더라구.”
“아냐 그렇게 안나. 괜히 그냥 놀려보고 싶었어. 드라마 같은 데 보면 다들 이러잖아.”
“아 놀랬잖아. 나 근데 좀 출출해.”
“라면 하나 끓여줄까?”
“좋아! 나 씻고 올게.”
승태는 미온수로 샤워를 하며 행복한 생각에 빠졌다. 늘 퇴근했을 때 봤던 어두운 집도 이제는 환해졌고, 회식을 하고 와서 피곤하지만 라면을 끓여주는 사람이 생겼다. 그전에는 외롭다기 보단 좀 쓸쓸한 느낌이었는데 다정과 함께 살고 나서부터는 확실히 일상이 달라졌다. 이런 새로운 일상에 승태도 어느새 적응해버린 것이다.
다정은 승태가 씻고 나오는 타이밍에 맞춰 승태에게 라면을 줬다. 너무 맛있겠다며 씻고 나오자 마자 라면을 먹으려는 승태에게 스킨로션은 바르고 먹으라며 다정이 잔소리했다. 승태는 그 말을 듣고 빛보다 빠르게 스킨로션을 바르고 와서 라면을 먹었다. 술 마시고 먹는 다정의 라면은 최고였다. 승태는 새로운 이 일상이 너무 좋았다.
“하… 진짜 맛있다.”
“다 먹었어? 설거지는 네가 해.”
“그럼그럼. 대신 조금만 있다가. 너무 피곤해…”
“어휴, 아참. 내일 저녁에 혹시 시간 돼?”
“내일? 별일은 없을 것 같긴 한데 왜?”
“아, 전에 봤던 한 대리님 기억 나? 나 전에 다니던 회사에.”
“아 그 텐션 좋으신 분? 기억나지.”
“대리님이 내일 저녁 먹재. 근데 너도 데리고 오라던데?”
“엥? 굳이?”
승태는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저녁을 먹자고…? 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