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의 온도_17

by 슬로우

그날 이후로 백승아는 커피를 좀 더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예전엔 문을 열자마자 도윤에게 “진하게 한 잔!”이라고 외치고, 받자마자 반쯤 단숨에 들이켰다. 마치 커피가 하루의 시작을 밀어붙이는 부스터라도 되는 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날, 조용히 울고, 말없이 건네받은 커피 한 잔의 온도가 몸속 어딘가 오래 남았다.


그날 이후 첫 아침. 치킨집 셔터를 여는 속도가 느려졌다.


몸이 무거워서가 아니라, 그저 조용히 움직이고 싶었다. 문을 열고, 장사 준비를 하기 전, 승아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가게 입구, 테이블들, 벽에 붙은 메뉴판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까지는 먹고살려고 버텼고, 이제부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해 보자.’


그녀는 처음으로 ‘장사’ 말고 ‘생활’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점심 전, 승아는 평소보다 일찍 ‘더 슬로우’에 들렀다. 도윤은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걸 보고 익숙한 인사로 맞았다.


“오늘은 진하게? 아니면… 부드럽게?”


승아는 작게 웃었다.


“오늘은, 그냥… 따뜻하게.”


말투는 평소보다 낮았지만 그 안엔 어제보다 한 걸음 더 살아낸 사람의 숨결이 느껴졌다. 창가 자리에 앉은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가계부 앱 대신 메모장을 열었다.


그리고, 몇 가지 단어들을 적었다.


‘가게 홍보하기?’

‘테이블 위치 변경 고민해 보기’

‘가게 휴무일을 월요일에서 일요일로 바꿔볼까…?’


그녀는 생각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더 버는 법이 아니라, 더 오래 살아남는 법 아닐까?’


잠시 후, 서지윤이 커피숍 문을 열고 들어왔다. 도윤은 짧게 고개를 들어 인사했고, 지윤은 조용히 안쪽 창가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들어설 때 백승아도 자연스럽게 시선을 들었지만 곧 다시 커피잔으로 시선을 내렸다.


지윤 역시 누군가의 시선을 느꼈지만, 서로 딱히 인사할 사이도 아니었고, 말을 나눠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단지 몇 번 마주쳤던 얼굴, 서로를 ‘아는 것 같은 낯섦’으로 스쳐갔다. 하지만 그 잠깐의 시선 속에서 둘은 어쩐지 서로가 혼자인 걸 안다는 느낌만은 공유한 듯했다. 그리고 아무 말없이, 서로 마주 보지 않은 채 각자의 커피를 마시며 잠시 같은 시간 안에 앉아 있었다.


가게로 돌아가는 길에 백승아는 평소 지나치던 인근 과일 가게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작은 인사에, 아주머니도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내가 먼저 인사한 게… 얼마만이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후 장사는 여전히 썰렁했다. 배달도 뜸했고, 홀엔 텅 빈 의자만 늘어져 있었다. 하지만 승아는 휴대폰만 들여다보지 않고 매장 바닥을 조금 더 깨끗이 쓸었고, 치킨무 용기의 각도를 맞췄다.


별일 아닌 행동들이었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지금 이건 ‘장사를 잘하겠다’는 의지가 아니라, ‘나를 좀 더 잘 살아내 보자’는 태도라는 걸.


그날 밤, 가게 안 조용한 조명 아래 백승아는 테이블에 앉아 한 줄을 노트에 적었다.


'망해도 괜찮다는 말은 아직 못 믿겠지만, 괜찮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조금씩 해보기로 했다.'


커피 한 잔의 온도처럼 삶은 갑자기 뜨거워지지 않았고, 그녀의 가게도 여전히 작고 조용했지만 그날부터 백승아의 하루는 조금 다르게 시작되고 있었다.

수,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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