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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데어릿 Dec 21. 2024

여덟 번째 가을, 첫 번째 봄 #32

“저 먼저 일찍 들어가 보겠습니다.”

“벌써 들어가?”


승태는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짐을 챙기며 퇴근 준비를 했다. 그런 승태를 보고는 김 주임이 승태를 불러세웠다.


“퇴근 시간이니 가야죠.”

“아니 뭐 쫓기는 사람처럼 가길래.”

“저녁 약속이 있어서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상하게 쳐다보는 김 주임을 뒤로하고 승태는 빠르게 회사를 빠져나와 전철에 몸을 실었다. 한 대리가 다정에게 저녁을 먹자고 한 것도 신경이 쓰였는데 거기에 승태도 초대했다는 건 더 놀라운 일이었다. 평소에 둘이 연락을 계속 하고 있었던 건가? 아니면 다정이 전 회사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여러 가지 잡생각들이 승태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했다.

약속 장소인 한식당에 도착했을 때, 승태는 이미 한 대리와 다정이 와서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승태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한 대리는 승태를 보자 손을 흔들었다. 승태는 꾸벅 인사를 하며 다정의 옆자리에 앉았다.


“오, 승태 씨 오랜만이야.”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일찍 왔네? 가방 이리줘.”

“응. 퇴근 하자마자 바로 뛰어왔지.”

“잘했네. 한잔 해.”


다정이 승태의 잔을 채워주자 이어서 한 대리가 잔을 들었다. 잔을 가볍게 부딪히고 동시에 술을 들이키고 나니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승태는 한 대리의 눈치를 살짝 봤는데 왠지 모르게 그늘이 져 있는 듯했다. 그래서 우선은 아무 말 않고 앞에 잔잔하게 끓고 있는 순두부찌개를 한 숟갈 떠 먹었다. 간이 약간 심심한 게 나쁘지 않았다.


“별일이네요. 대리님이 먼저 저녁을 먹자고 다 하시고.”


정적을 깬 건 다정이었다. 다정도 한 대리 얼굴의 그늘이 보였는지 자연스럽게 잔을 채워주었다. 다정이 잔을 채워주자 한 대리는 일단 웃어 보이며 안부 인사 같은 대화를 이어나갔다. 다정이 퇴사하고 회사 분위기는 어떤지, 다정은 이직을 했는지, 요즘 날씨는 어떤지 같은 시시콜콜한 얘기가 이어졌다. 그런 얘기들을 하며 몇 잔을 마시다 보니 한 대리도 결국 결심을 한 듯 본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하… 그게 말이지 사실은…”

“무슨 일 있어요?”

“아니 뭐… 저번에 우리 여의도에서 만났었잖아. 그때 내가 나리 씨 전화번호를 물어봤었거든.”

“네? 진짜요? 그래서 받았어요?”


승태가 깜짝 놀라 물었다. 그 사람 전화번호를 물어봤다고? 대체 왜?


“응, 받았지. 그래서 연락도 간간히 잘 하고 몇 번 만나서 저녁도 먹었어. 근데 그 사람 남자친구가 있더라?”

“네?”


이번엔 다정이 깜짝 놀랐다. 남자친구가 있는데 전화번호를 주고 연락도 하고 심지어 저녁도 몇 번 먹었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 이 상황만 놓고 보면 김 주임이 순진한 한 대리를 갖고 놀았다는 얘기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한 대리가 순진하다는 생각을 다정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지만 적어도 지금 상황은 그랬다.


“그래서 오늘 승태 씨도 오라고 한 거야. 나리 씨 원래 그런 분이야?”

“저야 그냥 일개 같은 팀원일 뿐이지만… 김 주임님이 은근 여우 같은 구석이 있어요. 나쁘다기 보다는 막 그런 거 있잖아요 사람이 되게 능글맞다고 해야 하나.”

“맞아! 그 능글맞음! 내가 그 능글맞은 그런 성격을 좋아하거든. 하… 그래서 진짜 열심히 들이댔는데.”

“저는 대리님이 그렇게 적극적이라는 사실 자체가 지금 너무 놀라운데요?”

“다정 씨는 뭐 그럴 수 있지. 솔직히 회사가 우리한테 해주는 게 뭐가 있어. 그냥 가만히 앉아서 일하다가 돈만 받으면 되는 거잖아. 그래서 내가 회사에서는 별로 티를 안 내서 그렇지 밖에서는 말도 많고 되게 활발한 성격이야.”

“지금 보니까 그래 보이네요.”

“뭐 아무튼. 저번 주 금요일에 같이 저녁을 먹는데 다 먹고 2차 가실래요? 하고 물어봤거든. 근데 자기는 가봐야 한대. 어디 가냐니까 남자친구가 데리러 온다고 하더라고.”

“이야…”

“그래서 남자친구 있으셨냐고, 왜 말 안 했냐고 물어보니까 안 물어봤지 않냐고 그러면서 생긋 웃더라니까? 내가 진짜 그 순간에 기가 막혀서 말이 안나오더라.”


한 대리는 속이 타는지 술을 입안에 털어 넣듯 들이켰다. 그 모습을 안쓰럽게 보던 승태와 다정도 한 잔씩 술을 마셨다.


“하… 진짜 이런 경우가 있나. 내가 진짜 좋아한다는 티를 많이 냈거든. 그래서 더 속상해. 승태 씨는 나리 씨 남자친구 본 적 있어?"

“아, 안 그래도 어제 회식 끝나고 집에 가려는데 남자친구가 데리러 오더라구요.”

“진짜? 어때보였어?”

“얼굴은 못 봤어요. 좋은 차 타던데요?”

“그래…? 뭐 사이가 안 좋아 보인다거나 그런 건 없었어?”

“모르겠어요. 그냥 차 오자마자 바로 타고 가서…”


한 대리는 승태의 얘기를 듣자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다정은 승태와 한 대리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김 주임의 남자친구 얘기를 듣자니 묘하게 마음이 불편해졌다. 한 대리한테 특별한 감정이 있다기 보다는 옆에서 보고 있자니 그저 한 대리가 안쓰러웠다. 김 주임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대리님은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내가 뭘 어쩔 수 있겠어. 나리 씨에 대해서도 그렇게 아는 게 많은 편도 아닌데. 남자친구에 대해서는 더 아는 게 없고.”

“음… 그럼 제가 한번 염탐해 볼까요?”


승태는 한 대리를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뭔가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얘기했다. 다정은 그 말을 듣자마자 승태를 말리려는 듯 한 대리 몰래 승태의 허벅지를 지긋이 누르며 쳐다봤다.


“에이, 뭐 하러 그렇게까지 해. 승태 씨는 같은 회사인데 괜히 불편해지면 어쩌려고. 어차피 난 끝났어. 오늘은 그냥 하소연이나 하려고 부른 거야.”

“아… 네…”


한 대리의 말이 끝나자 다정은 안심한 듯 승태의 허벅지에서 손을 뗐다.

그 뒤로도 한 대리의 한숨은 계속 됐다. 어쩌다보니 한 대리의 지난 연애사까지 듣게 되었는데 생각보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있어 적극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정도 그동안 몰랐던 한 대리의 과거를 듣더니 제법 흥미가 생겼다. 여의도에서 같이 저녁 먹었을 때도 느꼈지만 확실히 회사 사람들은 밖에 나와봐야 그 사람을 확실히 알 수 있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었다.

다 먹고 나서 계산은 한 대리가 했다. 하찮은 하소연 들어줘서 고맙다는 말도 함께 했다. 나름 인사를 밝게 하긴 했지만 어딘가 축 처져보이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승태와 다정은 피곤이 몰려와 잠옷으로 갈아입고 그대로 침대에 널부러졌다. 다정이 승태에게 씻어야지 하고 말했지만 정작 다정 자신도 일어나 씻을 힘이 없었다. 괜히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근데 진짜 한 대리님 의외다. 그런 사람인 줄은 몰랐어.”

“나도 몰랐어. 같은 회사였던 사람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른 사람 같았어.”

“진짜 염탐 한번 해볼까?”

“에이, 하지 마. 해도 한 대리님이 알아서 해결해야지 네가 나서서 뭘 어쩌게.”

“그런가… 재밌을 것 같았는데…”


다음 날 승태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회사에 출근했다. 오늘따라 웬일로 일찍 온 김 주임이 승태에게 인사를 건넸다. 승태는 어제의 일이 떠올라 건성으로 인사를 받고는 자리에 앉아 컴퓨터가 켜지는 동안 잠시 책상에 엎드렸다. 회식의 피로가 풀리기도 전에 한 대리와의 술자리까지 더해지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피곤했다.


“승태 씨 피곤한가봐?”

“네… 좀 피곤하네요.”

“누구랑 약속이었길래 그렇게 피곤해 해?”

“다정이랑… 아, 어제 한 대리님도 오셨어요.”

“아, 상철 씨?”


승태는 이때다 싶었다. 그래, 이건 내가 염탐하려고 한게 아니라 김 주임이 먼저 물어본 거야.


“네. 주임님 남자친구 있는 걸 몰랐다고 하더라구요.”

“그래?”


김 주임은 잠시 생각에 빠진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뭔가 고민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승태 씨 오늘 나랑 점심 좀 먹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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