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공업자 Dec 16. 2024

노병은 늙지 않는다

<집수리 마음수리 2>

"두 개 하는데 저렴하게 해 주십시오!"

"선생님 이 정도면 저렴하게 해 드리는 겁니다!"

"아니... 내가 요 앞에 철물점에 알아봤는데 두 개 하면 하나값에 해준다고 했습니다!"

"아! 그러세요! 그러시면 당연히 거기서 하시는 게 맞습니다."


의뢰인은 주방 수전이 노후되어 물이 새면서 아랫집에 누수가 되었다고 했다. 누수된 부분은 어찌어찌해서 합의가 되었는데 원인이 된 주방수전을 교체하시길 원하신다며 수리 요청을 하셨다. 막상 방문하니 주방수전과 세면대 수전을 동시에 교체하는데 공임을 한 개 값으로 해달라고 하신다. 이럴 경우 실랑이보다는 한 개 값에 해준다고 했던 업체에서 하면 된다. 의뢰인과 수리업체 모두 득이 되기 때문이다. 짐을 챙겨 막 나오려고 했다.

"그러지 말고 교체해 주고 가셔야죠!"

"그러시면 선생님은 어느 정도가 적당하시겠어요?"

두 개를 교체하는 처음 조건으로 20%를 할인해 드리겠다고 했더니 50%를 원하셨다. 의뢰인이 50%로 흥정했었던 있지도 않은 철물점 핑계로 한번 던져본 값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이 보기에도 너무한 듯싶었는지 서로의 중간 정도면 좋겠다고 하셔서 그렇게 해드리기로 했다.


싱크대 아래를 열어 주방수전을 살펴보니 제법 물이 많이 흘렀는지 물기가 흥건했다. 이 정도면 아래층 피해도 상당할 것 같았다. 싱크대 아래는 매우 어둡고 좁아 수리하기가 어렵다. 의뢰인이 조금 전 있었던 수리비 흥정에 미안했는지 바이스플라이어를 하나 가져오셨다. 전역 후 건설회사에서 일할 당시 사용하던 것인데 지금은 쓸 일이 없으니 선물로 주겠다고 하신다. 잠시 후 점심시간이 지났다며 한눈에 봐도 먹음직스럽게 숙성된 커다란 대봉을 가져다주신다. 자상하게 화장지도 챙겨주시는데 아까와는 사뭇 다른 부분이 있으셨다.

일상손해배상보험이 있으신지 여쭤보았다. 의뢰인은 그런 것도 있냐고 되물으신다. 일상생활배상보험은 일상생활에서 타인에게 재산상의 손해를 끼쳤을 때를 대비해서 들어놓으면 좋다고 알려드렸다. 보통 운전자보험이나 상해보험에 특약으로 저렴하게 들 수 있다고 알려드렸다. 이번 경우처럼 누수가 생겨 아래층에 배상해야 할 일이 생겼을 때 많은 도움이 된다고도 알려드렸다. 그렇잖아도 전에도 누수피해가 있어 큰돈을 들여 아래층에 배상했다고 하신다. 의뢰인은 당장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보험을 알아보시더니 알려줘서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으셨다.


처음 의뢰인의 전화를 받았을 때 젊은 남성인 줄 알았다. 절도 있고 힘 있는 말투에 '다나까'(말끝을 '다' 또는 ''로 끝냄)로 끝나는 군대 어투였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을 말씀드렸더니 '껄껄껄'웃으신다. 공군하사관으로 군생활을 오래 하셨다고 하신다. 자신을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말씀을 하신다.


영화 '실미도'에 나오는 조교중 한 사람이었다는 말씀을 하신다. 나는 깜짝 놀라 기간병 중 생존자냐고 물었다. 의뢰인은 하사관교육이 있어 동기 한 분과 육지로 나왔고 다른 분들이 대신해 들어갔었다고 했다. 그 덕에 생존할 수 있으셨지만 대신해 들어갔던 분들을 회상하시며 몹시 힘들어하셨다. 훈련병들 중 나이가 많은 분들도 계셨다고 하셨다. 일과시간엔 어쩔 수 없이 훈련병들을 혹독하게 훈련을 시켰지만 밤에 몰래 찾아가 죄송했다며 사과했던 분들은 살아남았던 것 같다고 하셨다.

의뢰인은 주방수전과 세면대 수전을 가는 내내 옆에 계시며 전설적인 무용담을 계속해서 들려주셨다. 더욱 놀라운 것은 북한에서 넘어온 전투기가 수원비행장에 착륙했을 당시 최초 보고자라는 말씀도 들려주셨다. 그러고 보니 문 앞에 '국가유공자의 집'이라는 문패가 왜 걸려있는지 알 것만 같았다. 나는 군 복무기간 중 김일성사망을 겪었고 비상경계령에 완전무장상태로 취침하는 등 힘들었던 이야기를 나누며 의기투합했다. 의뢰인은 살아있는 전설 그 자체였다.


의뢰인은 70대 후반이라고 보기엔 군살없는 다부진 몸과 맑은 정신은 젊은이 못지않으셨다. 실버타운에 들어가실 계획이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아직 한창이신데 말이다. 의뢰인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도 연세가 많으시다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었다. 생각도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셨고 폭넓은 안목을 가지셨. 무엇보다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지 알고 계셨다. 오랜 기간 군생활을 하셨지만 전쟁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나와 일맥상통하셨다. 수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엔 점심시간에 미안하시다며 단감까지 챙겨주신다.

의뢰인은 경험과 나이가 많다고 해서 일방적이지 않으셨고 상대방 이야기를 잘 경청해 주셨다. 배려와 대화를 잘하시는 것이다. 의뢰인이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은 열려있는 마음과 소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비결은 절체절명의 순간 동아줄이 되어주기도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