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겨울새 Winter Robin Jan 24. 2022

뚜껑이 열리면 내 기운만 날아간다

기분 전환은 신속하고 정확하게

꼭 뭘 해도 엉켜버리는 날이 있다.


오늘이 딱 그랬다.


아침에 일정이 있어서 몇 시간 전, 새벽에 일어났다. 대략 서너 시간을 잤는데 긴장감 때문에 졸린 것도 몰랐다. 그러다 아침에 잡혀있던 일정이 미끄러져 다시 약속을 잡느라 진땀을 뺐다. 결국 괜히 적게 자고 동트기 전에 일어나서 혼자 난리를 쳤다. 하지만 화가 나진 않았다. 아는 사이일 뿐만 아니라 평소 내게 호의를 갖고 다정하던 상대였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따스함이 느껴지는 지인의 실수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수면부족 상태로 밤까지 버티려던 게 문제였을까? 아니면 그것과 상관없이 약해진 내면 때문일까? 어쩌면 아침의 긴장감과 허탈감이 나도 모르게 쌓여있었는지도 모른다.


바깥은 위험한 세상이다. 줄을 서있던 중 너무나 갑작스럽게 사납고 공격적으로 나한테 뭐라 하는 처음 보는 어떤 아저씨 덕분에 내 머랭 같은 멘털에 움푹, 커다랗고 깊은 구멍이 생겨버렸다. 내게 뭐라 할 게 아니라 아저씨나 제대로 알고 줄 좀 잘 서시라고 하고 싶었는데, 그 자리에서 싸울 수도 없었다. 억울함과 제대로 할 말을 못 했다는 패배감. 그 아저씨는 별 생각이 없거나, 역시 자기 말 한마디면 뭐든 된다는 생각을 얻었을까. 그런 상상에 더더욱 화가 난다. 혼자 예민하게 구는 건가 싶었는데, 함께 있던 지인이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왜 저렇게 공격적이냐고 혀를 찼다. 그나마 내 망상은 아니었나 보다.


하지만 더 억울한 건 그렇게 망쳐버린 기분 때문에 그 뒤로 화가 나서 잃어버린 내 시간이다. 아는 사람과 마찰이 생겨도 언짢은데,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공격받은 듯한 기분은 그야말로 황당하고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되나, 굉장히 속상하다. 그 아저씨는 별생각 없는 동안, 나는 갈 데 없는 짜증과 억울함을 끌어안고 삭혀야만 했다. 그 아저씨는 내 시야는 물론 인생에서 사라진 지 오랜데, 그 찌르는 듯한 눈빛이나 말투가 여전히 피부 위로 느껴지는 것 같다. 결국, 한 시간 가량을 그 찝찝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오늘 운이 안 좋은 것 같아 집에 일찍 들어갈까 싶었지만, 이대로 가면 푸쉭푸쉭 집에서도 남은 스팀을 처리하느라 고생할 것 같았다. 새벽부터 깨어있어서 넘실거리는 수면욕과 더욱 증폭된 억울함이 뒤섞인 상태로 카페로 향했다. 잠시 다른 일에 몰두하면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까. 이미 내 인생의 한 시간이나 낭비해버렸다.


예쁘게 담지는 못했지만, 실물은 정원처럼 예뻤던 시즌 음료.

전부터 눈여겨보던 괜히 비싼 가격의 음료를 기분전환이라는 적절한 핑계로 주문했다.


아아, 좋다.

분이 정말 좀 나아졌다. 난 생각보다 단순한 인간인가? 태블릿 PC를 꺼내서 할 일을 하다 보니 열린 내 뚜껑 속의 김이 그 사이 다 빠져나갔는지, 독특한 향기를 담은 음료를 음미할 수 있었다.


한 시간을 낭비했기에 자연히 화가 빠져나간 걸까, 기분전환을 하는 행위를 통해 그런 걸까?


사실 답은 모르겠지만, 후자였으면 좋겠다. 지갑은 조금 가벼워졌지만 속까지 타오르는 듯한 그 몹쓸 기분과 다시는 살 수 없는 내 시간이 그딴 이유로 증발해 버린 게 너무나 속상하니까.


그러니 다음에라도 또 이런 방식으로 뚜껑이 열릴 것 같은 상황이 오면, 내 에너지는 물론 내 시간까지 줄줄 빠져나간다는 걸 기억하자. 깊은 빡침이라는 명분을 가진, 나중에 나만 땅을 치게 되는 시간 낭비다. 정확하고 신속하게, 내 마음을  환기시킬 수 있는 게 뭔지 생각하고 재빨리 실행해야겠다.


그런데 과연 다음에도 이 수법이 통할까...?

부디 그렇길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꼴도 보기 싫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