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9.14-9.15
[ 어쩌면 가장 화려했던 시절, Hanoi girls ]
우리말로 '사랑'을 뜻하는 친구의 이름은 '아이(Ai)'. 일본에서 온 그녀와 한국에서 온 나는 4년 전, 베트남 하노이에서 만났다. 그곳에서 우린 각자의 본국 회사에 소속된 주재원으로서 코로나를 맞이했고, 오도 가도 못하는 국경의 봉쇄 시기를 서로의 공간과 음식과 시간을 나누며 보냈다. 그녀를 알게 된 건, 내가 하노이에서 사귄 첫 번째 친구였던 말레이시아에서 온 Ann marie와 그녀의 절친으로 일본에서 온 Mina의 식사 초대였던 것 같다. 교회 모임 멤버였지만 사는 동네가 멀었던 Ann과 Mina보다, 어느 순간부터 집이 가까웠던 Ai와 또 다른 일본 친구 Megumi, 멕시코에서 온 Mel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회사에서는 대부분 가족들과 함께 왔던 남성 주재원들과 식사하고 이따금 골프로 어울렸지만, 퇴근 후와 주말은 나와 비슷한 상황이었던 그녀들과 함께였다. 가끔은 나를 걱정하는 베트남 직원들이 현지 체험의 시간을 내어주었지만, 관심을 오롯이 주목받게 되는 상황이 즐겁지만은 않았다. 비슷한 나이에 하노이라는 도전을 택한 자유롭고 용감하던 싱글 여성 넷이 모여 맥주잔을 기울이고, 로컬 쇼핑 아이템으로 패션쇼를 열고, 아름다운 해변의 섬들을 여행했다. 어딘가에서 흘러나온 블랙핑크의 'Forever young'을 따라 외치던 Hanoi girls. 그 시간에 이별을 고한 건, 우리 중 가장 늦게 하노이에 왔던 나였다. '죽은 자의 날'을 맞아 화려하게 장식된 멕시칸 식당에서 지난 2년을 추억하며 내가 가장 먼저 떠났고, 이듬해 봄 Megumi가, 그 여름에 Mel이, 그 가을에 마지막으로 Ai가 떠났다. 서울과 도쿄, 독일의 보훔으로 흩어진 우리는 멀지 않아 새로운 도시에서 서로 다른 조합으로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했다. 2022년의 겨울은 내가 도쿄를 찾아 Megumi와 Ai를 만났고, 다시 서울을 찾은 그녀들과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2023년의 가을엔 독일에서 Mel과 Ai와 함께 옥토버페스트를 다녀왔고, 2023년 11월과 2024년 6월, 그리고 이번 9월은 Ai가 혼자 서울을 찾았다. 아, 8월에 그녀는 휴가로 다녀온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곧 베를린으로 회사를 옮긴다는 Mel과 짧은 여정을 함께했다.
[ 그녀와의 4번째 서울 ]
1년여 전부터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Ai가 이토록 서울을 자주 찾는 이유는 나 때문이 아니다. 너무 많은 시간을 집에서 보내야 했던 코로나 시절은 그녀에게 BTS라는 거대한 유산을 남겼다. 유튜브의 알고리즘으로 시작된 이 우연한 만남은 그녀에게 한국과 한국의 음식과 언어, 도시로의 관심을 활짝 열어주었다. 서울에서 만날 때마다 점점 늘어가는 그녀의 한국어보다 신기했던 건, 그녀가 다녀온 여행 동선과 목적지였다. BTS 멤버들 중에서도 막내 '정국'을 가장 사랑하는 그녀는 정국이 다녀온 샌드위치집과 삼겹살집, 그가 자주 먹는 불닭볶음면 소스를 찾았고 BTS 관련 전시들과 멤버들의 솔로 앨범이 나오는 일정에 맞춰 여행을 추진했다. 강북과 강남을 종횡무진하며 서울과 가까워진 그녀는 때로는 버스를 잘못 타기도 했지만, 어디로 약속을 잡든 대체로 잘 찾아왔다. 아직도 무자비하리만큼 거대한 도쿄의 JR역에서 잘 헤매는 나에 비하면 Ai는 아주 능숙하게 서울을 탐험하고 있었다. 이런 그녀이기에 혼자 온다고 해도 전 일정을 함께하기보단, 서로 맞는 시간을 맞춰 보곤 했다.
이번에는 토요일 저녁, 홍대에서 보기로 했다. 그녀가 가보고 싶어 한 삼겹살집 중 한 곳인데, 나로서는 생경한 곳이었다. 명성 있는 맛집도, 체인 브랜드도, BTS와의 연관성도 없어 의아했지만, 이면도로에 위치한 가게 앞에 도착하니 주로 중화권과 일본에서 온 외국인들로 붐벼 수기 웨이팅까지 걸어야 했다. 지난번 함께 간 간장게장 집은 거의 모든 손님이 일본인 었던 것이 생각났다. 내가 외국에서 찾는 맛집들도 한국인들로 가득했던 경험이 떠올랐지만, 음식 맛이 조금 걱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우려와 달리, 한국인보다 외국인이 많았던 이곳도 충분히 괜찮은 서비스와 음식, 가격대여서 그녀의 발견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주로 BTS 또는 일본의 세련된 스타일리스트 같은 인플루언서의 추천을 참고한다고 했던 그녀는 때때로 여행책자를 참고하기도 했었다. 금돼지 식당 같은 유명한 맛집도 다녀왔던 우리가 모두 만족했던 고깃집을 빠져나와, 여전히 버스킹이 열리고 있는 광장을 지나서 어느 한적한 2층의 바에 앉아 막걸리를 기울였다. 이제는 도쿄의 편의점에서도 쉽게 막걸리를 구할 수 있어 종종 마신다고 Ai는 말했다. 아직까지 내가 도쿄에서 Ai를 만난 건 단 한 번이다. Ai의 집이 있는 지유가오카는 도쿄 도심에서 조금은 떨어진 곳이었는데 사실 나도 이곳을 지명이 아닌, 케이크가 맛있는 한국의 카페 이름으로만 알았었다. 그 겨울, 그녀의 집에서 만들어 먹었던 핫팟은 참 따뜻했다는 생각을 하다 보니 주문한 떡볶이와 함께 웬 튀김이 가득 딸려 나왔다.
"이제 곧 추석이라, 같이 좀 만들었는데 드셔보세요."
이런 말은 어울릴 것 같지 않았던 키가 훤칠한 젊은 서버가 인심을 한 바구니 놓고 갔다. 그렇다, 일본은 추석이 없지만 그 시기를 실버위크라는 휴일로 정해 Ai가 왔고, 나는 가족들과 함께 제사는 없지만 순전히 우리가 먹기 위한 전을 한가득 부칠 예정이었다.
이틑날은 교회를 마치고 점심 무렵 명동의 카페에서 만났다. 을지로 3가의 오피스 빌딩 사이에 숨겨진 '커피 한약방' 입구를 혹시 Ai가 못 찾을까 바깥쪽에 있었는데 어느새 그녀는 더 좁은 골목 방향으로 들어와 있었다. 한참 전에 와봤던 나보다 이곳이 더 익숙한 그녀의 안내를 받아 엔틱 한 공간의 감흥을 되찾고 커피를 마시며 오늘의 일정을 논의했다. 어디서 보았을까, 그녀는 '백순대'라는 정체성이 분명한 아이템을 궁금해했고, 경동시장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며 지난겨울, 입장에 실패했던 경복궁의 야간개장 소식을 들었다. 명동에서 가까운 건 경복궁과 경동시장이지만 이 모든 일정을 반나절에 소화하려면 다시 돌아서 신림 순대타운을 가야 했다. 그곳이야말로 이 한약방보다 까마득하게 오래전, 단 한번 가본 곳이지만 말이다. 얼마 전 다녀온 이에게서 상권이 쇠락하여 예전 같지 않다는 얘기를 들어 고민스러웠지만, 잠시 내게도 여행 같은 기분이었다. 2호선을 타고 내린 곳은 과연 주말 답지 않은 한적함에 휩싸여있었고, 그나마 번듯한 단독 가게를 갈 것인지 2층의 시장식 가게를 갈 것인지 재차 고민이 들었다. 상가 입구에서 기웃둥거리던 우리는 한 어머니의 자연스러운 안내를 받아 2층의 전라도집에 앉았다. 소박한 가격에 비해 가득히 펼쳐진 야채와 당면과 순대의 향연은 실로 화려했다. 아는 맛이라고 생각했지만 양념장을 가득 찍어 깻잎에 싸 먹는 그 맛은 기대 이상으로 반가웠다. 주머니가 가벼웠던 대학생의 어느 날을 뜻밖에 오늘에서야 만났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서울약령시장이었다. 한약 다리는 냄새가 그윽한 거리를 지나 일본 잡지 '뽀빠이'에 실린 힙스터의 명소, 경동시장에 도착했다. 시장 한 바퀴를 돌며 송편 시식을 해보고 안쪽 건물의 스타벅스로 들어섰다. 사진으로 봤던 것 이상으로 압도적인 규모와 계단식 좌석에서 바라보는 시선들에 놀랐다. 옛 극장이 있던 구조를 살려 이렇게 색다른 공간으로 구현해 냈다니, 왜 진작 와볼 생각을 못했을까 싶었다. 좌석마다 방향과 분위기가 달라 기다리는 사람들은 약간의 신경전을 다투지 않을 수 없었는데, Ai가 냉큼 찾아낸 자리는 전경을 볼 수 있는 A급 좌석이었다. 이곳에만 있는 듯한 막걸리 라테를 마시며 한 동안 공간에 흠뻑 취했다.
이어서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경복궁으로 향했다. BTS가 특별 공연을 했던 궁 내를 꼭 가보고 싶어 했는데 지난겨울엔 폐장시간이 그렇게 빠를 줄 몰라 뒤돌아서야 했던 곳이다. 그런데 야간개장도 인기가 높아 내국인은 진작에 사전 예약이 끝났고, 외국인에 한해 당일 현장 구매를 허용하고 있었다. 아직 한 시간 여 시간이 남아, 지난번에도 갔던 삼청동 초입을 돌았다. 이제는 오사카에도 점포를 열었다는 화장품 브랜드를 들러, 재미난 티셔츠 가게를 발견했다. 친근한 한국적 아이템들을 골라 원하는 컬러와 레터링으로 커스터마이징 할 수 있었는데, Ai는 앞면에 '떡볶이'와 뒷면에 '소주'를 선택하고 '아이'를 한국어로 같이 새겼다. 즉석에서 프린팅 된 제품은 돌돌 말아 플라스틱 테이크아웃 잔에 담아 주었는데 3만 원이 조금 안 되는 가격으로 선택할 수 있는 재치 있는 선물이었다. 드디어 어둠 속에 빛나는 경복궁을 볼 시간이었다. 한복 풀 착장을 하지 않고서는 예매 없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을 외국인 친구 찬스로 처음 보게 되었다. 안국에 살던 시절, 바로 앞의 창덕궁을 자주 찾아 조금은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던 기와지붕의 멋스러움이 밤 중에 조명을 받으니 더욱 선명히 다가왔다. 버드나뭇잎과 달빛 사이로 환히 빛나는 경회루는 몽환적으로 아름다웠다. 이틀 간의 여정을 마치고 서촌의 기와지붕 아래 펍에서 전과 맥주를 나눴다. 나는 바로 이 전을 내일부터 열심히 부칠 것임을 엄살 부리면서도, 용인의 본가로 초대해봐야 할까 잠시 고민했었다. 지난날, 외국에 있던 내게도 명절을 함께 보내자는 제안을 해줬던 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 나는, 그 정도의 넉넉함과 사려 깊음이 없었기에 가족의 불편을 핑계로 그 생각은 두 번 접어 넣어두었다.
[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
어제 Ai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지난번 얘기한 대로 Megumi와 내년 1월 홍콩을 가는데 다음의 두 일정 중 언제가 더 좋으냐는 질문이었다. 월요일보다 금요일이 휴일을 내기에 부담이 덜 할 것 같았고 답했다. 지난봄, 갑작스레 아버지 상을 당한 뒤 좀처럼 일본을 떠날 수 없던 Megumi를 오랜만에 볼 것이다. 그러나 사실 홍콩을 가자는 약속도, 두 달 전 가을의 여운도 나는 너무 쉽게 잊고 있었다. 무심하게 덮여버린, 짙었던 날들을 다시 꺼내보려 지금부터 가까운 순서로 지난 1년을 되돌리는 월요일의 글을 짓는다. 내가 사는 곳이니까, 사진으로 보았으니까 안다고 생각했던 장소와 풍경과 맛들은 그 가을, 그녀의 옆에서 걷지 않았다면 결코 내게 오지 않았을 것들이었다. 이제는 문득 이 도시의 좋은 것들이 발견되면, 언젠가 찾아올 Hanoi girls의 Reunion을 대비하여 기억들을 잘 모아두어야겠다 싶다. 청계천을 지나 흥인지문 공원부터 낙산공원까지 성곽을 따라 걷던 그 길과 언덕 카페의 맥주 한 잔 같은 달콤함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