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보다는 훨씬 더 다이내믹한 상황이 많이 펼쳐지기에 수업과 관련해서는 하룻밤을 꼬박 새워 이야기할 수 있다면 학급경영과 관련해서는 일주일을 꼬박 새워서 이야기해도 부족할 수 있다. 교사로서 마음의 준비, 멘털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하는 것이 바로 이 학급경영이다.
2017년, 중등교사로 임용된 때부터 휴직 전까지 단 한 해도 담임을 하지 않았던 적이 없다. 그리고 담임을 했던 그 모든 해에 나는 "중학교 3학년 담임교사"였다.
누군가 나에게 결혼여부를 물어본 적이 있었다. 언제 어디서 누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는 가물가물해서 기억이 나질 않지만, 내가 어떤 대답을 했었는지는 기억이 난다.
"결혼이요? 애가 30명인데요."
미혼시절에도 "딸린 애가 30명인데요." 라며 아무렇지 않게 말하던 나였다. 매년 담임을 해오던 나는 단 한해도, 단 한순간도 내가 맡은, 우리 반 아이들을 남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내 손에 맡겨진 1년만큼은 그들은 나의 제자이기 이전에 나의 자식, 나의 아이들이었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의 자식을 어찌 내 자식과 똑같이 생각할 수 있겠는가. 초임시절에는 자녀도 없었던 때이기에 자식이 무엇인지, 모성애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나였다. 그런 내가 어떻게 그 많은 아이들을 내 자식처럼 생각할 수 있었을까.
엄청난 인류애도 아니고 내가 성인군자여서도 아니다. 나의 천직이 교사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던 때, 일명 "답 없는 아이들"을 참 많이도 만났다. 남들은 그 학생들을 보며 "답이 없다."라고 말하며 혀를 내두르는데 이상하게 나는 그들이 답이 없는 게 아니라 답을 모르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답이 무엇인지 가르쳐 준 적이 없었기에 답을 알 수 없었고 그렇게 그들은 세상 앞에 본인들이 누구인지 소개하기도 전에 마치 누가 정해준 것 마냥 그냥 답이 없는 아이들이 된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이유가 어찌 됐건 일명 "답 없는 아이들"이든 "답 있는 아이들"이든 내 자식이 아니고서야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얼마나 많으랴. (자식을 낳아 키워보니 내 자식 또한 정말 답 없는 하루하루의 연속인데 말이다.)
남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가르침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들은 수없이 많이 찾아온다.
중학교 3학년쯤 되니 이미 내 키를 훌쩍 넘어가는 학생들도 있다. 키와 머리가 커진 만큼 본인들도 다 큰 어른과 같다며 어른처럼 행동하려 할 때가 있다. 하지만 아무리 커봤자 학생들은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아이이다. 미성숙하고 불안하다. 그렇기에 어른이 필요하고 가르침이 필요하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정해진 답은 없다지만, 그 살아가는 길 속에서 마주하게 되는 수많은 물음표들에 스스로 정답을 찾아갈 수 있는 내력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내가 마주치게 될 사람들과는 어떠한 최소한의 예의와 태도가 있어야 하는지, 살다가 길을 헤매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 어떠한 지혜가 필요한지, 세상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을 때 어떻게 다시 일어나야 할지 등등, 수많은 물음표들에 스스로의 답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모범답안 정도는 그들에게 알려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부모와 교사 그리고 학생들이 살아가면서 마주치게 될 수많은 어른들이 "답 없는 아이들"을 내버려 둘 수 없다고 생각한 이유이다. 모범답안을 그대로 따라 할지 새로운 답을 도출해 낼지는 그들의 선택이라 할지라도 적어도 어른이 삶으로 보여줄, 가르쳐 줄 의무가 있다고 말이다.
부모조차 그 일이 버거울 수 있기에 남의 자식으로 여기면 교사인 나는 학생들과 마주치는 수많은 순간에 얼마나 많이 그들의 손을 놓고 싶을까. 그래서 그들을 내 자식이라 생각하기 시작했다.
반 아이들이 속상하게 한 날, 반 아이가 큰 사고를 쳐서 여기저기 같이 불려 다니느라 정신없던 날, 수없이 내려놓고 싶었던 그 많은 담임으로서의 날들에 나는 속으로 이렇게 되네이고 또 되네이며 학교에 갔다.
"이래나 저래나 이미 내 품 안에 들어온 이상 너희는 내 새끼들이다. 잘못된 일을 하면 내가 제일 먼저 누구보다 크게 혼낼 것이고, 기특한 일을 해도 내가 제일 먼저 알아줄 것이고, 사랑을 줘도 내가 제일 먼저 줄 것이다. 사랑을 받아본 적 없다고? 그러면 내가 넘치게 줄 테니 마음껏 받아봐. 그리고 사랑을 어떻게 줘야 하는지 배워봐."
아침 조회가 끝난 쉬는 시간에 칠판 한구석에 짧게 반아이들이 볼 수 있는 편지를 적어놓을 때가 종종 있었다.
그날도 우리 반 수업이 없는 날이라 종례 전까지는 교실 들어올 일이 많지 않을 것 같아 조회를 마치고 "예쁘고 멋진 내 아가들"로 시작하는 편지를 써놓고 나왔었다. 몇 시간 만에 종례시간에 반으로 들어왔더니, 아침에 내가 써놓았던 편지 옆에 아이들의 답장이 적혀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우리 엄마"라는 말이 적혀있었다.
그들 등본에 '나'라는 엄마는 없지만, 담임인 나를 "엄마"라고 적으며 내 편지에 라임을 맞춰놓은 아이들의 답장을 보며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나는 그들의 부모가 되었고 그들은 나의 자식들이 되어가며 우리는 함께 한 해를 살아갔다. 어느 해에는 30명, 어느 해에는 32명, 어느 해에는 34명, 어느 해에는 29명...... 수많은 아이들과 함께.
사랑을 모르던, 사랑을 말할 줄 모르던 아이들이 사랑을 말하게 되는 순간이 올 때까지. 내가 먼저 그들에게 사랑을 흘러넘치게 줄 수 있도록, 오늘도 부족한 내 마음 그릇에 사랑을 가득 담아 본다.