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 일은 기본적으로 개인 사업자지만 매일 출근해 짐을 실으며 얼굴을 보는 같은 팀 동료들이 있다. 하루에 얼굴을 보는 시간은 길지 않지만 어쨌든 매일 얼굴을 봐야 한다는 점에서 직장 동료나 마찬가지다.
“언제까지 이 일하려고?”
“잠깐 하는 거지?”
유일한 20대 택배 기사라 그런가, 처음에는 그들이 나를 볼 때마다 의아하다는 기색을 숨기지도 않고 이렇게 물어왔다.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데 허여멀건한 얼굴의 어린놈이 얼마나 버틸지 보자는 건가?’
그런데 계속 일을 하다 보니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모든 택배기사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어떤 기사들은 자신의 일을 빠져나갈 수 없는 하나의 굴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특히 나처럼 사업을 하다가 어려워져 이 세계에 들어왔다가 돈을 많이 벌게 되어 다른 일을 할 수 없게 된 경우엔 더 그랬다.
꼭 그래야 할까?
내가 보기에는 이 일도 충분히 좋은 일이었다. 하루에 정해진 시간 동안 정해진 업무를 마치면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할 수 있었고, 매일 비슷한 업무를 반복하는 것치고는 돈도 많이 벌었다. 물론 땀 흘리며 돌아다니는 일이니만큼 그만큼 몸이 지치고 일이 힘들었지만,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수명을 갉아먹을 정도로 힘든 일은 또 아니었다. 물론 허리 굽은 할아버지가 되어서까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겠지만, 그건 50대에 퇴직해야 하는 여느 직장인이나 마찬가지일 터였다.
만약 계속 이 일을 하게 된다면 어떨까?
어느 날은 이런 생각을 했다가 하루 종일 그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광고회사로 일주일에 천만 원씩 벌던 시절과는 당연히 비교가 안되었지만, 그냥 일반적인 직장인들을 생각하면 한 달에 5~600을 월급으로 가져가는 건 결코 적은 벌이가 아니었다. 업무 환경을 편하게 바꿔놓은 덕에 하루에 6시간만 일해도 하루 일이 끝났고 나름의 업무 루틴도 생겨 일하면서 유튜브와 팟캐스트를 들으며 생각에 잠길 여유도 있었다. 하지만 영원히, 이 일을 하게 된다고 생각하니 상상만으로 숨이 턱 막혔다. 이 일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아서나 나쁜 일이라고 생각해서가 결코 아니었다.
돈이 되든 안 되든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은 이유였다
누군가는 지나치게 순진하다고 할만한 이런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다시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자금과 심적 여유가 생길수록 이런 욕망은 더욱 강해졌다.
택배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그려지지가 않았었다.
어쩌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라는 말로 대표되는 자아실현 자체가 MZ 세대가 공유하는 공통적인 망상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비관적인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먹고사는 일 외에, 돈벌이 외에 진정으로 깊은 만족을 주는 어떤 것이 있을 거라는 달콤한 환상. 언젠가부턴 그 환상을 현실로 이루고 싶다는 생각이 다시 들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아직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탐색하고 이루어나갈 젊음이 있었고 의지가 있었다.
일을 하면서 계속 자기계발 유튜브를 들었다.
'켈리 최'나 '삼 프로 TV'같은 유명한 이들부터,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스스로에게 동기부여하며 자신만의 길을 걷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하루 쉬는 일요일에는 책을 읽었다.
그리고 살면서 수시로 이곳저곳에서 수집해 내 방식대로 분류해두었던 명언들을 읽으며 앞으로의 삶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면서 연필로 스케치를 해나가듯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의 삶에 대한 윤곽을 잡아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깨달음이 머릿속을 강타했다.
“택배 사업을 배워보자”
나는 내 삶의 밑바닥에서 다시 일어서게 해준 택배 일에 깊은 애정이 있었고, 택배기사로서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이것이 정말 내 ‘천직’이라고 느끼게 해 줄 1%의 진한 열정이 없을 뿐이었다.
“지금 하는 택배 일을 ‘내 사업’으로 만들어 볼 수 없을까?”
택배기사의 정체성을 가지고 내 사업을 꾸려보는 방법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는 고민 끝에 나는 택배의 꽃인 ‘집화’를 사업적인 관점에서 접근해보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업계에서 나의 스승이 되어줄 분을 끈질기게 찾았다.
"그리고는 그 분에게 연락해 약속을 잡은 뒤 양복을 꺼내 입었다."
사업하던 시절 하던 방식 그대로였다.
오랜만에 꺼내 입은 양복에서는 익숙한 섬유 냄새가 났다. 그 냄새를 맡으니 오랜 시간 잊고 살았던 설렘이 스물스물 되살아나 마음을 간지럽혔다.
그렇게 집화점 책임자로서의 내 인생 새로운 장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