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세상사는 인과율(因果律)과 정반합(正反合)이 결합된 뫼비우스의 띠다. 개개의 선택의 결과인 인과율이 하나 둘 고리를 만들고, 그 고리들이 연결된 사슬은 정반합을 이루며 앞으로 나아간다. 개인의 삶에서 한 나라의 흥망성쇠까지, 그리고 세계사의 흐름도 그러하다.
인과율과 정반합의 메커니즘을 작동시키는 힘은 인간의 이성과 본능이다. 이성은 더 나은 것, 더 근원적인 것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다. 그런데 본능은 욕망이다. 처음엔 이성이 욕망을 통제하며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지만, 어느 순간 욕망이 주인의 자리를 빼앗아 이성을 호령한다. 그렇게 정(正)이었던 것이 점점 과해지고 넘쳐서 결국 극에 달하면 반(反)이 등장한다. 욕망에 이끌려 당도한 벼랑의 끝에서 극적으로 주도권을 되찾은 이성이 방향을 트는 것이다. 정과 반이 모여 합(合)으로 나아가고, 그 합은 다시 정이 되어 새로운 사이클을 시작한다.
예를 들어보면, 미술은 그리스에서 인간에 천착해 헬레니즘으로 최고점을 찍은 후 로마에서 신으로 방향을 틀었다가, 15~16세기에 다시 인간이 중심이 된 르네상스로 돌아간다. 원근법이 성립됐고 자연에 과학적으로 접근했으며 인체의 해부학적 구조와 수학적 비율을 추구했다. <모나리자>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다비드상>의 미켈란젤로, <아테네학당>의 라파엘로가 르네상스를 주도한 예술가들이다.
17세기엔 절대왕정의 영향을 받아 동적이며 남성적 경향이 강한 바로크미술, 18세기엔 그에 대비되는 화려하고 장식성이 강한 여성적 성향의 로코코미술이 나타났다. 이후 바로크와 로코코에 대한 반동으로 그리스·로마로 회귀하는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등장했고, 다시 그에 대한 반발로 빛과 색에 대한 순간적이고 주관적인 느낌 표현에 중점을 둔 인상주의가 시작됐다. 20세기로 넘어오면서부터는 야수파, 입체파, 표현주의, 미래파, 초현실주의, 추상주의 등이 등장했다.
한반도의 역사는 어떤가. 3세기에는 해상무역을 통해 경제력, 외교력, 군사력을 키운 백제가 주도권을 잡았고, 4세기에는 고구려가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을 앞세워 패권을 잡았으나, 6세기 외교와 국방력 강화에 힘쓴 신라가 결국 7세기에 삼국을 통일한다. 이후 고려와 조선이 차례로 등장했고, 사라졌다.
이렇게 군주정의 시대, 국가는 창업(創業), 수성(修城), 경장(更張), 쇠퇴(衰退)의 흐름을 반복한다. 그러한 군주정 국가들의 흥망성쇠가 이어지다가, 군주정이 반(反)이 되고 공화정이 정(政)이 되는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
물론 그 정반합의 사슬을 이룬 인과율의 고리 중엔 일제강점기, 한국전쟁도 들어있다. 일제강점기는 세계를 파멸 직전까지 몰고 간 제국주의의 극한이 만들어낸 반(反)이었고, 한국전쟁은 세계를 양분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대립의 극한이 만들어낸 반(反)이었다. 세계의 거대한 정(政)과 반(反)의 물결이 정면으로 부닥치는 틈바구니에 끼어서, 한반도는 으깨졌고 바스러졌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열심히 달렸다. 산업을 키우고 경제를 발전시켰다. 오직 선진국이라는 정(政)을 향한 일념으로. 그 결과 한강의 기적, 아시아의 네 마리의 용을 거쳐 반세기 만에 세계 10대 경제대국이라는 타이틀을 손에 쥐었다. 그런데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이 수직에 가까운 정(政)의 치솟음 끝에서 우리는 당황하고 있다. OECD 자살률 1위, 세계 최저 출산율, 최고 속도의 노령화, 교육의 붕괴, 후진국형 대형 사고들, 그리고 지금껏 나타난 적 없었던 반사회적 강력범죄들까지.
이것들이 바로 반(反)의 얼굴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급진적 발전과 변화, 그 안에서 뒤처지고 뒤틀리고 뒤엎어진 것들이 더 이상 억누르지 못하고 쏟아낸 울부짖음이다. 많은 사회학자들은 말한다. 지금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들은 다른 나라들이 수백 년에 걸쳐 이룩한 것들을 반세기 만에 달성한, 급격한 성장에 따른 성장통이라고. 이 과정을 슬기롭게 잘 극복하면 성장 능력과 함께 위기 대처 능력까지 갖춘 최고국가로 나아갈 수 있다고.
어떤 식으로든 정반합은 성립할 것이다. 우리는 늘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은 인과율의 고리를 만들고, 그 고리들이 모여서 정반합의 사슬을 이어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방향성이다. 바로 지금이 정(政)과 반(反)을 모아 합(合)의 방향을 잡아야 하는 타이밍이다. 앞서 뫼비우스의 띠를 언급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관점에서 했던 이야기인데, 바라기는 그 뫼비우스의 띠가 끊어져버렸으면 좋겠다. 그리고 다시 한번 수직에 가까운 우상향으로 치솟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