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코패스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고.
사이코패스 된 기분으로 먹고 그래.
채식일기도 어느덧 3주차다. 지금까지 쓴 일기는 모두 SNS에 공유했는데, 많은 분들이 재미있는 댓글을 달아주셨다. 이번 주에 특히 기억났던 댓글은 사이코패스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고기를 먹는다고 했던 말이다.
동물권 때문에 채식을 한다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 것과 똑같은 이유로, 처음에는 그 댓글이 잘 와닿지 않았다. 단지 '생명에 애정이 많은 사람들이구나' 생각했을 뿐이다.
오히려 일말의 동정이나 연민 따위를 못 느끼는 내가, 사이코패스인가 싶었다. 고기 조각을 보면서 '맛있겠다'고 생각했을 뿐, 동물을 떠올린 적 없었으니까.
이번 주에는 그 댓글이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채식에 관한 정보들을 찾아보면서 우연히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는데, 그 이후로는 육류나 생선 따위에 거부감이 느껴졌다. 물론 나는 악착같이 이기적인 사람이라 단지 동물이 잔인하게 도축되는 장면만으로 그런 거부감을 느끼게 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동물 소비 뒤에 숨은 기업 및 단체 비리, 그로 인해 사람들이 얻는 육체적인 피해 등 실용적인 이유가 훨씬 컸다. 그럼에도 식탁에 올라온 동물 반찬들을 보면 즉각 떠오르는 것이 공장식 축산, 도축 등 자극적인 장면임은 부정할 수 없다.
다큐를 연달아 세 개를 보고, 며칠 간은 고기는 입에도 대기 싫은 기분이었다. 다행히 혼자 식사할 일이 많아서(일부러 그랬던 것 같기도) 과일이나 야채 죽을 사 먹었다. 죄책감에서도 벗어나고, 건강해지는 느낌도 들고 생각보다 맛이 없는 것도 아니고. 좋았다. 문제는 며칠 뒤에 터졌다.
작년에 함께 작업했던 작가님이 오랜만에 얼굴 좀 보자며 만나자고 하셨다. 같이 일했던 친구들도 온다고. 만나서 한참 얘기를 나누다 갑자기 초밥을 먹으러 가자시는데, 따라 나설 수밖에 없었다. 꼭 가야했던 자리도 아니고, 눈치 보여서도 아니고, 먹고 싶어서. (초밥은 내가 가장 즐겨먹는 외식 메뉴다.)
'저건 수은 덩어리야.'생각하면서도 꾸역꾸역 입에 밀어넣었다. 그리고 살치살 초밥을 먹는 순간, 친구의 댓글을 이해했다.
다큐에서 봤던 반인륜적인 도축 장면들, 항생제를 투여하는 모습, 생선을 믹서기에 가는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데 '맛있다'는 생각이 든 순간. 사이코패스가 된 기분이 들었다.
조금 우울해져버렸지만 어쨌든 이번 주에는 저런 일이 있었고, 이후로 함께 식사하는 사람에게 채식 식당을 제안해보거나 혼자 먹을 때는 비건(완전 채식)으로 지내고 있다. (심지어 마지막 사진은 술 안주다...과일 안주를 내 돈으로 시키는 날이 오다니.)
다큐의 여운이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완전 채식은 불가능할 것 같다. 지금은 소름 돋게 드는 거부감도 점점 옅어질테고, 언젠가 나도 댓글을 단 친구처럼 사이코패스가 된 기분으로 육식하기를 자처하게 될 것이다. 다만 이런 자의적인 이유 외에, 타의적으로 어쩔 수 없이 육식을 해야 할 때가 많다.
다른 사람과 함께 식사할 때다. 기대한 건 아니지만 역시나, 채식 식당을 제안하면 대부분 거절 당했다. 채식주의자인 내 친구는 아예 식사시간에는 약속을 잡지 않는다고. 나쁘지 않은 방법인 것 같다만, 더 좋은 방법은 없을까?
생각해보면 내게있어서도 채식의 가장 큰 진입장벽은 '맛'이었다. (프롤로그에서 말했듯, 내가 채식을 시작한 이유도 편식을 고치기 위함이었으니까.) 그런데 '생각보다 괜찮네' 정도가 아니라 '진짜 맛있네?'라는 생각이 드는 음식들이 많았다. 이런 식당들이라면, 이렇게 맛있는 메뉴가 있는 곳이라면 비채식인들도 즐겁게 식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너무 맛있어서 재방문한(앞으로도 계속 갈) 채식 맛집을 소개해보려고 한다.
수카라는 자그마치 '홍대'에서 6년 간 롱런중인 맛집이다. 김수향 대표는 재일교포로서 후쿠시마 원전 이후 음식 조리 과정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남긴 후기를 보면 대부분이 매장에 들어가자마자 눈에 띄는 ㄷ자 바에 대해서 얘기한다. 이는 조리 과정을 완전히 오픈하겠다는 대표의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수카라는 홍대 산울림 극장 1층에 위치해있다는 것.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연극을 보여주듯, 수카라 역시 주방을 무대로 생각하여 연극하는 마음으로 요리한다.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다. 재미있게도, 이 식당을 알게 된 건 '사이코패스'댓글을 달아준 친구 덕이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이었는데, 그때의 나는 채식주의자 친구와 술을 마시러 가서 차돌박이 숙주볶음 어떠냐(넌 숙주먹고, 난 차돌박이 먹고)고 웃으며 물을만큼 채식이 낯설었다.
그런데 처음 만나는 사람이 홍대에 맛있는 채식 식당이 있다며, 어떠냐고 묻는데 '저 야채 싫어해요...'말하기는 또 부끄러웠다. 한창 브런치에 빠져있던 때인데 다행히 오믈렛 메뉴가 있길래 알겠다고 했다.
알겠다고는 했지만 만나는 당일까지도 과장 없이 머리가 아팠다. 과연 내가 채식 요리를 소화해 낼 수 있을까... 지금이라도 다른 식당을 제안하는 게 좋지 않을까... 약속 장소를 바꿔볼까... 오만 고민을 다하다가 결국 조마조마하며 따라갔는데, 의외의 맛에 엄청 놀랐던 기억이 있다.
그때도 시그니처 메뉴인 구운채소 버터커리와 신안마을 유정란 치즈 오믈렛을 시켰는데, 이번에도 똑같이.
그때는 브런치를 좋아해서 오믈렛을 시켰는데, 뺏어먹었던 친구의 커리도 맛있었던 기억에 커리를 시켰다. 채소를 싫어해서 커리만 야금야금 찍어먹었는데, 이번엔 채소도 먹어보기로 다짐. (사진 보니 또 가고 싶다.)
처음 메뉴를 받고는 정말 먹을 만한 게 하나도 없어서 당황했다. 감자 정도? 연근도, 당근도, 파도, 버섯도, 애호박은 물론 단호박까지 전부 좋아하지 않는 음식이었다. 아마 처음 왔을 때 커리를 시켰더라면 밥이랑 커리 빼고는 다 남겼을테다.
하지만 지난 3주간 편식 고치기에 단련(?)이 되기도 했고, 채식이 얼마나 좋은지도 알았으니 먹어볼 용기는 낼 수 있었다.
결과는, 짠! 양이 많아서 한 숟갈 남긴 것 빼고는 다 먹었다. 특히 채소를! 같이 간 분도 편식을 하는 분인데, 구운 파를 드시면서 '파가 이렇게 맛있을 수 있는 재료인지 몰랐다'면서, 다른 채소들도 시도해보시더라.
보통 채소가 맛있다고 하는 분들은 재료 본연의 맛이 잘 느껴져서라고 하는데, 오히려 수카라에서는 본연의 맛은 잘 느껴지지 않지만 채소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입맛에도 맞게 맛있게 구워줘서 깨끗하게 비울 수 있었던 것 같다.
수카라는 식당과 카페를 겸하는데, 메인 요리가 너무 만족스러워서 디저트도 먹어보기로. 두부 치즈 케이크, 라씨, 두유 음료 등 신기한 메뉴가 많았는데 그 중에 비건인 스탭이 만든 비건 아이스크림이 있다기에 주문해봤다.
음... 맛은 그냥 그랬다. 시나몬 향이 나는 것과 위에 튀밥을 올려주는 게 신기했는데, 식감도 평소에 먹던 쫀득쫀득함이 아니라 뚝뚝 끊어지는 느낌이어서 조금 낯설었달까. '건강한 맛'하면 생각나는 그런 고소함 정도가 특징이라 할 수 있겠다.
이번 주는 수카라를 소개했지만 실은 다섯 군데 이상의 채식 식당을 다녀왔다. 다음 주에도 외식을 하게 되면 채식 식당을 가게 될 것 같아서, 맛있는 곳을 차례로 소개해보려고 한다.
채식은 풀이고, 풀은 맛없다는 고정관념을 깨주는 채식 식당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다. 정말 친한 친구는 채식에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내가 졸라서(...) 몇 군데 가보더니 너무 맛있다고, 건강한데 맛있기까지 하니 자주 오고 싶다고 하더라.
앞으로의 리뷰가 널리 퍼져서 "뭐 먹을까?"할 때 내가 소개한 채식 식당이 언급되는 일이 많아졌으면!
채소를 맛있게 먹을 용기가 생겼다.
수카라 외에도 많은 채식 식당을 가봤는데, 하나하나 소개할 생각하니 설렌다.
동물권 때문에 채식하는 이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내 건강을 위해서라도 육식을 줄여야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저께 조미료의 추억에 유혹 당해서 새마을 식당 7분 돼지 김치찌개를 먹으러 갔다. 고기는 한 덩이만 먹고 다 남겼지만 발걸음을 했다는 것 자체가 조금 아쉬운...
아직 채식을 한다고 해도 친구가 맛있는 거 먹자고 하면 뿌리칠 단계는 아닌 것 같다.
https://brunch.co.kr/@thinkaboutlove/88
'그린을 더하다' 도시에서 시도해볼 수 있는 그린 라이프를 제안하는 매거진, 에드지와 함께하는 콘텐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