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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어릿 Dec 14. 2024

여덟 번째 가을, 첫 번째 봄 #30

해당 브런치북은 앞의 책에서 이어지는 내용으로, 아래 링크를 통해 1화부터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

https://brunch.co.kr/@thereit/104



하지가 지나고 나면 본격적으로 여름 장마가 시작된다. 습도는 매일 최대치를 갱신하고 일기예보 어플을 봐도 비 다음 비 다음 비 다음 비만 보일 뿐이다. 어쩌다 비가 안오는 날에도 구름이 잔뜩 껴 하늘 보는 재미가 없다. 다정이 1년 중 가장 우울해 하는 시기가 돌아온 것이다.


“아… 심심하네…”


작업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력서를 쓰던 다정은 창밖의 내리는 비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다 문득 집안에 냉장고 모터 돌아가는 소리와 창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만 나고  있다는 걸 깨닫고 유튜브에서 재즈 라이브를 찾아 틀었다. 피아노가 연주하는 잔잔한 재즈 선율이 작업실 안에 퍼져나갔다. 왠지 모르게 마음 속에 있던 무거운 짐이 내려 놓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동안 이곳 저곳에 이력서를 넣고 면접 제의도 몇 번 받아 갔었지만 아직까지 다정이 원했던 조건을 제시하거나 원하는 규모의 회사는 없었고 조금 큰 규모의 회사에 들어가려고 해도 보통 경력 3년 차 이상을 원했었다. 다정의 경력으로는 아직 지원하기에 부족함이 있었지만 안되면 안되는 거지 뭐 하는 마음으로 여러 군데 지원을 해보는 중이었다.


“이제 더 지원할 만한 회사도 없네…”


다정은 한숨을 푹 쉬고는 노트북을 닫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시간은 벌써 오후 3시를 지나고 있었다. 아직 승태 오려면 4시간은 더 있어야겠네. 처음에는 승태가 없는 사이에도 이것 저것 청소도 하고 자리도 옮겨 보고 인테리어 소품들도 옮겨보고 했지만 이제 그 마저도 다 끝나서 더 이상 할 게 없었다. 장마가 이렇게 오니 평소 좋아하는 산책을 갈 수도 없었다. 3시에서 4시 사이, 하루 중 가장 무료하고 우울한 시간대였다.

그때 다정의 스마트폰에 알림이 울렸다. 지원한 회사로부터 서류전형 결과가 나왔다는 알림이었다. 지금까지 여러 군데 회사에서 이런 알림을 받았지만 항상 결과를 확인할 때는 순간적으로 긴장감이 극에 달한다. 다정은 떨리는 손으로 메일을 확인했다. 결과는 합격. 지원했던 여러 회사들 중에서도 유독 가고 싶었던 회사였기에 이번 결과는 유난히 더 기뻤다. 메일에는 서류에 합격했다는 안내와 함께 면접 일정도 함께 적혀 있었다. 날짜는 3일 뒤. 면접은 늘 자신 있었던 다정이었기에 3일 정도면 준비할 여유가 충분했다.


[승태야 나 거기 서류 붙었어! 면접 보러 오래!]

“앗싸!”


다정은 최대한 빨리 이 사실을 승태에게 알려주고 싶어 메신저를 열고 빠르게 메시지를 보냈다.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양손을 꼭 맞잡고 이 기쁨을 마음껏 만끽했다. 그러는 사이 승태에게 빠르게 답장이 돌아왔다.


[우와 축하해! 오늘 저녁 맛있는 거 먹어야겠네!]

[아직 최종 붙은 것도 아닌데 뭐. 오늘 일찍 와?]

[에이 그래도! 가고 싶은 회사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잖아. 응 오늘 칼퇴할 거야.]

[그런가? 그럼 간만에 외식이나 할까?]

[그래!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얘기해!]


다정은 잔뜩 신이 나 샤워를 하고 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중간 중간 시계를 보며 여유롭게 준비를 하고 나가면 승태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회사 앞에 도착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날씨 어플을 켜 저녁 날씨도 체크했다. 여전히 비는 계속 오고 있었지만 아까와 같은 우울감은 사라졌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해 승태네 회사 1층 로비에서 밖에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구경하며 승태의 퇴근을 기다렸다. 비는 조금도 사그라들 생각이 없는 듯 꾸준히 내리고 있었다. 앞으로 한동안 이렇게 계속 비가 내리겠지 하고 다정은 생각했다.


“다정아!”


승태가 내려오자마자 다정을 발견하고는 크게 부르며 다가왔다. 다정도 반가운 표정으로 승태를 맞이했다. 승태와 다정이 반갑게 인사하는 사이 김 주임이 둘 옆을 지나가며 능청스럽게 인사를 전했다.


“다정 씨 오랜만이네요. 축하해요.”

“아 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승태 씨랑 같이 저녁 먹기로 했나 봐요? 부럽다. 맛있는 거 먹어요. 승태 씨 다음 주에 봐요.”

“네 주임님, 들어가세요.”


김 주임은 살랑 하고 손짓하더니 금세 밖으로 빠져나갔다. 승태가 얘기했나? 승태와 다정도 곧바로 우산 하나를 나눠쓰고 근처 갈비집으로 향했다. 승태가 근처에 진짜 맛있는 집이 있다며 다정의 기대를 부풀렸다. 그렇게 승태가 데려간 갈비집은 원형 테이블이 대여섯 개 정도 배치되어 있는 노포 느낌의 소박한 가게였다. 굳이 비교하자면 승태와 다정이 홍대 근처에 자주 가던 그 삼겹살집과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비슷했다.


“사장님 여기 갈비 2인분이랑 소주 하나 주세요!”

“여기 그 이모네 가게랑 느낌 비슷하지 않아?”

“그러고보니 그러네. 이런 느낌 나는 가게들은 다 맛집인가봐.”


사장님이 밑반찬과 소주를 먼저 가져다주자 승태는 자연스럽게 소주병을 따 다정에게 잔을 따라 주었다.


“축하해 다정아. 빨리 이직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아직 면접 남았는데 뭐. 너무 김칫국 마시는 거 아냐?”

“에이 내가 널 아는데. 한다정이 면접에서 떨어져? 에이. 면접은 언제야?”

“3일 뒤에. 너무 가고 싶었던 회사라 뭔가 조금 긴장되는 것 같기도 해.”

“분명 잘 해낼 거야. 너 해왔던 대로만 하면 돼.”


승태는 막상 서류를 통과한 다정 자신보다 더 신나하는 듯했다. 한창 이직 고민을 하고 있을 때 크게 신경쓰지 않는 듯했던 승태였지만 다정이 모르는 사이 승태도 다정의 앞날을 상당히 신경쓰고 있었다는 게 느껴졌다. 그런 승태의 모습을 보자 다정의 기분은 한껏 좋아졌다.

갈비는 사장님이 직접 정성스럽게 구워주셨다. 달달한 양념 맛이 갈비에 잘 베어 있어 육즙이 터질 때마다 풍미가 확 느껴졌다. 말 그대로 절로 술을 부르는 그런 맛이었다. 고기를 한두 점, 술을 한두 잔 비우다 보니 어느새 술기운이 온몸에 퍼져나갔다.


“그러고보니 회사에서 너 연락 받고 깜짝 놀라서 폰 떨어트릴 뻔했어. 김 주임님이 무슨 일 있냐고 물어봐서 너 서류 통과했다는 얘기만 했어.”

“그랬어? 어쩐지 아까 축하한다고 하시길래 네가 말했나 싶었어.”

“자세한 얘기는 안 했어. 뭐 자세히 할 만한 얘기도 없었지만. 그나저나 다시 생각하니 웃기네. 맛있는 거 먹으러 간댔더니 왜 부러워 해. 지도 자기 남친이랑 먹으면 되지.”

“김 주임님 남자친구가 있었어?”


다정이 깜짝 놀라 승태에게 물었다.


“응. 나도 잘은 몰라. 사귄 지 좀 오래됐다는 거랑 자주 못 만난다는 것 정도?”

“오… 그렇구나… 전혀 몰랐어.”

“넌 한 번 밖에 못 봤잖아. 모를 만도 하지.”


한 대리님 그때 김 주임님한테 관심 있어 보이던데. 뭐 그렇다고 연락하고 있겠어? 괜한 일에 신경쓰지 말자. 다정은 짧은 순간 그때 한강에서 마주쳤던 한 대리와 김 주임을 떠올렸지만 그 뒤로 한 대리가 다정에게 와서 김 주임 얘기를 한 적도 없고 그 둘이 뭔가 연락을 주고받는 상황 자체가 어색해서 금세 머릿속에서 치워버렸다.

다음 날, 다정은 노트북을 열어 면접을 보기로 한 출판사의 홈페이지와 그동안 출간했던 도서 목록들을 면밀히 살폈다. 회사가 원하는 인재상을 거의 외우다시피 했고 도서 목록을 보고 있으니 다정이 읽었던 책들이 여러 권 눈에 들어왔다. 그때 이 책들을 읽으면서 출판사에서 일하게 된다면 이 회사에 취직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지. 잠시 추억에 빠져 있는 사이 승태가 와서 긴장되면 모의 면접이라도 봐줄까 했지만 오글거린다며 밀어냈다. 그 뒤로도 계속 면접관 코스프레를 하며 장난을 걸면서 다정의 긴장감을 조금이라도 풀어줬다.

그렇게 면접 당일, 다정은 기분 좋은 긴장감을 안고 회사에 도착했다. 인사담당자가 회의실로 보이는 방으로 안내하면서 여기서 대기하고 있으면 된다고 해서 가운데 의자에 앉아 회의실을 둘러봤다. 출판사 로고가 책등에 박혀있는 책이 정돈되지 않은 상태로 회의실 구석에 널부러져 있었다. 다들 바쁘구나. 그렇게 생각하던 차에 회의실 문이 열렸다.


“한다정 씨?”

“아, 네. 안녕하십니까.”


다정의 면접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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