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연극 무대라는 상투적인 비유에 대하여
온갖 진단을 다 받아본 뒤 내가 내린 결론은, 다 맞는 말이니 굳이 구분 짓지 말자는 것이었다. 근육 긴장, 근막 뭉침, 혈관 수축, 스트레스, 자율신경 이상, 이 모든 증상의 종합 선물세트가 나였다. 그러니 여길 가면 이 병명, 저길 가면 저 병명을 얻을 수밖에.
결국 환자 스스로 고쳐야 할 병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우선 기본에 충실하기로 마음먹었다. 잘 자고, 잘 먹고, 많이 움직이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남들에겐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상이 내게는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이뤄야 할 삶의 목표가 되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잘 자는 일부터 그러했다. 두통이 오래 지속되다 보니 수면의 질도 안 좋아져서 새벽에 깨는 일이 잦아진 것이다. 게다가 남자들이 군대에 다시 가는 꿈을 꾸듯이, 직장에서 갈등하는 상황의 꿈을 자주 꾸곤 했다. 나는 여전히 과거의 인물과 사건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던 셈이다. 2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직도 나의 마음 한구석은 과거 상처 받았던 시간 속에 놓여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나는 매일 한강 산책을 나섰는데,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걷는 길은 내 일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평화가 잠깐이나마 흔들리는 순간이 있었으니, 강 건너 풍경과 마주칠 때였다. 출퇴근하며 매일 지나갔던 빌딩이 보였기 때문이다. 부진한 성적 끝에 불명예스럽게 은퇴한 왕년의 야구선수가 야구장을 봤을 때의 감정이 이런 것일까?
나라고 어찌 그 시절이 괴롭기만 했겠는가. 대학을 갓 졸업하고 쭈뼛거리며 사무실에 들어서던 첫 출근일을 기억하는데, 때로는 밤을 새워가며 일하고, 서로의 고충을 이해하는 사람들과 맥주를 마시며 헛소리를 해대고, 조카에게 장난감을 사주거나 부모님께 용돈을 줄 만한 여유를 얻은 곳인데 말이다.
그러나 그토록 소중했던 나의 터전이 어느덧 나의 지옥이 되고, 결국 스스로 걸어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 그 사실이 안타깝고 슬퍼서 그 빌딩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보기 힘든 영화 장면을 빨리 돌리듯이 그렇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좀 별난 꿈을 꾸었다.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한 남자아이가 꿈에 나왔는데, 잠에서 깬 후에야 ‘아, 그런 애가 있었지’ 했을 정도로 수십 년을 잊고 지내온 아이였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아이가 뜬금없이 꿈에 나온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내가 그 애를 좋아했나? 아니면 심하게 다퉜거나 놀림을 받았나? 분명한 건 꿈에서 보기 전까지는 어쩌다 한번 떠올리는 일조차 없었던 아이라는 점이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였다. 평소 같으면 또다시 새벽에 깬 스스로에게 실망하면서 다시 잠들려고 무진장 애를 썼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따라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남들은 일부러 알람까지 맞추면서 새벽에 기상하는데 이렇게 저절로 일어나니 얼마나 좋냐, 기왕 덤으로 주어진 시간이니 아무거나 해보자. 굳이 이 시간을 유용하게 보내려고 애쓰지도 말고, 그냥 쓸데없는 낙서 따위라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보자.
그렇게 나는 거실 불을 켜고 식탁 앞에 앉았다. 그런데 뭘 쓰지? 잠시 고민하다가 꿈속에 등장한 남자아이에 대해 쓰기 시작했다. 키가 작고 하얗고 연한 갈색 머리에 예쁘장한 얼굴. 어딘지 연약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장난이 심하고 말투도 거친 아이였다. 공부는 꽤 잘했던 것 같다. 그러나 여기까지. 더 이상의 기억은 아무리 애써도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기억들이 꼬리를 물고 떠오르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아이들의 얼굴이 내 머릿속에서 몽글몽글 피어났다. 나는 의식의 흐름에 손을 맡긴 채 그 아이들에 대한 기억을 쭉 적어 내려 가기 시작했다.
아프다고 해서 귤 사들고 문병 갔던 단짝 친구, 방실이라는 이름대로 매일 방실방실 웃었던 친구, 내 지우개를 훔쳐갔던 아이, 집에 초대해서 김치 부침개를 만들어줬던 아이(지금 생각하면 그 나이에 어떻게 그리 맛있는 김치 부침개를 만들 수 있었는지 놀랍다. 어른인 나도 잘 못하는데 말이다), 가족이 함께 쓰는 방 모퉁이에 커튼을 달아서 자기만의 공간을 만들었던 친구, 화장실 가고 싶다는 말을 못 해서 결국 바지에 똥을 싸고 말았던 아이 등등 별별 아이들이 다 소환되었다. 지금 그들은 모두 어떻게 살고 있을까?
나는 어느새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의 추억까지 뒤지기 시작했다. 나에게 시험지를 보여 달라고 했던 아이, 곧 간질 발작을 일으킬 것 같으니 옆에 있어 달라고 했던 친구, 개학날 빡빡 깎은 머리를 싸구려 가발로 가리고 나타난 친구, 가난한 자신의 집안 사정을 희화화해서 들려줬던 친구, 엄마 밥그릇에 계란 반찬을 올려주며 ‘이것도 좀 먹어’라고 말했던 친구(엄마에게 그렇게 살갑게 대하는 사춘기 소녀라니, 매일같이 엄마와 싸웠던 나로서는 너무 충격이었다) 등등... 그 아이들의 특징을 적고 기억나는 대로 얼굴 생김새도 그렸다.
그렇게 과거의 인물들을 소환하는데, 이상스레 마음이 차분해지더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많은 사람들이 내 인생을 스쳐 지나갔구나. 매일 붙어 다니던 단짝 친구도, 50명쯤 되었던 같은 반 아이들도, 나를 호되게 다그쳤던 중3 때 담임선생님도 이제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구나. 모두 어딘가에서 각자의 삶을 살고 있겠구나. 그 사실이 전혀 아쉽지도, 씁쓸하지도 않구나.’
‘인생은 연극 무대’라는 상투적인 비유가 가슴으로 이해되었다. 정말로 인생은 연극 무대와 같았다. 1막이 끝나면 1막의 인물들이 퇴장하고, 2막이 끝나면 2막의 인물들이 퇴장하면서 나의 연극은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이미 오래전에 퇴장해서 집으로 돌아간 인물들, 다시 불러낼 수도 없는 배우들, 돌이킬 수 없는 장면들을 떠올리며 한참을 그렇게 무대에서 허깨비처럼 연기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초등학교 친구들이 어린 시절에 잠깐 나와 놀아주고 다음 막에서 퇴장했듯이, 그들의 부재가 전혀 아쉽지 않듯이, 내 인생의 다른 장면들도 아쉬울 것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288막의 장면을 떠올리며 589막을 연기하고 있었던 셈이다.
생각해보니 내게 상처만 준 인물은 하나도 없었다. 나에게 손가락질했던 상사가 줬던 북스탠드를 지금도 사용한다. 나를 따돌렸던 동료와는 한때 여행을 같이 가기도 했던 사이다. 나쁜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들과 웃고 떠들고 서로 상처를 주거나 받았던 장면들이 떠오르면서, 왜 사람들이 좋은 기억만 간직하라고 말하는지 깨달았다. 잠시라도 좋은 시간을 함께했으니 그것으로 됐다. 그 시간을 위해 잠깐 내 연극에 출연했다 사라진 이들이라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고 심지어 고맙기까지 했다.
내 인생 어느 한 시기를 함께한 이들, 그들의 역할을 다한 뒤 퇴장한 인물들, 뜬금없이 꿈속에 등장한 그 남자아이처럼, 언젠가는 희미한 옛 기억의 그림자가 될 모든 이들. 나는 과거의 인물들을 마음속에서 떠나보내며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모두 고마웠어.’
요즘도 나는 한강 산책로를 자주 걷는다. 그리고 이제는 간 건너 빌딩을 봐도 그런가 보다 한다. 실은 한강 건너편을 의식하지 않을 때가 더 많다. 나의 무대는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