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와! 너무 축하해! 왜 아까 얘기 안 했어!”
“놀래켜 주려고 했지! 진짜 내가 얼마나 입이 근질근질 하던지.”
승태는 벌떡 일어나 다정에게 거의 매달리다시피 끌어 안고는 머리를 이리저리 막 헝클어트리며 기뻐했다. 다정도 그런 승태를 끌어 안으며 합격의 기쁨을 함께 나눴다. 오늘 밤은 이렇게 보낼 수 없다며 승태는 냉장고에 들어 있던 술 한 병을 더 꺼내와 뚜껑을 열었다.
다정의 입사는 한 달 뒤로 확정됐다. 그 사이 지정해준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으라는 회사의 요청이 있었고 입사 약 일주일 전에 건강검진을 받는 걸로 병원에 예약도 걸어 두었다. 다정은 왠지 자신보다 더 신나서 방방 뛰는 승태를 자리에 얌전히 앉혀 놓느라 진땀을 뺐지만 어쨌든 신나는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생각보다 퇴사 후 이직까지 텀이 길지도 않았고 원했던 회사에 입사를 하게 됐으니 이보다 더 기쁠 수는 없었다.
“진짜 축하해. 조만간 맛있는 거 먹으러 가야겠는데?”
“헤헤 맛있는 거 사줄 거야?”
“그럼그럼!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다 말해!”
“아싸 박승태 지갑 거덜내야지!”
승태와 다정은 합격의 기쁨을 함께 나누며 늦은 시간까지 웃고 마시며 놀았다. 다음 날 승태가 출근하려고 일어났을 때 머리가 살짝 아프긴 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승태는 나가기 전 새근새근 자고 있는 다정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주고는 출근을 했다.
다정은 늦잠을 푹 자다가 점심 먹기 조금 전에 일어났다. 장마도 지나고 소서도 지나면서 여름 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려는 듯했다. 비몽사몽한 상태로 미적거리며 일어나 냉장고에서 시원한 냉수 한잔을 마셨다. 밖에서 희미하게 매미 소리가 들렸다. 다정은 슬슬 에어컨을 켜야할 때가 됐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아침 겸 점심을 가볍게 먹은 뒤 재즈 라이브를 틀어 놓고 에어컨 필터를 청소했다. 시간도 넉넉하고 느긋하게 청소를 하니 그렇게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여느 때와 같은 평화로운 여름의 오후였다.
장마가 끝난 뒤의 여름 하늘은 맑음 그 자체였다.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고 사람들의 옷차림은 한결 가벼워졌다. 다정은 집에만 있기엔 뭔가 심심하고 지루해서 모자를 쓰고 산책을 나왔는데 금세 모자 안으로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래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활기가 느껴지는 것만큼은 좋았다.
그렇게 산책을 하는 중에 혁준에게 전화가 왔다. 얘가 이 시간에 웬일이지.
“어 혁준. 어쩐 일이야 이 시간에?”
“야 다정아. 오늘 저녁에 혹시 시간 되냐?”
“오늘? 별일 없긴 한데 왜?”
“김서연 또 남친한테 차였대. 간만에 모이자.”
“뭐? 어휴 알았어. 승태는?”
“승태한테 먼저 전화하고 너한테 한 거야. 이따 올 건데 바빠서 너한테 전화 좀 해달래.”
“아 그래? 알겠어. 이따 봐 그럼.”
다정은 발걸음을 돌려 다시 집으로 향했다. 이번엔 또 뭐 때문에 그랬을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씻고 나갈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생각이 꼬리를 물었지만 답이 나오지는 않았다. 게다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혼자서 전시회니 뭐니 잘 다녔는데 언제 남자친구가 생긴 걸까 싶기도 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서연에게 연락을 하고 싶었지만 이따 만나서 자세히 얘기를 듣기 위해 꾹 참고 승태에게만 연락을 해뒀다.
주말을 앞둔 강남역에는 사람이 치일 정도로 많았다. 전철 안에서도, 전철을 내려서도, 심지어 역을 빠져나와서도 사람들을 이리저리 피하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다정은 혁준에게 연락 받았던 근처 이자카야로 향했다.
“어서오세요. 몇 분이세요?”
“일행 있어요.”
직원을 지나쳐 가게를 두리번거리며 들어오니 저 멀리서 혁준이 손을 흔들었다. 다정도 가볍게 손을 흔들고 테이블로 가니 서연은 이미 한 병 정도를 마신 듯했다. 다정을 보자마자 서연이 울상을 지었고 다정은 그런 서연의 옆에 앉았다.
“뭐야 무슨 일이야 대체?”
“몰라 나도. 어휴.”
“서연이 남친이랑 헤어졌다며. 아니, 언제부터 남자친구가 있었어?”
“그게에…”
서연은 울먹이며 얘기를 이어나갔다. 같은 회사에서 일하는 직원이 남자 소개를 받지 않겠냐며 서연에게 다가왔고 마침 요즘 좀 심심했던 서연이 소개팅을 하겠다고 한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 생각보다 잘생긴 얼굴에 다정한 성격이 서연의 마음에 들었는데 몇 번 만나서 밥을 먹거나 데이트를 했을 때도 그다지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길래 홧김에 서연이 고백해서 사귀었다는 것이었다.
사귀기 시작한 뒤에도 대부분의 시간을 남자친구와 함께 보냈다고 한다. 맛있는 걸 먹으러 갈 때도, 재밌는 영화나 전시회를 보러 갈 때도, 게임을 할 때도 남자친구는 서연이 부르면 항상 달려와 주었고 그런 부분이 서연에게는 행복으로 다가왔었다. 그런데 서연의 남자친구는 그렇지 않은 듯했다. 무슨 일이든 함께하고 싶어하는 서연과 달리 서연의 남자친구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막상 만났을 때도 서연처럼 텐션이 높은 사람이 아니었다. 다정했던 남자친구의 행동은 말 그대로 다정함에서 나왔을 뿐 서연과 함께 노는 게 즐거워서가 아니라는 걸 서연은 알게 된 것이다.
문득 승태와 사귀기 전 나랑 노는게 제일 재밌다고 했던 승태의 말이 떠올랐다. 우린 8년을 친구로 지냈고 그러다 연인 사이가 되었으니 같이 노는 게 재밌고 편한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심지어는 다들 그렇게 연애를 하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쩌면 가장 평범하다고 생각했던 우리가 가장 특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진짜 남자들 이상해. 그냥 다정하기만 하면 다 되는 줄 알아.”
“다정하기라도 한 게 어디야. 안그러냐 다정아?”
“최혁준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서연이 슬퍼하잖아.”
“그니까 남자 좀 잘 알아보고 사귀라고 말 했잖아.”
서연의 한탄과 혁준의 놀림이 오고가는 사이 승태가 도착했다. 야근 때문에 늦었다고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데 혁준이 다정에게 일어나라고 하더니 서연의 옆으로 가 앉았다. 자연스럽게 다정은 승태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뭐야 왜 갑자기 자리를 바꿔?”
“너 다정이랑 앉고 싶을 거 아냐.”
“뭐 고맙긴 한데 별일이네 네가 이런 것도 신경 쓰고.”
“뭐래냐. 늦게 왔으면 술이나 마셔.”
혁준은 늦게 온 승태의 잔을 가득 채워줬고 넷이 함께 잔을 부딪혔다. 무슨 일 있었냐는 승태의 물음에 혁준과 다정이 서연이 했던 얘기를 최대한 자세하게 정리해서 얘기해줬다. 승태는 고개를 끄덕끄덕 하고 중간중간 리액션을 해주며 얘기를 차분히 들었다. 얘기하는 도중에도 서연이 혼자 계속 술을 마시려 하는 것을 옆에서 혁준이 말려주었다.
“근데 서연이 네가 그렇게 좋아하고 그 남자가 그렇게 다정한 사람이면 아직 다시 잘해 볼 여지가 있는 거 아냐?”
“그런 거 아냐… 날 계속 따라다닐 자신도 없고 그렇게 따라다닐 만큼 날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대…”
“와… 그건 좀 심했다… 아예 결심을 하고 얘기를 했나 보네.”
“어휴 하여튼 김서연 진짜 손 많이 가.”
“아유 혁준아 좀! 서연아 참아 참아.”
옆에서 까불거리는 혁준이에게 서연이 술병을 거꾸로 들고 때리려는 걸 다정이 겨우 말렸다.
“어우 죽을 뻔했네. 미안 미안. 근데 얼마나 만났냐?”
“두 달 정도…”
“야 잘했어 잘했어. 걔는 네 달을 만나든 2년을 만나든 네가 훨씬 아까워.”
“진짜…?”
“그럼! 야 걔 뭐 별 거 있냐? 네가 훨씬 나아.”
놀리는 듯한 말투지만 혁준이 서연을 위로해주자 서연도 조금은 기분이 풀리는 듯했다. 그 뒤로도 몇 번 더 혁준이 서연의 자존감을 높여주며 등을 토닥여주자 제법 괜찮아 보였다.
“아휴 그래. 술이나 먹자. 근데 너네가 봐도 내가 텐션이 그렇게 높아?”
“너? 우린 하도 오래 봐서 그런가… 잘 모르겠는데. 다정이도 너랑 비슷해서.”
“그래도 너 정도면 높은 편일 걸? 나 아는 다른 여자애들 생각해 보면 좀 그렇긴 해.”
서연의 텐션에 대해 승태와 혁준의 의견이 갈렸다. 혁준은 이어서 그래도 자기는 텐션이 낮은 것 보단 높은 게 좋다며 우리가 이렇게 같이 모여서 노는 게 너무 즐겁다고 했다.
“그냥 너네 둘이 사귀라니까.”
“야 박승태 진짜 말 그따구로 하지?”
“내 말이. 너 뒤져 진짜.”
승태가 서연과 혁준을 동시에 놀려대자 당장이라도 죽일 듯이 혁준과 서연이 승태에게 달려들었다. 승태는 둘을 피해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일어났고 혁준도 같이 가자며 따라 나갔다.
“야, 승태야.”
“어?”
“너 다정이랑 어떻게 사귀게 됐다 했지?”
“우리? 음… 잘 맞아서?”
“아니 그런 거 말고 임마. 어떻게 친구에서 그렇게 됐냐고.”
“음… 다정이가 나한테 자기 좋아하는 거 아니냐고 물어본 적 있었거든. 그때부터였던 것 같은데?”
“그래?”
“왜?”
혁준은 손을 씻으며 잠시 말이 없더니 물을 잠그고 비장하게 승태에게 말했다.
“나 서연이 좋아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